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22화 (222/522)

# 222

시작 (4)

불길은 점점 더 몸뚱어리를 키우더니 이내 거인의 팔뚝처럼 몹시 굵어졌다.

“제기랄! 하필 이럴 때!”

위치를 보건데 불이 난 곳은 분명히 보급품이 있는 막사였다.

이에 록펠러는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전투를 중단하고 남은 보급품이라도 확보할지, 아니면 보급품을 포기하고 끝까지 밀어붙여 성을 함락시킬지를 말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둘 다 장단점이 뚜렷했다.

“군단장님!”

연기가 거세질수록 록펠러의 부관들 또한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록펠러에게 얼른 결단을 내릴 것을 종용했다.

‘제기랄……!’

몇 초가 몇 년처럼 느껴졌다.

시야에는 연기가 치솟는 보급 막사와 쉴 틈 없이 전투를 벌이는 병사들이 차례대로 교차됐다.

그리고 결국, 록펠러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각한다……!”

“퇴각! 퇴각을 명령하셨다!”

“전군 퇴각!”

부우우우우!

퇴각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뿔피리 소리에 어떤 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어떤 이는 다행스럽다는 듯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록펠러의 표정에는 분함이 가득했다.

‘망할 놈들……!’

분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금방이라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무리하게 밀어붙이기엔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자신이 취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 됐든 전쟁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첫날에 여기까지 밀어붙였다. 그렇다면 후방 경계를 확실하게 한 다음, 다음 날 다시 총공격을 한다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그것이 록펠러가 후퇴를 명령한 이유였다.

이윽고 록펠러의 4군단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비발디 타운의 도시군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놈들이 퇴각한다!”

“우리가 제국군을 물리쳤다!”

“제국 놈들, 별거 아니잖아?”

록펠러 입장에선 비록 전략적인 후퇴였을지 몰라도, 도시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도시군으로 잘 훈련된 제국의 정예군을 막아 낸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내가, 내가 해냈어……!”

그리고 기쁨에 도취한 것은 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평생 체스나 둘 줄 알았지, 그 흔한 칼 한번 잡아 본 적이 없었던 이가 바로 벤트였기 때문이다.

그런 벤트가 첫 전투, 그것도 제국의 정예군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니 승리의 달콤함은 배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뭐하고 있냐?”

“헨리 님!”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서 승리를 만끽하고 있던 벤트 옆에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벤트가 치솟은 광대와 함께 헨리를 격하게 반겨 주었다.

“보셨습니까? 헨리 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럼 질 줄 알았어? 내 말만 들으면 무조건 이긴다고 했잖아.”

“물론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지전능한 대마법사님! 충성, 충성!”

“호들갑은 됐고, 좀 전에 놈들의 군량미 절반을 훔쳐 왔다. 거기다 불까지 지르고 왔으니 이제 길어 봐야 며칠이면 퇴각할 거야.”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그리고 해가 지는 대로 기술자와 마법사들을 투입해서 무너진 성벽을 복구할 테니까, 요 며칠만 확실하게 신경 좀 써 줘, 마법사들한텐 내가 제대로 교육하고 갈 테니까.”

“예? 하, 하지만 아무리 마법사님들이 계신다 해도 헨리 님께서 안 계시는 건 좀…….”

“전쟁이 여기서만 일어나고 있는 줄 알아? 위치상으로 여기가 가장 가깝고 가장 먼저 전쟁이 터질 것 같으니까 이리로 온 거야. 그렇다고 내가 여기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날 대신할 사람을 두고 갈 테니까.”

“대마법사님을 대신할 사람이요?”

“그래, 적어도 날 대신해서 저 건방진 록펠러의 검격을 막아 줄 사람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아! 역시 좀 전의 검격은 대마법사님께서 막아 주신 거군요?”

“그럼 나 말고 누가 그 무식한 칼질을 막아?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검격을 막아 주면 이곳에 고위급 마법사들이 모여 있다고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커. 그렇게 되면 좋든 싫든 제국군이 이리로 몰리겠지. 그렇게 되는 건 너도 싫지?”

1개의 군단도 버거운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국군 전체가 이리로 몰린다니?

그런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에 헨리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럼 소개하지. 현재 마탑에서 연금학파의 수장을 맡고 있는 6서클의 아크 메이지, 메이커 스워스야.”

