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시작 (3)
허리 돌리는 성벽.
무슈의 수많은 장인들 중 건축 장인이라고 알려진 ‘루슈’가 만든 작품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그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기발한 아이디어를 건축물로 재현해 놓곤 했는데 루슈는 이번에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더 세게 돌려!”
“여엉차! 여엉차!”
급히 군사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질적으로 차이날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군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루슈의 허리 돌리는 성벽은 특별한 기술 없이 오직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노를 밀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도시군에겐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인 안성맞춤인 공성 병기였다.
“크흐흐,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공성전이 시작되고 벤트는 기술자들의 보호를 위해 무슈의 장인들을 성의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작품이 활약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의 욕망이었다.
그래서 루슈는 병사들의 보호를 피해 어떻게든 성벽 위로 올라 자신의 역작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더 세게!”
“호우!”
누군가 선창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복창을 했다.
마치 이인삼각 경기를 하듯 거대한 팀워크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도시군들에 의해 성벽은 끊임없이 허리를 돌렸다.
흡족한 광경이었다.
이에 루슈는 생각했다.
‘그흐흐, 이게 다 대마법사님 덕분이지. 대마법사님 덕에 그 비싼 마법사들을 수족 부리듯이 부렸으니까.’
허리 돌리는 성벽은 단순히 루슈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설계였다.
하지만 그러한 설계를 현실화시킨 것이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재료의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 싶으면 마법사들이 일일이 경량화 마법을 시전해 주었고, 재료를 박아 넣을 수 없는 곳이 있으면 어떻게든 마법으로 그것을 가능케 해 주었다.
그야말로 마법사와 건축가의 화려한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이런 미친……!”
성벽이 돌아가며 사다리가 연이어 쓰러지자 록펠러의 이마에 힘줄들이 터져 나갔다.
‘세상에 성벽이 움직이다니?’
저런 성벽이 있다는 건 듣도 보도 못 했기 때문이다.
“비켜라!”
백병전이 먹히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현재 4군단에는 성벽을 깨부술 만한 마법 포격대도, 공성 병기를 제작할 기술자들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놈들 같으니!’
자존심이 상한 록펠러는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검 끝으로 안개를 닮은 푸른색 오러가 진하게 밀집되기 시작했다.
“흡!”
부우웅!
전방으로 휘둘린 록펠러의 검.
그러자 그의 칼날로부터 푸른 반달을 닮은 응집된 오러가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앙!
날아간 검격이 성벽에 부딪쳤다.
굉음이 울리는 걸 보아하니 제대로 적중한 듯싶었다. 그 증거로 매캐한 흙먼지가 피어올랐으니까.
이에 록펠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그렇지. 돈 깨나 부어 고급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술수를 좀 부렸나 본데, 결국 압도적인 힘 앞에선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마.’
맞는 말이긴 했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압도적인 힘 앞에선 결국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으니까.
그런데 흙먼지가 흩어진 직후.
“……음?”
바람이 불면서 자욱했던 흙먼지가 걷혔다.
록펠러는 걷힌 흙먼지 사이로 부서진 성벽의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흙먼지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평온하기 짝이 없는, 멀쩡한 모습의 성벽이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없었다.
분노가 뒤섞인 진심 어린 검격이었는데 그러한 검격을 일개 성벽 따위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보통의 기사도 아니고 무려 ‘최상급 소드 마스터’에 달하는 장군이었으니까.
‘설마?’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서 록펠러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방으로 검격을 쏘아 냈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
감각은 확실했다.
분명히 무언가를 강하게 후려친 느낌이 났다.
그런데 흙먼지가 걷혔을 때, 이번에도 성벽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화가 났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아무런 피해가 없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 사검씩이나 되는 자신이 날린 검격인데?
화도 났지만 그보다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에 록펠러는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이 검격을 쏘아 보낸 성벽을 자세하게 응시했다.
“저건…….”
눈을 가늘게 뜨고 오러를 양 눈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록펠러는 그제야 성벽 앞에 겹쳐진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결계?”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생각과 흥분한 이성이 어우러져 무심코 내뱉고 말았다.
결계.
그것은 결계가 확실했다.
그것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 결계 말이다.
‘어째서 마법 결계가 이곳에?’
마법 결계는 마법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성벽 전체를 감싸 안을 정도라면 수식도 꽤나 복잡하고, 결계를 유지하는데 드는 마력 또한 어마어마하게 요구되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 결계가 갑작스럽게 등장하다니?
‘설마, 이곳에 마법사들이 있다고?’
내놓을 수 있는 추측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 척살령이 떨어진 전범자들. 즉, 마법사들이 숨어 있다고 말이다.
“하?”
록펠러는 어이가 없었다.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하나 했더니, 고작 마법사 따위를 믿은 것일 줄이야.
덕분에 록펠러는 허망함을 지우고 더더욱 분노를 불태웠다.
“그렇다면 더더욱 질 수 없지.”
그렇잖아도 하찮게 여기던 비발디 타운이다.
그런 비발디 타운에 마법사들까지 나타났으니 더더욱 의욕이 불타올랐다.
“어디 언제까지 막을 수 있나 한번 보자고.”
록펠러는 화를 다독였다.
그래, 한두 번까진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들이 있는 마력 없는 마력 전부를 끌어모아 자신의 검격을 막았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검격이었다.
못해도 최소가 마도사급의 고급 마법사들이 여럿이 모여야만 막을 수 있는 힘이 바로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검격이다.
