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꼬리잡기 (9)
“뭐? 발락이 왔다고?”
“그렇습니다. 일단은 남부에 있는 초룬산맥으로 옮겨 놓기는 했는데 언제 다시 이곳으로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초룬산맥이라…….”
부학파장들의 호출로 설탑에 돌아온 헨리는 부학파장들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발락이 살게라를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발락이 이곳에 마법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살게라에 설탑을 설치한 것과 이곳에 마법사들을 이주시켰다는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그렇기 때문에 부학파장들에게 발락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들었을 때 헨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부에 밀고자가?’
모든 가능성을 의심해 보아야만 했다.
지금 헨리가 진행하려는 일들은 모든 것들이 다 극비리에 진행 중이었으니까.
“일단 알겠어.”
“혹시 더 시키실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대마법사님.”
“고마워. 그리고 너희들이 수고해 준 덕분에 그래도 당장의 피해는 면했네. 그리고 경계 마법을 설치해 놓은 것도 잘했고. 난 초룬산맥으로 가서 발락을 추적해 볼 테니 그동안 너희들은 경계 마법을 한층 더 강화하고 어린 마법사들의 교육에 집중해 줘.”
“예, 대마법사님.”
“텔레포트.”
볼일을 마친 헨리는 이그니에게 사용한 텔레포트의 좌표를 받아 초룬산맥으로 이동했다.
지이잉!
환한 빛 무리.
섬광이 시야를 잠깐 어지럽혔다 비추니 주위는 어느새 남부 산맥 특유의 푸르름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군.’
좌표는 정확했다.
그 증거로 도착한 곳의 주위에 마법 포격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마법 포격이 쏟아져 황무지가 된 이후, 산맥에 사는 동식물들 이외에 딱히 사람이 다녀간 흔적 따위는 없어 보였다.
헨리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손끝을 대며 말했다.
“대지의 기억.”
피이잉!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영원한 비밀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헨리가 만들어 낸 마법이었다.
헨리는 발락이 산맥에 도착한 후 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대지의 기억을 사용했다.
그러자 마법이 발동되며 헨리의 마력들이 대지의 기억들을 읽어 내기 시작했다.
대지에 새겨진 기억은 선명했다.
이곳이 황무지가 된 지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으니까.
헨리는 영화처럼 재생되는 대지의 기억들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확인을 마친 후 그제야 눈을 떴다.
‘헥터도 같이 옮겨졌을 줄이야.’
헥터가 옮겨진 건 아무래도 부학파장들의 실수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선 헥터까지 텔레포트에 휘말릴 일은 없었을 테니까.
헨리는 대지의 기억 속에서 넝마가 된 갑옷을 걸친 발락을 보았다.
‘역시 멀쩡하군.’
발락의 망토는 거적때기가 되었고 갑옷 곳곳에 마모된 흔적들이 보였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외견은 말끔했다.
즉, 발락의 갑옷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단 한 줌의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명색이 6서클에 가장 인접한 존재들의 마법 포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락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으니 새삼 그가 얼마나 강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선은 저쪽인가?’
헨리는 고개를 돌려 발락이 떠난 방향을 보았다.
대지의 기억에 의하면 녀석의 목적은 일단 산맥을 내려가는 것인 듯했다. 그리고 그 뒤를 헥터가 뒤쫓고 있었고.
이에 헨리는 걱정했다.
‘헥터 녀석, 쓸데없는 짓만 안 하면 좋을 텐데.’
헥터가 녀석을 추적하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헨리가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짓을 통해 발락의 분노라도 산다면 그때는 정말로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걸음 형상.”
이어서 헨리는 발자국을 추적하는 마법인 걸음 형상을 사용했다.
타깃은 당연히 발락의 발자국.
마법을 사용하자 헨리의 시야에 길쭉하게 늘어진 푸른 발자국들의 행렬이 보였다.
‘일단은 쫓아가 보자.’
곧바로 텔레포트를 사용해 추적할 수 없음이 아쉬웠다.
하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의 거리 차이라면 얼마든지 금방 좁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헨리는 이어서 바닥을 찼다.
그러자 마법 무장 특유의 가속 마법이 발동되며 헨리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타다닥!
헨리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 * *
발락의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발락은 군벌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교화시켰고, 혹여나 피난민이 보이면 그들의 보호를 명령했다.
그리고 군벌을 만날 때마다 앙켈만까지 가는 길의 방향도 확실하게 보정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대로라면 앙켈만에 도착한 다음, 앙켈만에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한 장 구해 수도로 이동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시원시원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흑마술을?’
흑마술.
그 존재 자체가 비인륜적이며 사람을 해치는 일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흑마술은 백해무익이라고 들어 왔다.
실제로도 발락은 킬라이브에 근무하면서 몇 명의 흑마술사들을 단죄한 적이 있었는데, 발락이 단죄한 흑마술사들은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들 같았다.
그들은 악신을 숭배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인체 실험을 하는 행위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비인류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놈들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단죄한 놈들 중에는 인간에게 악마의 자식을 잉태시키기 위해 실험 재료로 만삭이 된 임산부를 사용한 놈도 있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아 왔기 때문에 발락에게 흑마술사들이란 인간 이하의 족속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아닐 거야.’