손가락을 튕긴 순간, 동그란 빛의 서클이 회전하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서클이 지나간 자리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이내 마탑의 연금학파장, 메이커 스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하신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메이커, 한동안 잘 부탁할게. 전에도 말했지만 비발디 타운의 최대 목적은 공격이 아닌 ‘절대적인 수비’야.”

“물론입니다. 대마법사님의 기대에 부응키 위해 여기 있는 성벽을 최고의 요새로 개조시켜 내겠습니다.”

“그럼 믿고 맡기도록 하지.”

메이커에게 전권을 넘겨준 헨리는 이어서 텐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다음 좀 전에 확보한 4군단의 군량미를 텐의 저택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헨리 님, 이것들은 다 어디서 가져오신 겁니까?”

“훔쳤어.”

“예?”

“싸움이 벌어진 동안 나 혼자 4군단의 보급 막사를 털어 왔어. 약탈은 이걸로 끝이야. 이 군량미가 모두 소진되는 동안 아마 첫 번째 전투가 끝날 테니까.”

“예? 그게 무슨…….”

“깊게 알 필요는 없어, 쓸데없는 내용이니까.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바쁘다는 말과 함께 헨리는 훔친 군량미를 저택 앞마당에 잔뜩 풀어놓았다.

그리고 이어서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이에 사라진 헨리를 보며 텐은 나지막이 감탄했다.

“허허…… 훔친 밀이긴 하지만 어쨌든 구해 오긴 하셨네.”

어찌 됐든 약속은 지켰다.

비록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대의 보급품을 약탈해 군량미를 확보하는 것은 이번 전투에서 이번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불이 나서 군량미가 소실되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이상의 부자연스러운 공백은 제국군의 의심을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애매하게 남겨 놔야 미련이 남아 악으로 버틸 테니까.’

헨리는 생각했다.

세상에 하등 쓸모없는 정신들 중에 하나가 바로 군인 정신이라고.

물론 조국을 지키겠다는 그런 종류의 군인 정신은 헨리 또한 존경해 마지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군인 정신이란, 흔히들 고지식한 꼰대 지휘관들이나 부릴 법한, 말도 안 되는 애국심의 강요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알고 있었다.

록펠러 또한 늙은 꼰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지독하디지독한 끔찍한 꼰대라는 것을 말이다.

* * *

열 명의 장군들이 아서스로부터 각각 명령을 하달 받았다.

그리고 장군들에게 임무 배정이 끝나자마자 아서스는 곧 테리온을 불러들였다.

“테리온.”

“예, 폐하.”

“본격적인 대륙 정벌이 시작되었으니 그대는 지금 당장 두스카인으로 가서 내 말을 전하도록 하라.”

“예, 폐하!”

두스카인 담당 사신.

오랫동안 대기하고 있던 테리온이 비로소 일을 해야만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에 테리온은 아서스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은 뒤, 수도를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헨리에게서 받은 호출권을 부욱 찢었다.

“그래, 너냐?”

“헨리 님!”

호출권을 찢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헨리는 혹시라도 테리온과의 만남이 목격될 것을 방지하기 위해 테리온을 데리고 살게라로 이동했다.

살게라에 도착하자 테리온이 얼른 손을 비비며 말했다.

“헨리 님! 드디어 두스카인에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 아서스가 뭐라고 하든?”

“두스카인은 즉시 계승식을 중지하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마리스를 공격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리스를?”

“그렇습니다. 아서스가 말하길, 건방진 아마리스 년들에게 두스카인의 뜨거운 불방망이 맛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그거 정말 아서스가 한 말 맞아?”

“제가 조금 각색하긴 했습니다.”

“……그럼 그렇지. 아서스가 그딴 말을 할 리가 없지.”

“하지만 아마리스를 점령하고 약탈과 강간을 허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도를 넘었군. 아니, 아서스에게 제대로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해야 하나?”

동맹국 제의를 거절한 이상, 더 이상 아마리스는 여자들만의 왕국으로 그 명맥을 잇지 못할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헨리가 아마리스와 연합을 맺지 않고 두스카인이 정말로 아서스의 지원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애석하게도 아서스가 원하는 그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려지지 않을 것이었다.

