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집결 (7)
“헨리.”
“예, 바할드 님.”
“괜찮다면 개인적인 욕심을 좀 부려도 괜찮겠나?”
“어떤 욕심 말씀이시죠?”
“마법 무장을 좀 해제해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땐…….”
“알고 있어. 그땐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바할드 님.”
바할드의 개인적인 욕심.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발락을 상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헨리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정해 둔 뒤 바할드에게 시전된 마법 무장을 해제했다.
바할드는 몸이 조금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마법이 편리하긴 하군.’
근력과 속도의 증가, 그리고 예리함과 민첩함까지.
수련을 하지 않아도 B급 용병을 보통의 기사 정도로 만들어 주는 마법은 그야말로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바할드는 그런 작위적인 힘에 기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단련은 불안한 미래를 예방하고 오만했던 과거를 겸손하게 해 준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윽고 헨리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발락이 바할드에게 물었다.
“대충 이십 년 만인가?”
“그런 셈이지.”
“그런데 참 의외로군. 듣기로는 제국 일검의 자리를 포기했다던데?”
“그렇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네놈이 뭐가 아쉬워서 킹턴 같은 놈에게 그 자리를 내줘?”
“자리는 자리일 뿐, 내게 큰 의미는 없다.”
“그 말은 맞지.”
두 사람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그래서 각자가 원하는 힘의 방향과 가치관을 위해 발락은 킬라이브에, 바할드는 제국 일검의 자리를 받아 든 것이었다.
이윽고 발락이 물었다.
“……그나저나 바할드, 네놈이 왜 제국의 반역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
“누가 반역자라는 거지?”
“누구긴, 당연히 전 황제, 실버 잭슨을 살해하고 황궁을 파괴한 마법사 놈들이지.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실버 잭슨을 살해하고 황궁을 파괴한 것은 맞지만 반역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하겠군.”
“그게 무슨 뜻이냐?”
“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제국이 멸망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더 이상 반역죄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멋대로 반역의 잣대를 들이민 것은 아서스 그놈의 뜻일 뿐이지.”
“네놈, 못 본 새 많이 변했군. 그런 되먹지 못한 궤변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애초에 진짜 반역을 준비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아서스 쪽일 텐데?”
“뭐?”
“너야말로 모른다고 시치미 떼진 않겠지? 그토록 정의를 외치던 놈이 아서스의 편에 서다니. 그것이야말로 모순이 아닌가?”
바할드는 발락의 꾸짖음에 똑같이 답해 주었다.
그는 여태껏 사실들을 말해 왔으니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발락은 달랐다.
발락은 바할드의 반문에 조금 당황했다.
왜냐면 일전에 들었던 헥터의 이야기와 그 뉘앙스가 묘하게 겹치는 듯했기 때문이다.
“…….”
잠깐의 고민.
혼란스러웠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할드로부터 이러한 이야기가 또 다시 언급되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뻣뻣할 정도로 고지식한 도덕성을 지닌 발락이, 오로지 의리와 충의만으로 아서스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참의 고민 끝에 발락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내 주군을 믿는다. 군주는 항상 비판과 모함을 받는 존재이며,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을 사실이다.”
“……멍청한 놈.”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발락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바할드에게 검을 들이밀 것이었고, 그것은 바할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굳이 신념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두 사람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오오오……!
바람이 불지 않는 공동 속에 공기가 밀집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피어올린 오러가 살기와 버무려져 대기를 휘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두 송이의 푸른 장미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피이잉……!
장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침내 차분하게 꽃잎이 정돈되었을 때, 두 사람의 몸에는 아무런 기운도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경지야…….’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기운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걸쳐진 듯 걸쳐지지 않은, 극도로 세밀하게 제어된,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만이 해낼 수 있는 극한의 오러 절제술이었다.
바할드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부메랑의 끝을 잡고 던지듯, 대각선으로 빠르게 휘둘렀다.
부우웅!
조용하게 그어진 검.
