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더비 매치 (2)
비밀은 비람의 환술이었다.
비람 대제사장은 전투가 벌어지고 어느 무렵쯤, 환술탑에 주둔한 환술사들과 함께 제국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환술을 발동시켰다.
그것도 아주 간단한 환술을 말이다.
첫 대상은 사다리를 옮기는 병사들이었다.
덕분에 사다리를 운반하던 병사들은 환술에 의해 거리감을 상실하게 되었고, 모두들 성벽에 사다리를 걸치지 못한 채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피해는 없습니까?”
“아, 로난 님! 덕분에 무사히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헤라리온과 비람에 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로난이었다.
로난이 2군단에 배치된 까닭은 간단했다.
헤라리온은 분명히 좋은 지휘관이었지만 헤라리온 자체가 가지는 무력이 다른 장군들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에 로난을 함께 배치한 것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헤라리온과 더불어 비람과 로난, 그리고 세 개의 삼각탑들 중 환술탑을 헤라리온에게 배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헨리의 전략은 빛을 발했다.
그 증거로 킹턴이 날린 검격을 로난이 되받아쳐 피해를 상쇄시켜 주었으니까.
“그나저나 운명도 이런 운명의 장난이 없네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양아버지가 이곳에 오실 줄이야…….”
“양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재 저희와 맞붙고 있는 제국군의 군단장이 바로 제 양아버지였던 킹턴 포람이란 사람입니다. 물론 지금은 제가 포람의 성을 버렸으니 그 어떤 관계도 없지만요.”
“아아,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좀 전에 저와 눈이 마주쳤는데 엄청 놀라더군요. 듣기로는 저를 포섭하기 위해 직접 칼리번 요새를 찾았다고 하던데…….”
헨리로부터 정보를 꾸준하게 받고 있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돈 알고 있다.
그리고 로난은 이번 기회를 빌려 킹턴과 맞붙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비록 이셀란에 의해 포람이라는 족쇄를 벗어나긴 했지만 헤밀턴을 혼내 준 것으로는 내심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킹턴.’
로난은 몇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성곽의 끝에서 다시 한 번 킹턴과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킹턴.
한평생 차가운 무시만을 일삼아 왔던 양아버지의 얼굴에 새로운 표정을 솟게 했으니 로난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짜릿함을 느꼈다.
이윽고 로난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 웃어?”
그리고 킹턴은 로난이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혈압이 올랐다.
하지만 당장 혈압이 올랐다고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이익……!”
도발은 이정도면 충분했다.
도발을 마친 로난은 다시 등을 홱 돌린 후 헤라리온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곧 깨달을 테니 환술에 대한 대책도 금방 마련될 것입니다. 저들에겐 성녀가 있으니까요. 그러니 지금부터 슬슬 다음 계획을 시작해야 할 듯싶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마물의 숲에서 숱하게 구르며 수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책임져 왔던 로난이다.
그러니 로난은 헤라리온에게 부족한 지휘력과 통솔력이 있었다.
그리고 헤라리온은 왕족 특유의 거만함이 없고 일반인들은 감히 가지지 못할 라의 힘과 재능 있는 인재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이 두 사람이 훌륭한 콤비가 되어 커다란 시너지를 발휘할 것을 예상했다.
“네놈이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구나……!”
분노한 킹턴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만 해도 충분한 분노의 이유가 되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대척점에 서서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니까.
이에 킹턴은 아버지의 무서움을 보여 주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로난이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 난 검사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자신의 아성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로난은 아직 궁극기를 익히지 못한 상급 소드 마스터였고 킹턴은 궁극기를 익힌 최상급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상급과 최상급의 경지 차이는 오러의 밀도나 양이 아닌, 자신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쏟아 낼 수 있는 궁극기의 사용 유무였으니까.
하지만 로난은 자신이 아직 궁극기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여 킹턴이 두렵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상급과 최상급의 차이는 궁극기의 사용 유무 정도였으니까.
즉,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이는 단순한 관점의 차이란 말이었다.
‘그러니 검격 정돈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었던, 전 부자 관계의 더비 매치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시작해라.”
6시 방향.
그곳에는 4군단의 군단장을 맡은 평화교의 유일한 성기사단장, 로거가 있었다.
팔라딘 로거.
그는 평화교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팔라딘으로 평가받았으며, 평화교의 모든 신도들 중에 마족 토벌에 가장 많이 참여한 팔라딘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교황의 창이기도 한 그가, 교황의 명령을 받들어 제국의 대륙 정벌을 위해 전장에 합류하였다.
로거가 성법을 명령하자 휘하의 성기사들 모두가 방패와 해머를 한데 모으며 축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외우기 시작한 것은 강화 성법이었다.
하지만 몽크들이 외우는 강화 성법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윽고 성법을 모두 외운 성기사들은 전신에 새하얀 아우라를 띠게 되었다.
성법의 이름은 홀리 포스.
외부의 물리적인 충격에 대한 내성과 더불어 상처에 대한 회복력과 재생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성법이었다.
물론 홀리 포스에는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몽크들의 ‘숭고한 희생’의 경우엔 인내심과 두려움이 사라진 만큼 겁이 사라져 다른 신도들에 비해 사망률이 월등히 높았다.
그에 비해 홀리 포스의 단점은 간단했다.
홀리 포스를 시전한 시전자의 무게를 대폭 늘리는 것.
그것이 홀리 포스의 단점이었다.
어찌 보면 교황의 창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대되는 의미의 성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거는 홀리 포스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기사들의 늘어난 무게만큼 휘두르는 망치의 파괴력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이었다.
