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집결 (9)
“역시……!”
떠오르는 푸른 일출을 본 헨리는 만족스러움에 미소를 지었다.
떠오른 태양은 특유의 강렬한 햇빛을 통해 가득히 쌓여 있던 눈들을 봄날처럼 녹여 냈다.
그러자 무너진 설산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바할드가 곧,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플라이.”
이에 헨리는 마법을 사용해 바할드를 매직 실드 안으로 끌어당겼다.
바할드는 조금 지쳐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조금 솟아 있었다.
바할드의 미소를 본 맥도웰이 바할드의 어깨를 털어 내며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겼냐?”
“물론.”
“그 자식은?”
“아직 눈 밑에.”
짧은 물음에 어울리는 간결한 대답이었다.
이에 맥도웰이 고개를 돌려 헨리에게 물었다.
“들었지? 어떻게 할 거야?”
패자를 처리하는 것 또한 승자의 몫이다.
이에 헨리가 바할드에게 물었다.
“바할드 님. 혹시 발락이 죽었습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럼 일단 구조해 보도록 하죠. 바할드 님의 말씀대로 정말로 발락이 패하였다면 대화를 나눌 여유 정도는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구조할 필요가 있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발락은 귀한 인재라고. 가능하다면 최대한 생포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좋습니다.”
“끙, 번거로운 일을 만드는군.”
“번거롭지만 효율적이기도 하니까요.”
설득은 쉬웠다.
모두의 동의를 얻은 헨리는 처음에 말했던 대로 발락의 포섭을 위해 구출 작업을 시작했다.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할드의 푸른 태양을 닮은 화염구 몇 개가 허공에 생성되었다.
딱!
그리고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자 화염구들이 회전하며 가득 쌓인 눈덩이들을 순식간에 녹여 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헨리는 무너진 설산의 가장 아랫바닥에서 선 채로 눈더미에 파묻혀 있던, 기절한 발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거신병은 결국 푸른 태양을 이기지 못했다.
그 증거로 발락의 핏빛 갑옷은 대부분이 녹아내려 있었고 일부는 발락의 살갗과 함께 엉겨 붙어 있었다.
패배자의 끔찍한 말로였다.
“클레버.”
“예, 마스터.”
“한번만 더 수고해 줘.”
“아닙니다, 마스터.”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치는 동안, 발락의 봉인 해제와 함께 사방으로 살점이 튀었던 클레버는 빠른 속도로 회복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결이 끝날 때쯤, 간신히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해 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설탑으로 가죠.”
헨리는 드디어 가장 우려했던,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변수라고 생각했던 일을 절반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 * *
거신병의 단죄.
자신의 신념을 위해 평생을 강철 같은 대쪽 정의로 살아온 그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 낸 역작.
하지만 모든 최상급 소드 마스터들이 그렇듯, 궁극기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요구했다.
물론 사용자에 따라 소모되는 체력이 다르긴 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오러를 쥐어짜내듯이 사용하는 거신병의 경우, 크기를 거대하게 키워 내는 것은 물론이고, 키워 낸 덩치만큼 경도까지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다른 기사들의 궁극기에 비해 체력 소모가 몇십 배는 더 이루어졌다.
그래서 발락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자신의 궁극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극기를 익힌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발락은 드디어 자신의 힘을 사용할 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당연히 거신병의 단죄가 바할드의 태양을 가르고 당당히 승리를 가져다 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단죄와 일몰이 맞붙었을 때, 발락은 전신을 휘감는 강렬한 뜨거움에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설마, 이 내가 진다고?’
거신병을 통해 느껴지는 뜨거움.
그 속에는 발락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을 기다려 온 바할드의 승리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뜨거움과…… 처음으로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그런 폭발이 말이다.
그리고 발락은 정신을 잃었다.
‘으음…….’
전신이 뜨거웠다.
마치 뜨거운 물속에 담겨져 있는 듯한 그런 작열통이었다.