그러나 검날로부터 뿜어진 것은 결코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바할드가 검으로부터 뿜어낸 것은 그의 주특기 중 하나인 ‘태양 폭풍’이었다.
뜨겁게 작렬하는 오러의 폭풍이 발락에게로 쏟아졌다.
그러나 발락은 피식 웃음을 터뜨릴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서서 쏟아져 들어오는 폭풍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쿠구구구구……!
폭풍이 지나갔다.
폭풍이 쏟아지는 동안에도 발락은 제자리를 고수했고 폭풍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잦아들었다.
발락의 전신으로부터 그을음을 동반한 연기가 났다.
그러나 발락은 가소롭다는 듯이 목관절을 우득거리며 대답했다.
“못본 새에 좀 더 뜨거워지긴 했군.”
마치 미식가가 음식에 대한 평을 내놓듯이, 발락은 바할드의 태양 폭풍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대접을 받았으면 나도 대접해 주는 게 마땅한 도리지.”
이에 발락은 조금의 보법도 없이 정직하게 바할드 앞으로 걸어가 검은 형벌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바할드는 그런 발락의 접근을 피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발락을 맞이했다.
“받아라, 바할드. 내 차례다.”
정직한 경고. 그리고 천지분쇄.
지금의 발락을 있게 해준 발락만의 시그니처 기술이었다.
이윽고 천지를 깨부수는 검은 형벌이 유성처럼 바할드에게로 떨어졌다.
이에 바할드는 검을 들었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검날을 떠받친 뒤 허리를 살짝 숙여 떨어지는 검은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쩌어엉!
쇠종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진동의 여파는 두 팔과 상체, 그리고 허리를 지나 다리를 거쳐 지면으로 흩어졌다.
지이잉…….
공동이 뒤흔들렸다.
정돈된 오러가 천지분쇄와 만나 상상도 못할 파괴력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할드는 처음에 들어 올린 두 팔 그대로 자세를 유지했다.
피식.
바할드의 입가에서 옅은 웃음이 품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본 발락의 표정이 굳어졌다.
“…….”
발락이 검은 형벌을 거두었다.
그러자 바할드 또한 들어 올렸던 두 팔을 내리고 숙였던 허리를 지긋이 폈다.
“무게가 좀 늘었군.”
바할드의 평가는 그것이 전부였다.
마치 보통의 식당에서 양이 조금 늘었다는 것 외엔 더 이상 장점을 찾기 힘들다는, 그런 종류의 평가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반 발자국씩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흡!”
쩌어어엉!
반 발자국씩 거리를 벌린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을 향해 쉴 새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리고 휘두른 무기가 중심에서 맞닿을 때마다 굉장한 크기의 파쇄음이 공동의 공기를 찢어 놓았다.
그 누구도 밀리지 않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무게중심을 잡기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오로지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무기를 휘둘렀다.
발락에겐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바할드에겐 발락을 생포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두 사람은 서로의 패배를 위해 한 마음 한뜻으로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다.
쩌엉! 쩌엉! 쩌어엉!
종축과 횡축이 그어질 때마다 매끄럽게 정돈되어 있던 오러의 파편이 유리 조각처럼 튀었다.
하지만 정돈된 오러가 유리처럼 깨질 때마다 두 사람은 트롤의 피부처럼 깨진 오러를 재빨리 재정돈시켰다.
‘대단한 싸움이야.’
그리고 헨리는 팔짱을 끼고서 두 사람의 치열한 접점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품격 있는 결투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기교나 복잡한 속임수가 없는, 오로지 가진 힘과 단련해 온 결실을 바탕으로 결과를 가리는 최정상의 진검 승부.
검치기와 그 속성이 비슷했지만 결투자들의 격이 높다 보니, 이제는 두 사람의 행위가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힘겨루기는 계속되었다.
검의 특성상, 파괴력이 모닝 스타에 밀릴 법도 했지만 바할드는 발락의 파괴력에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반대로 모닝 스타의 특성상, 재빠른 검의 스피드에 밀릴 법도 했지만 발락은 바할드의 속도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팽팽한 자존심 겨루기였다.
