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폭풍전야 (1)
녀석은 드라칸이 만든 초거대 키메라로, 거대 키메라임과 동시에 드라칸이 만든 몇 안 되는 역작들 중 하나였다.
드라칸이 명령하자 거슬렁거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포효를 시작한 거슬렁거는 시커먼 전신을 꾸물럭거리더니 이내 고슴도치처럼 전신에서 길쭉한 가시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시이잉……!
몸에서 돋아난 가시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전하기 시작한 가시의 속도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피이잉!
카뮤엘이 들었던 기분 나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거슬링거는 전신으로부터 가시를 쏘아 보냈다. 마치 쇠심줄로 쏘아진 석궁처럼 말이다.
쏘아진 가시들은 하늘로 치솟았다.
상대를 맞추기 위한 행위라면 다소 특이한 궤적이었지만 하늘로 치솟은 거슬렁거의 가시는 이내 소낙비처럼 무작위로 주위에 흩뿌려졌다.
“으아아악!”
“커허억!”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드라칸은 후방에서 대기시키고 있던 키메라들을 투입시켰다.
-키케케케케!
키메라들의 학살이 시작됐다.
어찌 보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다양한 외견을 지닌 키메라들은, 마치 굶주린 들짐승처럼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살점을 취했다.
드라칸은 창백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드라칸은 아서스의 석탑 앞에서 기도를 외우던 상급 사제, 나일리를 발견했다.
씨익.
드라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마치 귀신이 웃는 것만 같았다.
나일리는 어깻죽지에 거슬렁거의 가시를 맞았다.
그리고 축문을 외우던 석탑에 기대 신성한 보호막을 펼친 후,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회복술을 사용했다.
이에 드라칸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거슬렁거의 머리 위에 있던 드라칸이 순식간에 사제 앞으로 이동됐다.
“어, 어어억!”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드라칸을 보고 나일리는 기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팔 척 장신에 긴 머리카락, 그리고 새하얗다 못해 핏기가 없는 드라칸의 얼굴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이윽고 드라칸은 눈물을 흘리며 덜덜 떠는 나일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에 나일리는 기겁을 하며 신성한 보호막을 더더욱 거세게 출력했다.
그러나 드라칸에겐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제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보호막은 마물을 비롯한 오러나 마법에게나 통용되는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드라칸은 마물이 아닌 인간이었고, 동시에 마법사이긴 하였으나 마력을 출력시키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일리의 신성한 보호막을 가볍게 통과했다.
“사, 사람?”
태연하게 보호막을 통과하는 드라칸을 보며 사제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제가 놀라건 말건 드라칸은 뻗은 손의 궤도를 틀어 사제의 어깻죽지에 박힌 거슬렁거의 가시를 붙잡았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휘젓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울렸다.
그 탓에 집중된 정신이 깨지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회복술도, 자신을 지키고 있던 보호막도 동시에 깨져 버렸다.
“크크큭.”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나일리를 보며, 드라칸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조소를 띠웠다.
그리고 신성 보호막이 사라진 그제야 오른손에 마력을 출력시키기 시작했다.
마력은 보랏빛이었다.
그리고 보랏빛 마력을 본 사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보, 보라색 마력! 그, 그렇다면, 너, 너는!”
보랏빛 마력. 마족과 흑마술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그리고 모든 평화교의 사제들은 마물과 마족, 그리고 흑마술사의 퇴치를 위해 가장 먼저 그것들에 대한 교육을 받아 왔다.
“쉬잇.”
이에 드라칸이 검지를 들어 입술에 붙였다.
그런 다음 피를 쏟아 내는 상처 부위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끄아아아악!”
나일리는 온몸의 피가 상처 부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일리의 피가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나일리의 관절이 뒤틀렸다.
코에서는 코피가 났고 두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다.
“커어억……!”
긴 비명 끝에 사제의 목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노스코의 미를렌에게 그랬던 것처럼 드라칸은 또다시 한 송이의 꽃을 피워 냈다.
-시시시시…….
보랏빛 꽃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금방 시들었고 꽃잎의 색을 닮은 열매 하나를 피워 냈다.
“크크크.”
나일리의에게 맺힌 열매를, 드라칸은 능숙하게 수확했다.
그리고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나일리의 시체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큼지막하게 과육을 베어 물었다.
츄릅!
열매를 베어 물자, 드라칸의 새하얀 흰자위에 보랏빛 실핏줄이 들어섰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안구의 실핏줄에 이어 목덜미와 팔뚝, 그리고 마침내 발목까지 보랏빛 혈관이 부풀었다가 다시 사라졌다.
드라칸은 열매를 금방 먹어치웠다.
열매의 이름은 ‘그리벨’.
그 옛날의 고대 마족, ‘그리드 벨루시안’이 상대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 만든 ‘악마의 꽃’이었다.
그리고 그리벨은 지금 5서클의 인간학 마도사에서 금지된 인체 실험으로 아크 메이지의 경지에 오른 드라칸 로티크가.
헨리를 제외한 인간 최초로, 7서클의 경지를 이룩하기 위해 진화의 수단으로 이용히고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과육을 모두 베어 먹었을 때, 드라칸이 입가에 묻은 피를 훔쳐 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동한다…….”
