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집결 (5)
대륙 곳곳에 태풍의눈이 형성되고 있었다.
아서스가 이끄는 아이니아 제국군과 헨리가 조직한 연합국.
그리고 전략적으로 동시에 독립을 선언한 세 개의 자유도시.
이해관계에 의거하여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만의 야욕을 노리고 있는 두스카인까지.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곧 불어닥칠 피바람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세력은 단연코 아서스의 제국군이었다.
“소문 들었나? 아이니아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대륙 정벌에 나선다더군.”
“신성도시 세인트 홀과 용병국 페이실링은 진즉에 지원 병력을 보냈다던데?”
“평화교에서? 누가 그래?”
“건넛마을 대장장이 아들이 성기사단의 행군을 봤다고 했어.”
“세인트 홀의 성기사단이라면 태양의 전사들이겠군. 그들까지 대륙 정벌에 합류하다니, 이거…… 어쩌면 대륙에 새로운 역사가 쓰일지도 모르겠구먼.”
소문은 대륙 전역에 퍼지면서 살에 살이 붙어 점점 더 덩치가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나라로 독립을 선언한 비발디 타운이나 앙켈만, 무슈에도 그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대륙 정벌?”
“젠장! 그렇게 되면 이곳도 더 이상 안전지대는 아니잖아?”
“흠, 근데 내 친구한테 듣기로는 아이니아 제국에서 소 끌고 가듯이 병사들을 징병해 간다던데?”
“그거야 뭐, 우리도 예상했던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맞아. 그래도 여긴 좀 낫지. 듣기로는 거기 밥은 소금 간도 안 한 딱딱한 옥수수빵만 준다던데?”
“저런…….”
시국이 그랬다.
물가가 치솟고 음식이 귀해지자 어차피 내놓은 목숨, 식사가 더 좋은 곳에 몸을 의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제국군의 움직임에 따라 줄어들 줄로만 알았던 도시군의 지원은 점점 더 박차를 가해 날이 갈수록 절정에 치달았다.
그리고 사정은 무슈와 앙켈만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 되어 가고 있냐?”
“아, 대마법사님!”
연합국 회의가 끝나고 며칠 뒤, 헨리는 그동안 준비한 것들을 일일이 직접 점검한 뒤 다시 비발디 타운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소집된 도시군과 증축된 성벽의 성능 등을 테스트하며 최종 준비를 다졌다.
“도시군은 얼마나 모였지?”
“말씀하신 대로 열 명을 1소대, 1백 명을 1중대, 1천 명을 1대대, 1만 명을 1군단으로 잡았을 때, 현재까지 총 8개 대대 정도의 병력이 모였습니다.”
“8개 대대? 5개 대대 정도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모였네?”
“현재 속도라면 며칠 뒤에 1개 군단 정도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턱대고 많이 받아도 좋진 않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곧 전투에 투입할 놈들이니까.”
“전투…… 말씀이십니까?”
“그럼? 자선사업이나 하자고 도시군을 모집한 줄 알아? 제국 소식은 들었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제국군이 가장 먼저 타격할 곳은 무슈나 앙켈만이 아닌 바로 이곳, 비발디 타운이 될 거야.”
“예에? 왜 하필 저희 비발디 타운인 겁니까? 듣기로는 무슈와 앙켈만에는 아직 병력이 4개 대대도 못 모였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길 먼저 치는 거야. 병력이 가장 강성한 곳을 쳐야 그보다 못한 병력을 지닌 나라들이 알아서 복속할 테니까.”
“…….”
헨리의 설명을 듣던 벤트는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갓음을 깨달았다.
다른 도시들에 비해 병력이 많이 모이기에 당연히 제국의 선제공격 대상에서 배제될 줄로만 알았건만 오히려 강한 것이 독이 되었다.
덕분에 벤트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너무 겁먹지는 마. 설마 여기가 무너지도록 내가 가만히 내버려 두겠어?”
“하지만…….”
“게이트 연결도 충분히 끝냈고 혹시라도 전투에서 패하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버텨. 그게 네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니까.”
애초에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금방 헨리의 손에 붙잡힐 게 뻔했고, 전쟁이 일어난 도중에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제국군의 추격을 받을 것 역시 뻔했으니까.
그러니 벤트에겐 달린 선택지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벤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헨리는 벤트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 준 뒤 곧바로 텐을 찾았다.
“어때, 사업은 좀 잘 되어 가?”
“하하, 사업이라면 자선사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선사업이라니, 당장은 사들인 식량을 퍼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너도 잘 알잖아, 전쟁에서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식량들을 배분하고 있긴 합니다만……. 근데 이거,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군이 늘어나니 쌓아 둔 식량도 빠른 속도로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 봐. 어차피 길어 봐야 사흘이야. 사흘 내로 전쟁이 터지면 식량을 수급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알겠습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물자를 수급해 오겠다는 건지 텐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헨리가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믿을 수 있다.
헨리는 여태껏 자신이 한 말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으니까.
이외에도 헨리는 앙켈만과 무슈를 돌며 앞으로 제국군이 어떻게 행동할지와 전시에 어떻게 행동하면 되는지에 대해 일러 주었다.
“자유도시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그럼 이제 남은 건 고기가 미끼를 물기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준비는 얼추 끝났다.
이에 헨리는 다시 살게라로 복귀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아직 못 다 마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살게라 설산의 어딘가.
헨리는 설산 내부를 깎아 하나의 거대한 공동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공동의 중심에는 거대한 크기의 마법진이 있었다.
