# 240
허무 (1)
“착검.”
지이잉!
헨리의 대항마라고 생각했던 핌과 림을 ‘순수한 마력’만으로 박살 내 놓았으니, 아서스의 자존심은 충분히 짓밟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헨리는 마력을 폭발적으로 출력시킴과 동시에 콜소드를 뽑아 들었다.
“검이라…….”
아서스는 겁먹지 않았다.
도리어 흥미로운 눈빛으로 헨리가 뽑아 든 검을 살펴보았다.
“죽은 대마법사의 수제자이면서 검을 쓰다니…….”
“내가 검을 쓰든 말든, 곧 죽을 놈이 따지는 것도 많구나.”
쿠구구구!
아서스의 빈정거림에 헨리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그리고 뽑아 든 콜소드의 검날에 오러를 덧씌웠다.
가슴이 뛰었다.
이제 몇 걸음만 걸어 나가 검을 휘두르면, 헨리의 살생부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두근- 두근-
이 날을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려 왔던가?
헨리는 환생 직후, 이따금씩 많게는 하루에 수십 번이나 아서스의 목을 자르는 꿈을 꿨다.
그렇게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이제 1년이 지나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헨리는 비로소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실패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아서스는, 정치적인 지략은 몹시 뛰어나지만 마법이나 오러 같은 ‘무력’이라 부를 만한 힘은 조금도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스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헨리의 두 눈을 직시하고 있었다.
‘하?’
평온한 아서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헨리는 곧 금방 기분이 더러워졌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들 수 있는지, 헨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역겨운 놈.”
그래서 헨리는 아서스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피식.
그러자 아서스가 웃었다.
이에 헨리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분노를 원동력 삼아 있는 힘껏 아서스를 베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의 검이 아서스의 육신을 통과했다.
“……!”
아서스는 눈앞에 또렷이 있었다.
하지만 헨리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덕분에 헨리는 마치 신기루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서스의 신형은 그대로였고 애꿎은 공기만 휘저어졌다.
“아서스!”
분노가 뒷목을 후려치고 대뇌를 울렸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헨리가 덜컥 소리를 지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서스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크크큭!”
녀석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그리고 반쯤 투명해진 몸체를 뽐내며 헨리에게 말했다.
“마음 같아선 네놈과 어울려 주고 싶지만…….”
아서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손끝으로 핏줄이 선 헨리의 이마를 짚었다.
이마에 아서스의 손가락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헨리는 머리를 회전시켰다.
대체 무엇일까?
무슨 원리로 나는 아서스를 베지 못하는데 놈은 나의 이마를 만질 수 있는 걸일까?
그러나 전직 8서클 대마법사의 두뇌로도, 헨리는 그 원리를 떠올릴 수 없었다.
분했다.
몹시 분하고 화가 나고 치가 떨렸다.
분명히 이 지독한 복수극의 막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를 해서라도 핌과 림을 어그러뜨렸다.
그리고 그러한 광경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헨리에게 아서스는 통렬한 쾌감을 느꼈다.
헨리에게 아서스의 미소는 그것은 기만이었으며 모든 것을 알고도 자신을 조롱하는 기분 나쁜 비웃음이었다.
이윽고 이마에서 손가락을 뗀 아서스가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군, 후훗.”
말을 끝으로 아서스는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얼마간의 침묵.
이제 헨리를 제외하고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는 쥐새끼 한 마리도 없는 황궁 내부에 참을 수 없는 지독한 적막함이 찾아왔다.
헨리는 반쯤 입을 벌렸다.
그리고 초점을 잃은 동공을 하고서 아서스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몇 번이나 좀 전의 상황을 곱씹어 보았지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은 대륙 최초의 마검사였다.
그리고 대륙 유일의 7서클 마법사였으며 동시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대륙 최강의 전사였다.
그런 자신을 기만하며 신기루처럼 사라지다니?
헨리는 아서스가 사라질 때, 그 어떤 마력의 파동도 느끼지 못했다.
텔레포트나 블링크 등, 이동 마법이 일어날 때 생기는 그 고유의 파동을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납득할 수가 없었다.
‘신성력? 아티팩트? 아냐, 절대 아니야…….’
수많은 가설과 추측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았다.
동시에 그동안 자신이 쫓아온 것이 진짜가 맞는지에 대한 후회가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어우러져 헨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지이잉…….
맥이 풀리자 전신을 휘감고 있던 콜아머도, 분노로 진동하던 콜소드도 곧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활화산처럼 폭발하던 오러 또한 물먹은 양초처럼 파사삭 사그라들었다.
“…….”
헨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텅 빈 황궁.
대체 무엇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그 사이에 수도를 급습한 것일까?
그리고 아서스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헨리는 망망대해를 떠도는 유령선처럼 다소 허망해진 눈빛으로 텅 빈 황궁을 바라보았다.
바뀌는 건 없었다.
아서스는 사라졌다.
황궁 또한 헨리의 등장으로 인해 텅 빈 곳이 되었다.
“후…….”
이윽고 헨리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잔뜩 녹아 있는 뜨거운 숨이었다.
그리고 얼마간 생각의 방황 끝에 다시금 이성을 붙잡았다.
“……그래, 이렇게 쉽게 풀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헨리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다시금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서스는 눈앞에서 사라진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아직 헨리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래, 아서스 그놈은 내가 금지시킨 키메라에까지 손댄 놈이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말이 안 돼.’