“망치는 쓰는 사람에 따라 도구가 되기도 하고 무기가 되기도 하지.”
그는 유능한 팔라딘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아서스의 ‘대륙 정벌’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유능함을 입증하려고 했다.
이윽고 1만에 달하는 성기사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빛무리를 생성해 냈다.
이에 같은 군으로 배정받은 제국군들은, 챙겨 온 공성 사다리를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다음 성기사들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로거가 명령했다.
“쳐라!”
꽈앙!
성기사들은 훈련된 군인들처럼 칼같이 절제된 동작으로 동시에 같은 동작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들이 선보인 동작은 단순한 ‘휘두르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휘두르기는 더 이상 단순한 휘두르기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을 넘어 1만이 한데 뭉친 그들의 휘두르기는 기다란 장벽을 한 번에 무너뜨리기 좋은 ‘인간 공성 병기’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로거는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휘하의 성기사들은 다시 한 번 절제된 동작으로 같은 동작을 수행했다.
그리고 다시 성기사들의 해머가 휘둘리자…….
꽈앙!
바위산 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전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쩌저적!
동시에 성벽의 가장 아랫부분에 해당하는 주춧돌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에 성벽 위로부터 화살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오른손엔 해머가, 왼손엔 방패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느릿한 동작으로 왼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환한 홀리 포스가 다시금 결집되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과 바윗덩이, 그리고 끓는 기름 등을 멋지게 막아 주었다.
“다시!”
완전한 방어는 가장 끈질긴 공격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로거가 택한 전략이 바로 이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로거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공성 전략이기도 했다.
꽈아앙!
쩌저적!
느리지만 규칙적인 파괴력.
공성 병기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 위의 연합군을 무시무시한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어이가 없네.”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나지막한 욕설.
바로 맥도웰이었다.
맥도웰은 일렬종대로 길게 늘어진 성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모두들 저 느려 터진, 바퀴벌레 같은 성기사 놈들을 잡지 못해 전전긍긍 하고 있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쯧쯧, 내 저놈들을 부관이라고 두고 있다.”
맥도웰은 일부러 전장에 늦게 개입했다.
6시 방향을 맡은 제국군의 군단장이 누군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우선은 배정받은 부관들에게 일시적으로 지휘를 맡겼다.
그런데 부관들의 대응책이 몹시 형편없었다.
“야 너희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로거 저 녀석이 누군지 몰라서 그런 대응책을 쓰는 거야?”
“아, 아닙니다……!”
“아냐?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 그게 저…….”
부관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원래 도올의 휘하에 있던 검사들로, 인재가 부족하여 급히 4군단의 군단장이 된 맥도웰의 부관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맥도웰의 질책에 부관들은 그만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저리 비켜!”
“구, 군단장님! 방법을 알려 주시면 저희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몰라서 물어? 방패를 들고 느릿하게 해머를 휘두르고 있으면 직접 내려가서 빈틈을 파고들면 되잖아!”
“예?”
“‘예’는 무슨 놈의 ‘예’! 어차피 말해 줘도 모르니 그냥 비켜. 그리고 내가 하는 거나 잘 봐.”
비책이라기엔 너무나도 하잘 것 없는 것.
그러한 비책이라면 누구든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부관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맥도웰이 사용할 수 있는 화법의 한계이기도 했다.
단단함을 능력으로 사용하는 녀석이 있다면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부수면 된다.
‘난 쉬운데 다들 왜 이걸 못 하는 거지?’
흔히 천재들이 일반인들에게 겪는, 공감의 부재 같은 현상인 것이다.
이윽고 맥도웰이 성벽의 가장자리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쯧쯧, 저러다 성벽 무너지겠네. 로거 저놈은 예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이 무식하단 말이야.”
로거도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맥도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맥도웰은 오랜 친구를 대하듯, 중년 특유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성벽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화르륵!
성벽 아래로 낙하하는 동안, 맥도웰의 전신에 푸른 불꽃이 휘감아졌다.
맥도웰이 전신에 오러를 방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타오른 오러는 곧 잠잠한 수평선처럼 전신에 걸쳐 옅게 흩어졌다.
아래로 낙하하는 맥도웰을 발견한 로거가 동공을 확장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맥도웰!”
그 또한 맥도웰과 아주 잘 아는 사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마족 토벌을 몇 차례나 함께 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맥도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맥도웰이라는 이름이 허공에 채 퍼지기도 전에, 아래로 낙하하던 맥도웰의 모습이 사라졌다.
“……!”
얼굴에 드리우는 경악.
로거는 곧 깨달았다.
맥도웰의 주특기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가 맥도웰의 주특기를 뒤늦게 떠올렸을 때쯤엔, 이미 전방의 성기사들로부터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진 뒤였다.
털썩!
대각선으로 길게 그어진 검흔.
한 줄기의 검흔에 15명이 넘는 성기사들이 쓰러졌다.
분명히 홀리 포스와 두꺼운 중갑옷을 걸쳤을 텐데도 성기사들은 고깃덩이처럼 잘려 나갔다.
그리고 쓰러진 성기사들로부터 핏물이 잔뜩 새어 나와 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시시하긴…….”
짤막한 감상평.
쓰러진 성기사들의 끝에, 칼날에 핏물을 잔뜩 묻힌 맥도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본 로거의 얼굴에 분노가 이르렀다.
“맥도웰, 네 이놈!”
콰아앙!
분명히 성법으로 몸이 무거워졌을 텐데도 로거는 빠른 속도로 맥도웰과 거리를 좁혀 왔다.
6시 방향의 대격돌.
힘과 속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