잡념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자 발락이 머리를 내저었다.
본디 의심이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헥터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이상,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잡념들을 떨쳐 내기란 어려울 것만 같았다.
물론 폐하 앞에선 이러한 의문을 조금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사실로 모략을 당해 아군을 해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앙켈만인가?’
또다시 해가 졌다.
이제 한나절 정도만 더 걸어가면 군벌들이 말한 앙켈만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해가 지자, 발락이 익숙한 움직임으로 야영을 준비했다.
장소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여느 동굴이었다.
모닥불을 피운 발락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잠에 들었다.
* * *
‘이런 망할……!’
발락이 있던 자리를 떠난 헥터는 영체 특유의 자유로움을 이용하여 빠른 속도로 앙켈만으로 이동했다.
그의 이동은 막힘이 없었다.
헥터의 영체는 모든 물리적인 사물을 관통할 수 있으니, 혹시라도 새와 마주친다 한들 그냥 통과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 덕분에 헥터는 며칠이나 족히 걸릴 거리를 군마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여 반나절 만에 앙켈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앙켈만에 도착한 이후에 생겼다.
‘아냐, 다시 해 보자.’
헥터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앞으로 손가락을 내질렀다.
그러자.
파지지짓!
“으아악!”
손끝에서 연기가 나는 헥터.
더불어 전신이 짜릿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헥터는 손끝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았다.
영체인 자신의 손끝에서 연기가 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우스운 상황이 지금 헥터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벌써 수십 바퀴째 앙켈만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헥터가 앙켈만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할 때마다 갑자기 스파크가 튀며 강렬한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가 파견한 마법사들이 혹시 모를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도시 전체에 거대한 마법 결계를 설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물론 헥터가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헥터는 이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두려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제기랄!”
코앞에 앙켈만이 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
헥터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팔을 내저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
그러나 그조차도 의미 없는 분풀이였다.
어찌됐든 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에 헥터는 좌절을 맛보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방법뿐인가?’
왜 앙켈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지는 몰랐지만, 이렇게 된 이상 헥터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바로 다른 도시로 가는 것.
예컨대, 헤라리온이 있는 샤하트라로 가거나, 마법사들이 있는 살게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대륙의 최남단이었다.
대륙 최북부에 있는 살게라나 동부에 있는 샤하트라로 가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
헥터는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이동에 쏟아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에휴.’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지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자신은 영체이기 때문에 피로함, 즉 여독이 쌓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
헥터는 얼마간 주저앉아 허무한 마음을 달랜 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다시 부활한 내가 죄지, 뭐.”
그렇게 다시 헥터의 비행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헥터가 떠난 지 두어 시간 뒤.
“그럼 이제 슬슬 마법 결계를 거두어 볼까요?”
“테스트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약 사흘에 걸쳐 결계를 가동시켜 본 결과, 그 어디에서도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헨리가 앙켈만에 파견한 마법사들의 대화였다.
그들은 헨리의 명령에 따라, 각 도시에 파견된 무슈의 장인들을 도와 성벽을 증축하고 잡다한 경계 마법들을 설치했다.
또한 도시 전체를 보호할 가벼운 레벨의 마법 결계까지 설치하였다.
“그럼 지금부터 마법 결계에 대한 마력 공급을 중단토록 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마법 결계의 유지를 위한 마력 공급을 중단했다.
해제되는 마법 결계.
테스트는 성공적이었다.
“이거, 아무리 가벼운 레벨의 결계라곤 하지만 확실히 도시 전체를 보호하다 보니 소모되는 마력량이 장난 아니긴 하네요.”
“어차피 전시 상황에만 펼쳐둘 것이니,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대마법사님께서도 충분히 흡족해 하실 겁니다.”
“그럼 저희들이 할일은 대강 끝난 것 같으니 오늘은 회식이나 할까요?”
“좋죠! 이만큼 노력했으니 회포를 푸는 건 당연한 단계가 아니겠습니까?”
임무를 마친 마법사들의 얼굴에 흡족함이 떠올랐다.
* * *
“찾았다.”
어두운 밤.
어둠 속을 바람처럼 가르며 한참을 이동한 끝에 헨리는 결국 푸른 발자국의 끝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앙켈만에서 하루 정도 거리에 떨어진 여느 동굴이었다.
자작자작.
모닥불 타는 소리가 들렸다.
‘야영이라도 하고 있나 보군.’
동굴 속에서 모닥불 하나로 야영을 때운다.
마법사가 보기엔 열악하기 그지없는 야영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녀석을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헨리는 기척을 지웠다.
그런 다음 허공으로 떠올라 동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철의 장막.’
마법을 발동하자 헨리의 전신에서 에메랄드 빛 마력이 쭈욱 빠져나갔다.
철의 장막은 두꺼운 강철 담벼락을 만들어 대상을 가두는 마법이었다.
상대는 무려 발락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소드 마스터조차 뚫지 못할 강력한 장막을 만든 후 녀석에게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쿠구구구구!
헨리의 마력을 머금은, 기존의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한 특제 강철의 감옥이 지상으로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지가 진동하는 그 순간.
콰앙!
푸른 마력을 가득 머금은 검은 형벌이 헨리가 만든 철의 장막에 날아와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