헨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찌 됐든 아서스는 자신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에 다시 정신을 차린 헨리는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놈은 나에게서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는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근데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도망을 친다고?’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대륙 최고의 마검사를 상대로 가뿐히 도망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기만까지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서스는 왜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헨리를 제거하지 않은 것일까?
이에 헨리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중에서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가설들은, 아직 아서스가 가진 그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그 힘’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껏 손에 넣은 제국을 버려 가면서까지 도망칠 이유가 없을 거라는 게 헨리의 추측이었다.
얼마 동안 차분하게 마음을 다독이자 헨리는 금방 생각이 정리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제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피 튀기는 혈전을 종전시키는 것.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킨 다음, 그때가 돼서도 아서스가 제국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헨리는 아서스가 세운 제국을 자신이 집어삼키기로 했다.
물론 제국의 소유 같은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단지 아서스가 그토록 오랫동안 준비한 ‘아이니아 제국’을 자신이 집어삼킴으로써 아서스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불어 더 이상 대륙 정세나 제국 같은 것에 관심을 쏟지 않아도 될 때.
그때부터 헨리는 온전히 ‘아서스’의 추적에 온 힘을 기울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서스, 뭐가 됐든 간에 네놈만큼은 죽을 때까지 뒤쫓아 주마.’
헨리의 두 눈에 다시금 짙은 독기가 어렸다.
그리고 생각의 정리를 마친 헨리는, 이내 다시 전쟁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밤낮을 달려 헥터는 드디어 사막의 모래를 밟을 수 있었다.
“드디어……!”
헥터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영체 상태이기에 목이 타거나 발이 부르트지는 않았지만 킬라이브에 어린 친구를 두고 왔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마음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하트라의 뜨거운 태양과 모래사장이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샤하트라 협곡에 진입한 헥터는 다시 며칠을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샤하트라 사막의 남쪽에 위치한, 수도 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려했던 마법 결계는 없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더더욱 질주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 칸에 도착했을 때, 헥터는 급히 궁으로 들어가 어딘가에 있을 헤라리온을 찾았다.
그러나 궁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헤라리온은 보이지 않았다.
헥터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음 같아선 궁에 주둔한 아무나를 붙잡고 헤라리온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영체 상태의 헥터는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었기에 혹시 모를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기랄……!”
이에 헥터는 사람이 다니지 않을 법한 여느 구석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상황을 타개시킬 만한 방법을 짜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 그놈이 있었지!”
마땅한 인물을 떠올린 헥터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수십여 개의 벽을 통과한 끝에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케일의 집무실’이었다.
케일은 마침 수업을 끝낸 후 의자에 누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얼굴에 책을 덮고 자고 있는 케일에게, 헥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
“이봐!”
“……으음?”
이곳은 학생들도 함부로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니 케일은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몽사몽인 상태로 잠에서 깬 순간, 케일은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영체 상태의 헥터와 마주할 수 있었다.
“으, 으아악!”
케일의 집무실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츄릅!”
드라칸은 품속에 몇 개의 그리벨을 끌어안고서 게걸스럽게 그것들을 베어 물었다.
그리벨을 한입씩 베어 먹을 때마다 전신이 짜릿해지며 마력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조금만,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숱한 호기심의 해결로 인해 드라칸은 순수한 깨달음들을 얻어 꽤 오래 전에 6서클의 경지를 달성해 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지식은 7서클의 대마법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각학에 대해선 꽤나 권위 있는 전문성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7서클로 각성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도사에서 아크 메이지가 되는 것에 비해 7서클이 필요로 하는 마력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칸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벌써 수십, 아니 수백여 개의 그리벨을 섭취함으로써 이제 곧 7서클로 각성할 수 있을 때가 오고 있음을 말이다.
이에 드라칸은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함께 다시금 그리벨을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드라칸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아 보이는군, 드라칸.”
그는 다름 아닌 아서스였다.
아서스는 특유의 웃는 낯짝과 함께 드라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에 드라칸이 베어 물던 그리벨을 내려놓으며 아서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모든 게 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덕분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렇다면 각성도 곧 이루어지겠군?”
“물론입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7서클로의 각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아서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드라칸은 아서스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서스가 말했다.
“난 좀 전에 헨리 모리스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헨리 모리스를…… 말씀이십니까?”
헨리를 만나고 왔다는 말에 드라칸의 두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드라칸 또한 죽은 대마법사의 유일한 수제자, ‘헨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녀석은 자신의 스승을 압도할 만큼 몹시 강해져 있더군. 녀석을 잡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핌과 림을 순수한 마력으로 찍어 누를 정도로 말이야.”
“……!”
핌과 림은 블랙 미스릴과 인간을 섞어 만든 드라칸의 역작이자 오직 헨리를 제압하기 위해 만든 메이지 킬러였다.
그런 핌과 림을 마력으로 찍어 누르다니?
드라칸이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아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재미있는 놈이야. 생각보다 시시한 놈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어 흡족하더군. 그래서 말인데 드라칸, 너에게 수도의 포식을 허락토록 하마.”
“……!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드디어 때가 도래한 것 같다, 드라칸.”
수도의 포식.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 드라칸은 아서스의 앞에서 치솟는 광대를 숨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