그래서 록펠러는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저들이 언제까지 자신의 힘을 견뎌 낼 수 있을지에 대해 말이다.
이는 분노에 빠져 무턱대고 힘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자신의 계속된 검격으로 결계를 무너뜨린다면 여세를 몰아 성벽을 무너뜨린 후 병사들을 투입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검격에도 마법 결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록펠러는 제법 흥미로운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이곳 비발디 타운에 도망친 마탑의 마법사들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그런 정보를 말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록펠러는 굳이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한번쯤은 자존심을 접어주고 성벽 앞에 진을 친 뒤, 황궁에 이 사실을 알리면 되는 것이었다.
도망친 마법사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황제는 분명히 크게 기뻐해 줄 테니까.
이에 록펠러는 다시 검을 치켜든 후 오러를 밀집시켰다. 그리고…….
부웅!
콰아앙!
자욱한 흙먼지.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검격을 날렸다.
그리고 흙먼지가 걷힌 직후.
“음?”
록펠러는 걷힌 흙먼지 사이로 부서진 성벽을 보았다.
의외였다.
이번에도 마법 결계가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낼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내 착각인가?’
고위급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을 줄로만 알았건만 두 번의 방어는 그들이 쥐어짜 낸 전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무했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비발디 타운 공략에 돌파구가 생겼다는 것이 록펠러에게 중요했다.
이에 록펠러가 명령했다.
“길이 열렸다! 모두 돌격하라!”
“와아아아!”
주춤했던 4군단의 사기가 다시금 활활 타올랐다.
“몰아쳐라! 이때를 놓치면 절대 안 된다!”
성벽의 한쪽이 무너져 내린 직후, 전투는 더더욱 혼돈의 도가니가 되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리며 성벽의 허리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공성 사다리가 다시금 얹어졌고 무너져 내린 성벽으로 4군단의 병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록펠러도 승리를 확신했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우우우우!
뿔피리 소리.
군단 막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에 록펠러가 놀란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돌려 막사 쪽을 바라보았다.
‘비상 뿔피리 소리?’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뿔피리 소리였다.
그래서 록펠러가 놀란 것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막사 쪽을 확인한 순간, 록펠러는 막사 뒤편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회색 연기를 보았다.
‘불!’
성의 함락을 코앞에 둔 이때, 4군단 막사에 불길이 치솟았다.
* * *
‘시작됐네.’
4군단과 도시군의 공성전.
공선전이 시작된 직후, 헨리는 허공에 높이 떠올라 벌어지는 모든 전투를 관망했다.
그리고 허리 돌리는 성벽이 허리를 돌리자마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루슈야.”
굉장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루슈가 허리 돌리는 성벽을 만들 수 있게끔 마법사들을 지원해 준 것이 바로 헨리였다.
헨리는 쓰러지는 4군단의 공성 사다리를 본 후, 생각해 두었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예의 주시하던 록펠러가 갑작스레 검격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건 좀 위험하겠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검격이었다.
혹시 몰라 1등과 2등 마법사들을 후방에 배치해 두긴 했지만 아직은 꺼내 들 패가 아니라고 생각해 마법 결계의 발동도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록펠러의 검격이 쏘아진다면 그 결과는 뻔할 터였다.
‘귀찮군.’
그래서 헨리는 두 번 정도 록펠러의 검격을 막아 주었다.
두 번 정도 검격을 막아 주면 후방에 있는 마법사들이 눈치채고 알아서 조치를 취할 테니까.
이에 헨리는 자신의 마력으로 두 번의 검격을 막아 낸 후 마법사들의 움직임을 확인한 뒤에야 전장을 벗어났다.
헨리가 전장을 벗어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4군단의 최후방.
그곳에는 4군단에서 가지고 온 보급 물자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10분이 마지노선이다.’
작전을 실행하는데 잡은 시간은 최대가 10분이었다.
이이상 행동이 길어지면 제아무리 잔재주가 많은 도시군이라 할지라도 폭주하는 록펠러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헨리는 보급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쓸모 많은 권속, 클레버를 소환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시킨 것, 기억하지?”
“물론입니다.”
소환된 클레버는 미리 교육받은 대로 몸체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독한 매연을 떠올리게 하는 흑색 안개였다.
몸집을 불린 클레버는 곧, 막사 안에 널린 물자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체스트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클레버라 할지라도 수만에 달하는 물자이니 만큼 10분 안에 모두 집어삼키기엔 버거운 양이었다.
그래서 적들이 가지고 온 물자의 절반 정도만 집어삼키게 한 다음, 클레버를 역소환시켰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가지고 온 물자를 모두 빼돌려선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록펠러의 4군단이 이곳에 최대한 오래 붙잡혀 있는 것이었으니까.
헨리는 4군단이 가지고 온 물자의 절반을 챙긴 뒤, 이윽고 기름통 몇 개를 꺼내 주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씨를 댕겼다.
화르륵!
기름을 머금은 불꽃은 굶주린 짐승처럼 막사 안의 보급품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어서 헨리는 바람을 일으켰다.
불꽃이 잘 번지고 막사의 연기가 멀리서도 잘 보이게끔 말이다.
‘이 정도면 됐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정확히 7분이 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일을 마쳤으니 이제 남은 것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부, 불이야!”
때마침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보급병이 불길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퇴각하기 좋은 신호였다.
‘슬슬 성벽 쪽으로 가 볼까?’
헨리는 두둑해진 군량미에 미소를 지으며 성벽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