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집결 (8)
푸른 태양.
직관적이고 간단한 이름이었지만 그 간단함 속에 녹아 있는 본질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바할드는 대륙에서 몇 안 되는 ‘형태’가 아닌 ‘속성’ 자체를 변환시킬 수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속성의 변환 끝에 바할드가 손에 넣은 힘은 바로 ‘뜨거움’.
그리고 그 뜨거운 힘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결정체가 바로 눈앞에 떠오른 ‘푸른 태양’이었다.
바할드의 푸른 태양이 공동에 작렬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할드의 검 끝을 떠나 천천히 허공 위로 떠올랐다.
마치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듯, 바할드와 그의 지인들은 그러한 행위를 ‘일출’이라고 불렀다.
‘일출!’
태양이 공동의 천장과 가까워질수록 그 열기는 더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이에 헨리는 서둘러 반과 맥도웰, 그리고 기절한 로난을 등 뒤로 불러 세운 뒤, 푸른 태양의 열기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방어막을 산개했다.
‘매직 실드!’
매직 실드.
매직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마법사들이 가장 처음에 배우는 기초적인 마법들 중 하나.
하지만 매직 실드는 시전자가 가진 마력과 연계 방식에 따라 수만 가지 방법으로 전개할 수 있는 방어 마법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두껍게 전개한 매직 실드에 차디 찬 냉기를 덧씌웠다.
사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공동을 떠나 몸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발락과 바할드가 맞붙는, 어쩌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역사적인 순간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도망쳐야 한다고 보챘던 맥도웰과 반도 같은 마음이었다.
헨리의 에메랄드 빛 매직 실드가 두텁게 생성되었다.
그리고 바할드의 푸른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른 그 순간.
치지직……!
헨리의 매직 실드가 진동했다.
바할드가 쏘아 올린 작은 태양으로부터 엄청난 열기의 태양열이 헨리의 매직 실드를 사정없이 긁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열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은 헨리의 매직 실드뿐만이 아니었다.
푸른 태양이 발산하는 강렬한 햇빛은 발락의 거신병 또한 사정없이 녹여 내기 시작했다.
오러와 오러가 맞부딪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러로 이루어진 거신병의 신체로부터 짙은 회색빛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그래! 바로 이거지! 지난 수십 년간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고!”
오러는 기사의 영향을 받는 것.
그렇기 때문에 기사 또한 오러의 변화를 쉽게 알아채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발락의 거신병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을 때, 발락은 그제야 광기어린 표정으로 미친 듯이 웃어 제끼기 시작했다.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발락은 광기어린 웃음과 함께 검은 형벌을 쥔 오른손을 머리 위로 있는 힘껏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구!
손이 들려지면서 공동의 천장이 긁히며 부서졌다.
하지만 공동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흔한 파편 또한 흩뿌려지지 않았다.
헨리가 여전히 공동이 무너지지 않게 자신의 마력으로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끝이다, 바할드!”
쿠구구구구!
천장을 긁던 푸른 모닝 스타가 발리스타의 시위처럼 완전히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곧 화살을 쏘아 내듯 팽팽한 힘줄을 당겨 앞으로 크게 휘둘렀다.
후웅!
거대한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신병의 공격은 단검처럼 재빨랐다.
‘단죄!’
검은 형벌이 내리는 참혹한 판결.
그것은 단죄라고 일컬어지는 발락이 가진 최고 형량이었다.
그리고 거신병의 모닝 스타가 휘둘린 그 순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높이 칼을 뻗고 있던 바할드 또한 그에 맞춰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웅!
치켜들고 있던 오른팔을, 바할드 또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하늘 높이 떠 있던 푸른 태양이 바할드의 손짓에 맞춰 유성처럼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몰!’
그리고 사람들은 푸른 태양의 그러한 움직임을 보고 ‘일몰’이라고 불렀다.
일몰.
정직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푸른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 푸른 태양이 만들어 낼 어둠은 결코 조용한 어둠이 아니었다.
단죄와 일몰.
역사적으로 기록될 두 기사의 상징적인 충돌이 음유시인의 입이 아닌 헨리가 만든 공동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단죄와 일몰이 맞부딪힌 그 순간!
……!
공동 속은 감히 눈을 뜰 수 없는, 신성하고 새하얀 광명으로 온 사위를 뒤덮었다.
* * *
쿠구구구구……!
“음?”
설탑 내부.
탑을 옮긴 마법사들은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수련에 몰두했다.
설탑은 훌륭한 상아탑이었다.
기존의 마탑보다 훨씬 크고 튼튼했으며 평소 필요하다 싶은 설비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법으로도 어찌 커버되지 않던 자잘한 소음 문제가 해결되어 참 좋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존의 마탑 연구실은 자신의 마력으로 소음을 제어해 효율이 떨어지는 반면, 설탑은 오직 헨리의 마력으로만 설탑 전체의 소음을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마법사들은 전쟁이 발발되기 직전인 현재까지도 마음 편히 개인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원히 평화로우리라 믿었던 지금.
쿠구구구구구……!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플라스크가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 설탑 전체를 뒤흔들었다.
“뭐야?”
갑작스러운, 그리고 유래 없는 진동에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던 마법사들이 모두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지진인가 싶어 누군가는 땅 밑을 스캔해 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진은 아니었다.
“그럼?”
마법사들은 진동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진동의 근원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어, 어?”
“대산?”
“대산이 무너진다고?”
“저 산이?”
설탑 내부는 탑 특유의 폐쇄적인 느낌이 없다.