이에 테리온이 물었다.

“헨리 님, 그런데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두스카인은 아직 연합을 맺지 못한 곳이 아닙니까?”

“그렇지. 설사 연합을 맺는다고 해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등을 돌릴 놈들이 초완족이니까.”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쩌긴? 말 안 듣는 놈들한텐 매가 약이지. 이미 그쪽에는 초완족에게 어울리는 자를 사신으로 파견해 두었다.”

“두스카인에 말입니까?”

피부가 검은 비적 떼들.

타고난 전투 민족이긴 하나 근간이 뚜렷하지 못하고 툭하면 배신을 일삼으니, 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선 조금의 상식도 통하지 않는 완벽한 철혈 정치가 가능한 자를 왕으로 군림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헨리는 그게 어울리는 자를 이미 파견해 두었다.

적당한 사신.

선뜻 어울리는 인물을 떠올리지 못한 테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슬 정리가 끝났을 테니 한번 가 보자. 어찌 됐든 너도 사정을 알아야 거짓 보고를 올릴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마법사님.”

헨리는 곧, 두스카인에 파견된 사신의 행보를 확인하기 위해 두스카인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 * *

콰아아앙!

한 번의 휘두름에 메카산이 쪼개질 정도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자, 잡아! 얼른!”

“적은 한 놈이다! 뭣들 하고 있어!”

“피해!”

콰아아앙!

다시 한 번 메카산이 흔들렸다.

두스카인에는 어느새 초완족을 포함한 수십여 개의 부족들이 한 명의 침입자를 저지하기 위해 다 같이 힘을 모아 창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너무 막강했다.

상대는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전사들을 무너뜨렸고 천지를 개벽시킬 지진을 일으켰다.

“우두머리는 어디 있느냐?”

상대는 바로 발락이었다.

거신병의 단죄를 사용함으로써 죽음의 경계에 다녀왔던 발락은, 마모된 갑옷이 아닌 기존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훌륭한 갑옷을 거치고서 검은 형벌을 휘두르고 있었다.

압도적인 학살이었다.

발락은 도전해 오는 두스카인인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부러 타격 범위를 넓혀 두스카인의 황궁을 박살 내고 있었다.

벌써 두 시간이 넘게 황궁을 부수고 있었다.

초완족의 전사들은 이미 절반이 넘게 죽음을 맞이했고, 초완족보다 못한 다른 부족의 전사들은 진즉에 꽁무니를 내뺐다.

그리고 결국, 두스카인의 왕이자 초완족의 수장인 ‘주사강’이 두스카인의 왕을 상징하는 위대한 창을 바닥에 내려놓고 발락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져, 졌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두스카인인들은 타고난 싸움꾼들이었지만 동시에 분수를 아는 놈들이기도 했다.

왜냐면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해야지만 다음번에 복수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발락이 주사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이 두스카인의 지도자인가?”

“그렇습니다.”

“건방진 놈.”

“예?”

“네놈은 왜 동맹국의 자격을 가졌으면서도 연합국에 가입하지 않았지?”

“예, 예? 여, 연합국이라니요?”

“내게 거짓말을 하는구나. 거짓말의 대가는 잘 알고 있겠지?”

“자, 자, 잠깐만요! 저는 진짜 동맹국 연합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문답무용!”

“히이이익!”

실제로 두스카인은 헨리로부터 연합국 가입에 대한 제의를 받지 못했다.

헨리가 두스카인에 연합국 제의를 하려던 찰나, 테리온과 마주쳐 테리온을 납치 교육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으니까.

이에 발락이 다시금 검은 형벌을 들어 올리려 하자.

“그만.”

익숙한 목소리가 발락의 손길을 잡아끌었다.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헨리였다.

이에 헨리를 발견한 발락이 고개를 살짝이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하다. 아직 연합에 대한 대답을 받아 내지 못했다.”

“아냐, 됐어. 이제부턴 내가 할 테니까 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헨리는 발락을 뒤로 한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주사강에게로 다가갔다.

헨리를 본 주사강은 직감했다.

저 괴물 같은 발락을 말 몇 마디로 제압한 이 남자는, 발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인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네가 주사강이지? 우리 잠깐 대화 좀 할까?”

악마의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