그러나 뜨거움과 동시에 묘한 따뜻함도 느껴졌다.
마치 어머니의 양수와도 같은, 그런 편안한 따뜻함이 말이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따뜻하다니?’
덕분에 발락은 정신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이한 감각에 의해 다시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신이 되돌아오면서 눈꺼풀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천천히 눈을 떴다.
눈꼽 때문에 눈을 뜨기가 버거웠지만 그래도 아주 못 뜰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간신히 눈을 뜬 순간, 발락은 수십 명의 마법사들을 볼 수 있었다.
‘마법…… 사?’
자신의 주군이 잡아오라 명했던 마법사.
대륙 전체에 척살령이 떨어졌던 마법사.
그리고 전 제국의 황제를 죽이고 황궁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제국을 파멸로 몰고 간 이들, 마법사.
그런 마법사들의 얼굴 수십 개가 발락의 시야에 나타나자 발락은 동공이 확장되고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힘이, 안 들어 가……?’
무기력했다.
아니, 무기력하기 보단 춘곤증에 가까운 노곤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진정해. 지금은 무슨 짓을 해도 힘이 안 들어갈 거야.”
“뭐……?”
눈꺼풀만큼이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발락은 간신히 오물거리며 한마디의 물음을 내뱉었다.
이에 헨리가 대꾸했다.
“너, 킬라이브의 관리자이자 징벌왕이라고 불렸던 발락 더 오니르 맞지?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
“네놈……!”
“네놈? 하, 나, 이 자식이…….”
눈알을 벌겋게 하고서 자신을 노려보는 발락에게 헨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내 곧 정색을 하고선.
철썩!
발락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
“대, 대마법사님……?”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놀란 눈초리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그도 그런 것이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마법사들은 최소가 부학파장들.
그러니 발락이 어떤 사람인지 정돈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뺨을 후려갈기다니?
물론 헨리도 대마법사이니 대단하긴 했지만 발락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이에 뻣뻣하게 굳은 마법사들을 향해 헨리가 말했다.
“놀랄 것 없어. 어차피 한 번쯤은 이 녀석 뺨을 후려쳐 보고 싶었으니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발락 뺨을 때려 보겠어? 더글라스, 너도 한번 때려 볼래?”
“아, 아닙니다……!”
“스탠, 너는?”
“대마법사님이 제안하신다면 저도 한 대 정돈…….”
“씁!”
“아닙니다.”
스탠이 소매를 걷어붙이려 하자 잠자코 있던 로어가 점잖게 주의를 주었다.
이에 스탠이 다시금 소매를 내리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미없긴, 어찌 됐든 다들 놀랄 필요 없어. 너희들도 아시다시피 이 녀석은 지금…….”
우우웅.
말을 잇던 헨리가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발락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
발락의 눈앞에 나타난 것.
그것은 목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여느 기사의 몸통과 팔다리였다.
그리고 발락은 그 몸통과 팔다리가 자신의 것임을 금방 깨달았다.
“내…… 몸?”
“정답.”
“어…… 어?”
발락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듀라한을 제외하고 자신의 팔다리와 몸뚱이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그러니 발락이 당황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많이 녹아내려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기 몸이라고 용케 알아보네. 그래 맞아. 지금 네가 보고 있는 것들, 이거 전부 다 네 몸이야.”
“대…… 체…… 왜?”
“왜긴, 죽어 가던 몸이니까 긴급 조치를 취한 거지.”
헨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푸른 태양에게 패배한 거신병은 끝끝내 자신을 소환한 주인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으면서 오러가 흩어진 발락은 푸른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의해 갑옷이 녹아내렸고 녹아내린 갑옷은 살과 엉겨 붙어 끔찍한 상처들을 만들어 냈다.
물론 전신 화상 이외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온몸에 가득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할드와의 대결이었으니까.
‘그래도 확실히 대단한 놈이긴 해. 보통 사람이었으면, 아니 상급 소드 마스터였어도 죽었을 상황에서 꾸역꾸역 살아남았으니.’