쿵! 쿵!
드라칸의 명령을 받은 거슬링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제방.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대륙에서 이주해 온 1세대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
헨리가 처음 그들과 만났을 때, 헨리는 이토록 선한 민족을 본 적이 없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들은 헤너른 평야 한복판에 나라를 세웠으며, 왕국을 중심으로 드넓은 곡창지대를 만들어 매년 풍요로운 수확량을 자랑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도 헤너른 평야에서 난 쌀이나 밀을 대륙에선 최상품으로 쳐주었으며 황궁에선 그들의 문화를 존립시켜 주는 대신 매년 많은 양의 곡식들을 조공으로 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
산이나 강줄기 없이 정직하게 펼쳐진 헤너른 평야가 제방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었다.
‘지형적으로 너무 불리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것들 중에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단연코 전투가 펼쳐질 주위 환경이었다.
실제로, 늪의 성이라고 불리우는 콜린 성은 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늪지대 덕분에 ‘천혜의 난공불락’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제방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추수를 코앞에 두고 있는 풍요로운 곡식들뿐이었다.
기나긴 행군 끝에 제국군이 제방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제국은 7개의 군단을 필두로 제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니 소름이 다 돋는군.”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였으니 제방이 가진 성 자체는 작았다.
그러니 아무리 무슈의 장인들과 마법사를 투입해도 단기간에 성을 확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헨리가 제국군을 상대로 취할 수 있는 전술은, 순수한 기량만으로 펼치는 정직한 백병전뿐이었다.
‘이런 곳일수록 허리 돌리는 성벽이 진가를 발휘하는데…….’
헨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곳에도 허리 돌리는 성벽을 증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방에까지 허리 돌리는 성벽을 만들기엔 시간이 너무나도 촉박했다.
그러니 이번 전투는 허리 돌리는 성벽과 같이, 특별한 공성 병기의 도움이 없는 정직한 백병전만이 펼쳐질 참이었다.
헨리는 이윽고 각 연합국의 수장들이 모여 있는 제방 궁 내부에 있는 회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먼저 도착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헨리를 맞아 주었다.
이에 헨리는 가볍게 손짓해 보인 뒤, 미리 준비된 원탁의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착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한 임명식이 없었어도 헨리가 연합국의 총사령관직을 맡는 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이윽고 원탁에 앉은 헨리가 헤라리온에게 물었다.
“전하, 혹시 헥터에 대해 들은 소식이 있으십니까?”
“아뇨, 못 들었습니다만…… 혹시 헥터 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입니까?”
“얼마 전에 헥터에게 임무 하나를 하나 맡긴 적이 있는데 임무를 수행한 후의 행방이 묘연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너무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나 싶어 전하께 여쭌 것이니까요.”
“으음, 헨리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 추격대를 편성하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헥터의 추격은 후순위에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흠흠, 사설이 길었군요. 그럼 지금부터 수뇌부 회의를 시작토록 하겠습니다.”
헨리는 회의의 시작을 선언함과 동시에 마법으로 헤너른 평야와 그 중심에 자리한 제방의 성, 그리고 성을 둘러싼 10만 제국군을 그려 냈다.
이것은 오직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회의 방법이었다.
“이것이 현재 제방이 처한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포위가 됐군요.”
“이거……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건 어쩔 수가 없군요.”
“그래서 헨리,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좋은 작전이라도 있어?”
연합의 수장들은 각자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묻고 싶은 것들을 물었다.
이에 헨리가 대답했다.
“뭐, 어차피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제방은 지형적으로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지?”
타개할 만한 방법이라기에 헬라의 눈빛이 잠시간 반짝였다.
그러나 헨리는 조금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아 조금 죄송하지만……. 직접 맞서 싸우는 것, 현재로서는 백병전 이외엔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전술을 기대했건만 천편일률적인 대답이 나오자 헬라는 금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절망적인 지형적 요건을 가진 제방이, 10만 대군을 상대로 펼칠 수 있는 전략은 극히 제한적이란 것을 말이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물론 이것은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일입니다.”
“여기 계신? 그게 무슨 말이지?”
“8만과 10만, 그리고 고급 병력의 차이가 비등한 상황에서 멍청하게 백병전만 벌일 수는 없죠.”
“……?”
회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헨리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즉시, 저는 수도 하이랜더를 공격할 생각입니다.”
“뭐?”
“수도를 말입니까?”
헨리의 제안에 헬라와 헤라리온이 크게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헨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현재 대륙에서 기동성이 가장 좋은 세력은 단연코 마법사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텔레포트 덕분에 기동성이 좋다고 한들, 텔레포트는 분명히 위험하고 준비하는데 힘이 많이 들어가는 마법이란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지만 그러한 마법을 검 휘두르듯이 자유자재로 부릴 수만 있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그리고 현 대륙에서 텔레포트를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바로 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습니다, 여제님.”
어찌 보면 잘난 척처럼 보일 수도 있는 말.
하지만 헨리는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들 헨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저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뼈대가 될 백병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방에 모인 ‘연합국’만이 쓸 수 있는 전술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 전술을 밑거름 삼아 확실한 승기를 쥘 수 있는 필승법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