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집결 (3)
호들갑을 떠는 인물은 없었다.
이 자리에, 그것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호들갑을 떨 만큼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인지 분위기는 더더욱 엄숙해졌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철혈여제, 헬라였다.
“밀고자라……. 썩 유쾌한 단어는 아니네.”
회장에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자 어른들의 눈치를 보던 홍월이 좌사와 우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에 좌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마법사님, 혹시 대마법사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태제님을 대신해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좌사 님.”
“감사합니다.”
좌사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좌중의 시선을 받아 내며 목소리를 골랐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사항이 사항이니만큼 이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근거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의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당사자에겐 씻을 수 없는 모욕일 테니까요.”
“저도 좌사 님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합니다.”
헨리가 좌사의 의견에 긍정했고 모두가 두 사람의 대화에 수긍했다.
이어서 좌사가 말했다.
“그럼 먼저 묻겠습니다. 헤라리온 전하, 전하께선 무슨 근거로 이중에 밀고자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혹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큰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가진 능력들 중에는 상대의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헨리 님이 좀 전에 그러한 선서를 제안하신 거구요.”
“진심을 꿰뚫는 능력이라……. 그렇다면 그 능력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입증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좌사의 질문은 라의 힘을 부정할 수도 있는 질문이니 어찌 보면 듣는 이에 따라 충분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헤라리온은 현명한 지도자, 고작 그런 의심 따위에 분노할 위인이 아니었다.
이에 헤라리온이 고개를 돌려 헨리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헨리 님?”
“하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헤라리온의 부름에 헨리는 헤라리온에게로 다가가 귀를 빌려주었다.
그러자 헤라리온은 헨리에게 귓속말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헨리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헤라리온의 말이 끝났을 때, 헨리는 다시 한 번 헤라리온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어서 헤라리온이 좌중에게 말했다.
“제 능력을 입증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뭐, 이 부분에 대해선 제가 아니라 헨리 님께서 대신 말씀하셔도 될 것 같군요.”
연합국의 총사령관은 헨리다.
그러므로 헤라리온의 능력은 총사령관을 돕는 도구적인 역할일 뿐이지 진실을 꿰뚫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헤라리온이 판결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헤라리온은 자신이 직접 대답하기보단 헨리에게 바통을 넘겨주면서 분위기를 유하게 전환시켰다.
이에 헨리가 헤라리온 대신 대답하기 시작했다.
“좌사 님.”
“예, 대마법사님.”
“질문하신 대로 헤라리온 전하의 진심을 꿰뚫는 능력은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다면 응당 증명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배신자에 대한 처분을 먼저 정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순서야 아무래도 상관없다지만 그편이 편하시다면 저는 처분을 먼저 결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런가, 우사?”
헨리와 좌사의 대화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질 때쯤, 좌사는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우사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자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사가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아, 음, 그럼! 물론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흐음.’
이에 헨리는 눈을 얇게 떴다.
우사.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담대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지금은 영락없이 겁에 질린 백돼지 꼴이다.
처음엔 헨리도 믿지 못했다.
아니, 믿지 못한다기보단 의외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영리한 소레국의 지도자들 중 한 명인 그가 밀고자였을 줄이야.
물론 생각을 바꿔 관점을 달리하니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오히려 영리하고 똑똑하기 때문에 밀고자가 됐을 가능성이 컸다.
어찌 됐든 약자가 더 강한 자의 편에 붙어 살아남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들 중 하나니까.
하지만 이번에 그가 내린 판단은 잘못돼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나 못 미더웠나?’
죽은 헨리의 직계 제자라는 사실과 연합국의 형성, 그리고 전 십검들까지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서스를 택했다는 것은 ‘헨리가 보지 못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들, 우사는 이미 아서스에게 정보를 누설했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근데 대체 설탑은 어떻게 안 거지? 학파장을 소레국에 파견한 것은 맞지만 설탑에 마법사들을 이주시켰다는 말은 해 주지 않았는데?’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한 수상한 점들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헤라리온의 눈에 걸러진 밀고자가 우사로 좁혀졌으니 남은 일은 우사를 두들겨 필요한 정보들을 뽑아내는 것뿐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우사를 괴롭힐 수 있을지에 대해 천천히 고민해 보기로 했다.
오베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죄인을 괴롭히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배신자에 대한 처분부터 논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좋은 의견을 갖고 계신 분은 서슴없이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회의의 논점이 바뀌었다.
원래대로라면 연합국이 앞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움직여야 될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였으나 배신자의 등장으로 인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예로부터 밀고자는 혀를 잘라 그 죄를 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 다시 그 건방진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입을 찢어 놓는 것이 어때? 물론 혀도 뽑고 말이야.”
“인두로 입안을 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 죽여요.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자고로 인간이란 남에게 상을 주는 것보다 벌하는 것을 더 쉽게 생각하는 존재였으니까.
한참 동안 살 떨리는 처분법들이 나왔고, 모두가 신나서 설명하는 사이 단 한 사람만 안색이 백지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우사에게 물었다.
“우사 님.”
“예, 예? 콜록콜록!”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에 헨리가 넌지시 그의 이름을 부르자 우사는 그만 사레에 걸려 수차례나 기침을 했다.
