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격돌 (1)
동이 트고 해가 완전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해가 완전히 떠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양 군은 침묵을 집어삼킨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양 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기류가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의 언덕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해가 가장 높이 떠올랐을 때, 그제야 제국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하세요.”
목소리가 들린 것은 제국군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곳은 바로 제국군이 도착하자마자 높이 쌓아 올린 토성.
그러나 희한하게도 토성은 결코 공성 병기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마법사들의 탑을 연상케 했다. 혹은 어부들의 길라잡이가 되는 등대와도 같은 형상이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쌓은 크기였으므로 그 크기가 몹시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혼란스러운 전장을 한눈에 알아볼 사령탑 정도의 높이는 되었다.
제국군은 쌓은 토성을 ‘성탑’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제들이 잔뜩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 흔한 토성조차 거룩해 보였기 때문이다.
흙으로 지어 올린 성탑.
성탑은 중심부를 굳건하게 쌓아 올렸으며 지상부터 최상층까지 연결된 계단이 마치 기다란 뱀처럼 겉면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성탑 위에는 살아 있는 축복이자 성녀라고 불리는 아이리네가 최상급 사제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의 성녀와 열두 명의 최상급 사제들.
평화교에선 이 열두 명의 최상급 사제들을 십이사도라고 불렀다.
이유인 즉슨, 평화의 여신 아이린이 선택한 열두 명의 대리자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 바로 성녀였으며, 성녀 위에 군림하는 자는 바로 교황뿐이다.
성녀가 두 손을 모아 축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십이사도들 또한 두 손을 모으고 축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십이사도들이 축문을 외기 시작하자 계단 전체에 빼곡히 들어선, 상급 사제와 중급 사제들도 차례대로 축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제의 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리가 없어 토성에 오르지 못한 하급 사제들은 성탑을 중심으로 커다란 진을 만들어 선임 사제들을 따라 축문을 외웠다.
그 광경은 마치 결집된 신앙이 꽃을 피우는 듯한 광경이었다.
신성하고 장엄했다.
사제들의 목소리가 더해질 때마다, 단순히 흙으로 쌓아 올린 토성은 마치 세인트 홀의 진짜 성탑이라도 된 것처럼 점점 더 거룩한 형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위대하고 자애로우신 아이린이시여, 여기 대륙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모인 용감한 전사들이 있습니다…….”
성녀 아이리네가 외우는 축문은 단순한 축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태양 사제단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워 클레릭’들을 위한 ‘성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외워지고 있는 성법은 적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일종의 거대하고 신성한 결계였다.
“……이에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를 악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굳건하고 신성한 방패를 내려 주시옵소서……!”
마침내 성녀가 축문을 끝맺었다.
그리고 성녀가 외는 축문의 마지막 문장이 입 밖으로 떠난 순간.
파아아앗……!
1서클 마법사의 라이트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신성하고 거룩한, 그리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따스한 광명이 성탑 전체를 휘감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성탑의 최상층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한 광명은 이내 폭포수처럼 토성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 진을 펼치고 있는 하급 사제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하급 사제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품에 안았을 때, 거룩한 광명은 이내 하늘로 치솟았다.
사아아아……!
오로라.
그것은 마치 신성한 오로라를 연상케 했다.
하늘로 쏘아 올라간 새하얀 오로라는 곧 넓게 흩어진 제국군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마치 아기를 품에 안은 요람처럼 말이다.
“이게 바로 성녀님의……!”
환한 대낮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감싸 안는 밝은 빛과 따뜻한 촉감에 병사들은 나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제국군만이 목격한 게 아니었다.
“흐음, 성법이라…….”
제방의 성.
그리고 제방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헨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교황 그놈이 드디어 미쳤군.”
평화교의 태양단들, 특히 성기사단의 팔라딘이나 사제단의 워 클레릭들은 상대가 마족이나 흑마술사들이 아닌 이상, 민간인들을 상대로 결코 성법을 사용해선 안됐다.
그것이 평화교의 율법이었고 도리였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벌어진 세력 싸움에서 평화교가 성법을 꺼내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평화교가 정치적으로 타락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혀를 찼다.
물론 교황의 심정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아서스의 심기를 거슬러 평화교가 아이니아 제국의 국교가 되지 못한다면, 과거 유라시아 제국 때만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테니까.
‘멍청한 놈, 신이 무슨 줄을 잡아야 되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나 보군.’
헨리는 늙은 너구리 같은 교황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싸움이 끝난다면 당장 세인트 홀로 돌아가 교황의 목을 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성법이 얼마나 위대한지 한번 실험해 볼까?”
무려 몇천 명에 달하는 사제들이 만들어 낸 수호 성법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노력이 허사가 아니란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헨리는 자그마한 이벤트를 선사해 주기로 했다.
부우웅……!
헨리의 몸이 허공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많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헨리의 목적은 은신이 아닌 단순한 ‘관심의 집중’이었으니까.
헨리가 제방의 성 위로 떠오르자 제국군 병사들의 수많은 시선들이 헨리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러한 시선들을 온몸으로 즐기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문이 끝맺어 졌을 때쯤, 헨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동어를 외쳤다.
“……서먼 메테오.”
휘오오오……!
헨리의 머리 위로, 엄청난 양의 대기가 밀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집된 대기는 이내 허공을 찢어 놓았고, 찢어 낸 허공 사이로 새카만 우주를 보여 주었다.