그 증거로 설탑 내부에서도 바깥이 훤히 보이게끔 안쪽 벽면 대부분이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탑 내부의 유리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설산들 중 가장 큰 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이 있었으니 마법사들은 그것을 ‘대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그 거대한 대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처음엔 흔한 눈사태인 줄로만 알았다.
이곳엔 툭하면 눈보라가 쏟아져 고밀도의 눈이 쌓이니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눈덩이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이곳의 눈사태는 대륙의 소나기만큼이나 흔한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눈사태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한낱 눈사태 따위가 아닌 대산 전체의 붕괴였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이에 연구실에 있던 불 원소학파의 부학파장, 이그니 람토도 놀란 얼굴을 하고서 연구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렇게 튀어나온 고위 마법사들이 십수 명.
개중에는 로어 길리언을 포함해 전 부탑장 스탠 하디라디도 있었다.
부학파장들이 놀란 눈초리로 로어에게 상황을 물었다.
“부탑장님, 대산이 무너지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안 괜찮지. 설탑에 피해가 오지 않게끔 얼른 결계를 가동시켜!”
“예!”
넘치는 것이 마법사였으니 결계의 가동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설탑 내부에 자체적으로 마력을 수급하는 무한 동력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으니 결계는 기존 마탑의 것보다 훨씬 두껍고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결계가 발동되었다.
지이잉!
설탑을 중심으로 반경 500m까지 무형의 방어막이 둘러졌다.
그리고 얼마 뒤, 대산이 무너지면서 그 위에 쌓여 있던 엄청난 양의 눈덩이들이 거대한 낙석이 되어 설탑을 향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쿠궁! 쿠구궁!
강력한 낙석, 아니 낙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설탑의 결계를 뚫을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결계가 발동되자 설탑을 뒤흔들던 진동이 멈췄다.
책상 위의 플라스크는 물론이고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로웠던 책장의 책들도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결계 밖으로 눈이 한가득 쌓였다.
가득히 쌓인 눈들을 보며 로어는 생각했다.
‘대마법사님, 대체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모종의 이유로 헨리가 여느 설산으로 들어간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정확히 몰랐다.
그리고 헨리는 지금, 무너진 대산의 앞, 그리고 그 앞의 설산 속 깊은 곳에 파묻혀 있었다.
‘이런 미친.’
헨리는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단죄와 일몰이 맞부딪힌 순간, 상상 이상의 파괴력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파괴력이었다.
하마터면 펼쳐 두었던 매직 실드가 박살나고, 자신들까지 피해를 입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헨리였다.
헨리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마력을 보급하여 파괴의 여파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매직 실드를 깨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파괴의 잔재가 끝난 지금, 헨리는 매직 실드 전체를 부유시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눈앞이 캄캄했다.
파괴의 여파가 공동 전체를 파괴하여 설산 자체를 내려앉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헨리는 부유시킨 매직 실드를 두더지처럼 활용해 끊임없이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지하가 아닌 드디어 지상 위의 허공으로 떠올랐을 때 헨리는 그제야 파괴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체감할 수 있었다.
“……하?”
내부를 파 내 만든 설산은 예상대로 진즉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무너진 것은 헨리가 손댄 설산만이 아니었다.
설산 뒤의 설산, 그리고 설탑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대산까지 파괴의 여파는 대산의 옆구리를 대부분 깎아 내 그 대산마저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
‘설탑은 멀쩡하겠지?’
이정도 여파라면 설탑에도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걱정해야 하는 것은 파괴의 여파 때문에 미처 구하지 못한 바할드였다.
“……미쳤군.”
몇 개의 산을 집어삼킨 파괴의 여파를 보며 맥도웰이 짤막한 소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것은 반 또한 마찬가지였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 이런 괴물 같은 놈들과 같은 급수를 운운하다니.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호칭이로군.”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이상의 결과가 만들어졌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반성하게 되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발락과 바할드였다.
이윽고 반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언제까지 쓰러져 있을 거야? 얼른 안 일어나?”
“으으…….”
반의 호통에, 기절해 있던 로난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깨어났다.
로난의 복부로 극심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검은 형벌에 맞은 것에 대한 후유증이었다.
“으으, 여긴……?”
눈앞이 밝아지며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로난은 그제야 자신이 굉장히 높은 공중에 떠있음을 깨달았다.
“어, 어, 어? 여, 여긴? 여기가 어디죠?”
“조용히 해. 아직 결과가 안 나왔으니까.”
“결과요?”
“그래. 발락과 바할드가 맞붙었어. 그리고 우린 지금 그 대결의 여파에서 이제 막 탈출한 참이다.”
반의 친절한 설명.
맥도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음?”
새하얗게 뒤덮인 눈밭 위로, 헨리는 조그마한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엔 잘못 본 것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구멍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마치 개미지옥이 구멍의 넓이를 넓힐 때처럼 말이다.
파사삭!
큼지막하게 뚫린 구멍.
그 안은 새카만 암흑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몰렸다.
그리고 다들 어렴풋이 짐작했다.
저 구멍은 설산이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구멍이 아닐 것이라고.
저 구멍은 대결에서 승리한 자가 패자의 육신을 짓밟고 올라선 승리의 발판일 것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암흑으로 뒤덮였던 구멍으로부터 푸른 빛깔의 기운이 어슴푸레하게 비춰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익숙한 소리.
그리고 푸른 광명이 가까워질수록 구멍의 크기 또한 점점 더 넓어졌다.
“저건…….”
기나 긴 기다림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륙에 단 하나뿐인, 기사왕의 태양.
바할드의 푸른 태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