마법진에서는 헨리의 마력을 빼닮은 에메랄드 빛 광채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중심에는 탁한 점성을 띤 생물체 하나가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슬에 뒤엉켜 구속되어 있었다.
이윽고 공동의 중심에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마력의 사슬에 뒤엉켜 있던 존재가 메마른 목소리로 헨리를 부르짖었다.
“마스터…….”
“좀 괜찮나?”
“슬슬…… 한계가…… 크윽!”
사슬에 뒤엉켜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클레버였다.
클레버는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헨리에게 자신의 고통을 알렸다.
이에 헨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마력이 부족한 건가?’
설산 내부에 펼쳐놓은 주문은 봉인의 마법진이었다.
그것도 클레버의 체스트 능력을 강화시키는 보조 형태의 봉인 마법진.
그리고 헨리가 이러한 마법진을 펼쳐 놓은 까닭은 간단했다.
그 이유는 바로 체스트 속에 수납되어 있던 발락이 빙결 상태에서 깨어나 클레버의 체스트 속을 무차별적으로 헤집어 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곧 전쟁이 벌어질 상황에서 징벌왕을 세상에 풀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어찌 됐든 발락은 아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아서스의 명령에 따를 놈일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클레버의 체스트 능력을 이용해 최대한 발락을 가두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발락은 훨씬 더 강력한 존재였다.
며칠 전에 클레버가 복통을 호소할 때부터 미리 조치를 취해 놓긴 했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였다.
이대로 가다간 클레버의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태.
그래서 헨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딱!
헨리가 손을 튕겼다.
그러자 헨리의 양옆으로 옅은 광명이 드리우더니 익숙한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야?”
“살벌하게도 준비해 놨네.”
“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총 넷.
반과 맥도웰, 그리고 바할드와 로난이었다.
헨리가 이들을 소환한 까닭은 간단했다.
바할드와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닌 이가 바로 발락.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실력자들을 끌어모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발락을 제압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반이 말했다.
“헨리, 정말로 클레버 안에 발락이 봉인돼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클레버에게 마력을 쏟아부어 어떻게든 봉인해 두고 있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한계입니다.”
“아서스 녀석, 어떻게 발락 같은 놈을 끌어들일 생각을 한 거지?”
“그게 중요한가? 뭐가 됐든 제압하면 되는 거잖아? 그치, 바할드?”
“그래.”
“근데 어른들 싸움에 이런 꼬맹이가 끼어도 되나? 아직 궁극기도 익히지 못한 녀석에게 발락은 좀 무리일 텐데?”
“보조 역할 정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어찌 됐든 목표는 발락의 죽음이 아닌 발락의 생포니까요.”
제거가 아닌 생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헨리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봉인을 해제할 테니 모두 준비해 주십시오.”
“그러지.”
슬그렁.
헨리의 신호에 모두가 검을 뽑아들었다.
자체적인 무력만으로는 바할드와 버금간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할 뿐이다.
당사자인 바할드는 그 사실을 부정했으니까.
물론 그것은 바할드가 더 강하다는 뜻에서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결판을 내본 적이 없었기에 부정한 것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바할드는 정직한 사내였으니까.
이윽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헨리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웅!
공동 전체를 가득 메우는 에메랄드 빛 마력이 헨리의 주문과 함께 공명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굉음이었다.
그리고 밀집되는 마력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클레버의 신음 또한 점점 더 격렬해져만 갔다.
쿠구구구!
동공이 울렸다.
에메랄드 빛 스파크가 튀었고 진동이 거세질수록 모두들 손에 쥔 검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자욱한 연기.
그리고 사방으로 탁한 점액질이 튀었다.
클레버의 살점이었다.
“후우…….”
옅은 신음.
신음 속에는 시원한 해방감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부우웅!
자욱한 연기 속에서 파공을 가르며 묵직한 무엇인가가 던져졌다.
콰아앙!
“……!”
타깃은 로난이었다.
로난은 갑작스레 덮쳐진 투사체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로난!”
부우웅!
투사체의 정체는 검은 형벌이었다.
검은 형벌은 로난의 갑옷을 사정없이 어그러뜨린 뒤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연기가 걷혔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강력한 봉인 속에서 풀려난 분노한 징벌왕이 엄청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네놈들 짓이었나?”
문답무용.
발락은 더 이상 질문을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눈앞에 나타난 과거의 인연들을 보고 제멋대로 해석할 뿐이었다.
“새끼, 감 하나는 여전하네.”
이에 맥도웰이 쓴웃음을 지으며 발락의 기개에 감탄했다.
분명히 봉인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최약체를 찾아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작전은 멋지게 먹혀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형벌에 부딪힌 로난은 현재 몸도 겨우 가누고 있었으니까.
이는 대단한 감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군그래.”
손에 다시 검은 형벌을 쥔 발락이 눈동자를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금세 판결을 내렸다.
판결 내용은 사형.
과거의 인연이었든 어쨌든 간에 자신을 납치하고 봉인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기를 풀풀 풍기며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발락의 입장에선 모두에게 사형을 내려도 충분한 이유였다.
이에 맥도웰이 물었다.
“헨리.”
“예, 맥도웰 님.”
“꼭 생포해야만 해?”
“가능한 생포하는 편이 좋습니다.”
“이유는?”
“발락은 쉬이 죽이기엔 아까운 인재니까요.”
“……인재는 지랄.”
헨리의 요구 조건에 맥도웰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헨리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발락은 설득만 잘 해낼 수 있다면 최고의 인재인 것은 맞았으니까.
“가지.”
음속의 맥도웰.
선공은 그가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