한참의 기침 끝에 얼굴이 시뻘개진 그가 한쪽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헨리가 인자한 미소로 질문했다.
“모두들 의견을 내시기에 혈안이신데 우사 님께선 좋은 의견이 없으신가 봅니다?”
“커흠흠…… 조, 좋은 의견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흠흠, 저는 그럼…….”
얼굴이 벌게진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위를 살폈다.
모두들 밀고자를 처리할 생각에 신이 나 누가 더 흉악한 아이디어를 내놓는지에 대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기가 죽은 우사가 기름기가 잔뜩 낀 모가지를 집어넣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그냥 매질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매질이라, 고작 매질로는 잘못을 뉘우치기 힘들지 않을까요?”
“커험험…… 그도 그렇지만…….”
“다들 좋은 의견이 많네요. 저는 그중에서도 특히 죽을 때까지 살을 조금씩 회 뜨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벌게졌던 안색이 이제는 보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맹독을 집어삼킨 돼지처럼 말이다.
헨리는 그러한 반응이 몹시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윽고 사람들이 내뱉는 독설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쯤, 헨리는 그제야 조용히 손을 올려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그만.”
사위가 조용해졌다.
겁을 주는 것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헨리는 모두들 입을 닫고 눈알을 굴리는 분위기 속에서 나지막히 말했다.
“도올 어르신.”
“예.”
“어르신께선 밀고자를 어떻게 처분하셨으면 좋겠습니까?”
헨리는 질문의 방향을 제방의 도올에게로 틀었다.
도올.
그는 아흔이 넘은 노인으로 제방에서 가장 지혜로운 현자였다.
또한 실제로도 그는 오래 살아온 세월만큼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판결을 내려 왔다.
이에 도올이 말했다.
“저는 밀고자를 한 번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 말씀이십니까?”
“예. 밀고자는 활용하기에 따라 이중 첩자로서 활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중 첩자라…….”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밀고자는 적군에게 신뢰를 얻었을 테니 한두 번쯤은 적을 교란시키는 데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
이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정리했다.
“좋은 의견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벌해야 할 자라면 이중 첩자로 재탄생시켜 속죄하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죠. 지금 이 자리에서 밀고자가 자수를 한다면 이번 한 번만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대신 어르신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중 첩자로서 활동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간결한 정리였다.
어차피 벌해야 할 놈이라면 쓸모를 다한 다음에 벌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이에 다른 사람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중 첩자라…… 나쁘지 않은 발상이야.”
“괘씸하긴 하지만 뭐…… 밀고자 한 놈을 벌하는 것보다 연합국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 준다면 그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겠지.”
“저도 찬성이에요!”
다수가 긍정을 표했다.
물론 일부 중에는 활용이고 나발이고 당장 죄를 벌하여 일벌백계를 집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임은 수직적 관계가 아닌 연합국이라는 수평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결과는 투표로 결정되었다.
“의견이 좁혀졌군요. 그럼 지금부터 자수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헨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우사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몇십 초가 지나도 우사가 손을 들지 않자 상황을 지켜보던 맥도웰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니, 이 새끼가 기회를 준다고 해도 꼬리를 내빼네? 그냥 나다 싶으면 나와, 이 새끼야.”
쾅!
테이블을 내려치는 맥도웰.
그러자.
“저, 저, 접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겁에 잔뜩 질린, 포도알처럼 얼굴이 보라색으로 물든 우사가 있었다.
이에 헤라리온과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 우사?”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좌사였다.
자신의 반쪽이나 다름없는 우사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밀고자라니?
그리고 좌사에 이어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든 것은 그들의 수장, 태제 홍월이었다.
“우, 우사? 다, 당신이 대체 어떻게……?”
홍월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아무리 태제라 할지라도 이러나저러나 그녀는 아직, 약관의 나이도 채 지나지 못한 어린 소녀였으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자 자, 실망은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하도록 하시고……. 일단은 밀고자가 자백을 했으니 당사자의 변명부터 한번 들어 볼까요?”
헨리의 제안에 다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우사에게로 쏟아졌다.
하나같이 모두들 싸늘한 눈빛이었다.
개돼지 같은 짐승들에게도 이러한 눈빛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사는 감내해야만 했다.
이것이 밀고자가 짊어져야 할 비참한 말로니까.
“우사 님?”
헨리는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아니 오히려 더 친절해진 미소와 함께 우사에게 스스로 죄를 고백할 기회를 주었다.
이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우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고! 사, 살려고 그랬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우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우사의 고백은 헨리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역시.’
연합국의 승리가 도저히 예견되지 않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서스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었다.
헨리는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괘씸하게 느껴졌으나 우사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했다.
‘이래서 어중간하게 똑똑하면 피곤하단 말이지.’
이외에도 우사는 분명히 죄를 사해 주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덜 밉보이기 위해 묻지도 않은 정보들까지 술술 불기 시작했다.
이윽고 밀고자의 고백이 끝났을 때쯤 헨리가 넌지시 물었다.
“우사 님, 그건 그렇고…… 살게라에 마법사들이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건 여기 계신 그 누구에게도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었는데 말이죠.”
“예, 예? 사, 살게라라니요?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
엇갈리는 반응.
이에 헨리가 헤라리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입니다, 헨리 님.”
“……?”
헨리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