이에 눈이 벌개진 발락이 바할드에게 소리쳤다.
“바할드! 이쯤하고 적당히 까부는 게 어때?”
“나는 내가 가진 힘만큼 까불 뿐이다.”
“그 입! 언제까지 놀릴 수 있나 한번 보자고!”
콰앙!
평온했던 발락의 오러가 흔들렸다.
이에 발락이 검은 형벌을 크게 휘둘러 바할드와의 거리를 벌렸다.
“장난은 이쯤하고 승부를 내지.”
힘이 엇비슷하다 보니 이대로 가다간 결판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물론 개인적인 결투였다면 며칠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결판을 냈겠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발락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러자 흔들렸던 오러가 다시 평온해졌다.
그러나 얼마 뒤, 발락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오러가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저건……!”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반과 맥도웰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궁극기를?’
궁극기.
결전기를 익힌 소드 마스터는 상급의 경지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극의를 결집시킨, 이른바 ‘궁극기’를 터득한 검사는 최상급 소드 마스터로 추대 받을 수 있었다.
지금 발락은 바할드와의 결투에서,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차례도 사용하지 않았던 최후의 비기인 궁극기를 사용하려고 했다.
“좋아.”
이에 바할드 또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평생을 가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발락의 궁극기였다.
그러니 자신 또한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할드 또한 오러를 재정돈시킨 뒤 자신의 검을 머리 높이 치켜들었다.
츠즈즈즛!
바할드의 오러가 치켜든 검 끝을 통해 허공으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반과 맥도웰, 그리고 헨리의 두 눈이 솥뚜껑만큼 커졌다.
“저, 저 미친놈이 설마?”
“야단났군! 반, 저기 쓰러져 있는 꼬맹이, 얼른 챙겨!”
방출된 오러는 계속해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검 끝에서 동그란 형태를 빚어내더니 이내 곧 발락의 오러처럼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크큭, 네놈도냐?”
둥글게 빚어지는 바할드의 오러를 본 발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바할드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자신의 오러를 더더욱 부풀려 냈다.
그리고 마침내, 공동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해진 발락의 오러가 천천히 형태를 띠어 가기 시작했다.
츠즈즈즛!
그것은 사람의 형태였다.
특히 삼각뿔을 얹은 투구와 뾰족한 어깨 장식을 닮은 사람의 형태.
그렇다. 발락은 오러를 지점토 삼아 자신과 똑 닮은 형태의, 오러로 만든 거인을 소환해냈다.
‘거신병!’
발락이 가진 최종 형태의 극의.
그것은 바로 ‘거신병’이라고 불리는 대륙 최고의 병사였다.
거신병을 소환해 낸 발락은 이내 곧 검은 형벌을 든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거신병 또한 검은 형벌과 똑같이 생긴 오러로 이루어진 모닝 스타를 치켜들었다.
쿠구구구구!
공동만큼 거대한 거신병이 팔을 치켜들자 오러로 이루어진 모닝 스타가 공동의 천장을 긁었다.
이에 헨리는 서둘러 마력을 산개해 공동의 파괴를 막았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맥도웰이 헨리를 향해 소리쳤다.
“헨리! 피해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들 제 뒤로 오세요!”
“너, 네가 대체 어떻게……?”
반이 쓰러진 로난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맥도웰은 아무것도 모르고 공동의 파괴를 막는 헨리를 호출했다.
그러나 헨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모두에게 자신의 뒤로 올 것을 요청했다.
그 순간, 공동 안에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기운이 공동 전체에 작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붙어 보는구나……! 바할드!”
발락이 희열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할드의 검 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바할드의 오러로 빚어낸 둥그렇고 뜨거운, 마치 작은 태양을 연상케 하는 푸른 색깔의 오러가, 아니 태양 그 자체가 된 바할드의 오러가 그의 검 끝에 맺혀 있었다.
‘푸른 태양!’
푸른 태양.
그것은 바할드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오러의 결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