쿠구구구구……!
대기가 진동했다.
벌려진 허공은 마치 찢어진 살갗처럼 고통에 부르르 떠는 듯했다.
그리고 고통에 찬 진동 사이로, 곧 우주를 유영하던 집채만 한 ‘유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유성.
어쩌면 이 세계의 주민들은 하늘에 뜬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의 발아래에 있는 제국의 병사들은, 어떤 의미론 굉장한 행운아라고 볼 수도 있었다.
쿠구구구구……!
서먼 메테오는 말 그대로 우주를 유영하는 별, 즉 운석 하나를 이 세계의 하늘로 소환해 내는 마법이었다.
헨리는 전신의 마나가 주욱 빠져나감을 느꼈다.
언뜻 보면 화염과 대지의 원소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이 마법은, 사실 공간이동 마법이 주류가 되는, 매우 까다로운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아크 메이지 정도의 영역으로는 감히 시도해 볼 수조차 없는, 그런 경지의 마법이 바로 서먼 메테오였다.
이윽고 우주를 유영하던 유성 하나가 소환되었다.
그 크기는 마차 열 대를 합쳐 놓은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헨리는 머리 위로 소환된 운석의 궤도를 비틀어 토성을 향해 쏘아 보냈다.
쿠오오오……!
대기가 거칠게 진동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낙하하기 시작한 유성은 전신에 엄청난 크기의 화염을 품으며 성난 들소처럼 지상을 향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
이에 성녀 아이리네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기껏해야 마법 포격이나 수비할 줄로 알았건만, 처음부터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이 쏟아지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집중하세요!”
성법의 근간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즉, 신에 대한 믿음이 강력할수록 성법 또한 강력해진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성녀의 성법이 강력한 것이었다.
성녀의 외침에 모든 사제들이 일제히 두 손을 모아 황급히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은 간단했다.
-위대한 여신, 아이린이시여 부디 저희들을 지켜 주시옵소서!
휘오오오……!
그러자 평화교의 여신 아이린은, 사제들의 믿음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제국군을 감싼 수호 성법을 더더욱 진하게 둘러 냈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의 서먼 메테오가 사제들의 수호 성법에 부딪힌 그 순간!
콰아아앙!
엄청난 양의 풍압이 사방으로 뻗어졌다.
* * *
흙먼지가 세상을 뒤덮었다.
마치 신이 세상을 다시 창조하기라도 하려는 듯, 흙먼지는 제국군과 연합군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손길을 뻗었다.
엄청난 굉음이었다.
그러나 헨리가 마탑의 제자들과 미리 쳐 둔 결계 덕분인지 고막이 터지거나 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마법 결계 위로 자욱한 흙먼지가 뒤덮였다.
이에 제방은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 아닌 어둠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군 전원이 숨을 죽였다.
그러나 곧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한 줄기 빛은 곧 거대한 광명이 되어 다시 연합군에게 햇볕을 가져다주었다.
다시 환한 대낮이 되었다.
헨리가 바람 마법을 이용해, 결계 겉면에 뒤덮인 흙먼지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대한 충돌 음에 몸을 잔뜩 움츠렸던 연합군들은 그제야 집어넣었던 목을 다시 빼며 성벽 너머의 광경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헤, 헤너른 평야가……!”
파괴된 곳은 없었다.
하지만 유성이 떨어지고 난 후에 생긴 변화를 하나 꼽자면, 제방을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져 있던 황금빛 들판이, 어느새 흙먼지로 가득 뒤덮여 메마른 사막처럼 변했다는 것이었다.
“아, 아아……!”
병사들 중에는 제방의 농민이었던 자도 있었다.
그들은 사막처럼 변한 헤너른 평야를 보며 침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걸 버틴다고?”
그러나 제방의 병사들과는 반대로 헨리는 몹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주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흙먼지가 뒤덮인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제국군의 병사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전신 가득히 쌓인 흙먼지와 입안 가득히 쌓인 모래를 내뱉는 제국군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리네라고 했나? 교황 녀석, 엄청난 여자를 성녀로 두었군.’
아이리네는 척 보기에도 어려 보이는 여자였다.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를 지나 아가씨 티가 겨우 날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네는 제국군 전체를 훌륭하게 지켜 냈다.
이에 헨리는 시선을 옮겨 토성 위에 있는 아이리네를 보았다.
“하아, 하아……!”
입가에 피가 흐르는 아이리네.
제아무리 살아 있는 축복이라도, 그래도 명색이 7서클의 서먼 메테오였다.
그런 고위급 마법을 상대로 조금의 타격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
헨리는 그녀의 입에서 피를 뿜게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했다.
‘됐어. 첫인사로는 충분해.’
서먼 메테오를 사용한 직후, 결계에 쌓인 흙먼지를 걷어 내느라 광범위한 바람 마법을 연달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제아무리 운하와 같은 마력을 지닌 헨리라 할지라도 현기증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일부러 무리를 해서라도 서먼 메테오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성녀에 대한 흥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헨리는 곧 이곳을 떠나 수도를 기습할 몸.
그렇기 때문에 성녀에 버금가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전략적인 과시를 위함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겠군.”
수호 성법과 서먼 메테오.
전쟁을 알리는 신호탄으로는 충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