생존력만큼은 칭찬해 줘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헨리가 설명했다.
“치료에 시간이 좀 걸릴 거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오랫동안 생물학에 대해 공부해 왔고, 특히 인간학은 눈이 부실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 왔으니까.”
최소가 부학파장인 사람들이었으니 기본적인 인간학 지식은 모두들 꿰차고 있었다.
게다가 흑마술과 인간학은 한끗 차이였기 때문에 이 정도 신체의 분리 정도는 치료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용인되었다.
“제일 급한 머리는 대부분 치료했어. 그러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말하고 듣는 덴 아무 지장이 없을 거야. 물론 원한다면 뭘 먹을 수도 있긴 한데…….”
헨리는 발락의 목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은 뭘 먹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네놈……!”
“발음이 부쩍 좋아졌네. 역시 분노는 모든 일의 훌륭한 원동력이야. 그럼 이제 다들 팔다리 한짝씩들 챙겨서 나가 봐. 난 이 녀석과 얘기를 좀 해야겠으니까.”
“예, 대마법사님.”
헨리의 명령에 치료를 진행 중이던 마법사들이 발락의 신체를 가지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을 때, 헨리는 발락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의자를 끌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내 몸……!”
그 사이에 발락은 있는 힘껏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목 아랫부분을 살폈다.
휑했다.
분명히 좀 전까지만 해도 전신에 힘줄이 솟는 것만 같았는데 목 아래로부터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있다가 없으니까 있다고 착각을 한 거야. 사람의 뇌는 꽤나 능숙한 거짓말을 구사하거든.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부터 네 대답 여하에 따라 넌 더 강인한 몸을 얻게 될 수도, 평생 그렇게 살아야 될 수도 있으니까.”
“뭐라고……?”
“이제 슬슬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나? 너, 사실 바할드와 궁극기를 섞을 때부터 알고 있었잖아? 승부가 어떻게 날지 말이야.”
“…….”
차갑게 쏘아지는 사실 앞에 발락은 침묵했다. 이에 헨리가 화제를 전환시켰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넌 바할드에게 패했고 동시에 네 주군이 시킨 임무도 완수하지 못했어. 그리고 평생을 대쪽 같은 신념으로 살아왔으면서 범죄자인 나에게 치료를 받았으니 그 신념도 깨질 예정이지. 그런 의미에서 기분이 어때?”
“너, 너……!”
쉴 새 없이 퍼붓는 공격에 발락은 이젠 더 이상 욕지거리를 뱉을 힘도 없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할까 해.”
제안.
헨리의 영업, 아니 악마가 또다시 미소 짓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며칠을 내달렸는지 모른다.
아무리 먹어도 되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몸이라지만 며칠에 걸친 초고속 비행은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헥터는 해냈다.
오직 헨리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과 그동안 참아 왔던 식욕을 분출하겠다는 일념 하에 말이다.
그렇게 헥터가 도착한 곳은 살게라.
마음 같아선 샤하트라로 가고 싶었지만 샤하트라에 가도 헤라리온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었기 때문에 좀 멀더라도 살게라를 택한 것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눈발이 내리기 시작하고 대지가 메말라 갔으며 언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 위에 눈이 쌓일수록 헥터는 더욱 더 신나는 마음에 달음박질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슬란 협곡을 지나 살게라에 발을 들이려던 순간!
파지지직!
“으아아악!”
신나는 마음에 얼굴부터 살게라에 들이밀었다.
그런데 살게라의 경계선에 얼굴을 들이민 순간, 헥터는 얼굴을 강타하는 강렬한 고통에 바닥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헥터.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살게라의 경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치지지직!
튀는 스파크. 전신을 휘감는 고통. 그리고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결계였다.
그것도 살게라를 지키기 위해 부학파장들이 펼쳐 놓은 고위급 결계가 말이다.
“안 돼에에에에!”
살게라에 여느 불쌍한 영혼이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