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꼬리잡기 (8)
발락의 행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험브리에게서 안내 받은 방향을 나침반 삼아 쉴 새 없이 걸었다.
그리고 행보를 거듭할수록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벌들을 만났다.
‘대륙 전체에 망조가 들었군.’
헥터가 발락을 따라다니며 내린 소감이었다.
군벌.
그것은 비단 나라를 잃은 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륙의 법과 치안을 담당하던 유라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숨어 있던 흉악범들을 비롯해, 나라를 잃은 군인, 먹고 살기 빠듯해진 용병 들 등 수많은 무력 집단들이 비적으로 돌변해 범죄를 일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군벌들을 만날 때마다 발락의 행동은 한결같았다.
범죄자는 머리통을 부수고, 군인은 아이니아 제국으로 귀화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용병들에게는 아이니아 제국군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한다.
물론 모든 군벌들에게 발락의 말이 통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군벌들을 자신의 휘하로 흡수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제안에 응하지 않는 군벌들의 머리통을 죄다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미친놈도 저런 미친놈이 없지.’
발락은 정의, 그 자체였다.
그러나 만약 발락의 정의를 한 가지 물질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강철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철의 정의.
그것이 바로 발락의 신념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아서스에게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충의를 보이고 있었다.
곧 해가 지고 밤이 됐다.
산맥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인 앙켈만은 아직 며칠을 더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물론 말을 타고 간다면 그 시간은 훨씬 더 단축될 테지만, 부당하게 남의 것을 탐하지 않겠다는 발락의 신념 때문에 그는 말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말을 취하지 않았다.
발락은 곧 야영 준비를 했다.
야영 준비는 어느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것으로 끝냈고 식사는 들짐승을 사냥해 와서 구워 먹었다.
발락은 갑옷을 벗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긴 행군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쉴 때만큼은 확실히 쉬어두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헥터는 그 모든 것들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온종일 지켜본 바로는 그는 그저 과격한 냉혈한일 뿐, 그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양심적이었으며, 비효율적일 정도로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런 놈이 대체 어떻게 아서스 밑에 들어간 거지?’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서스의 모든 것을 알고서도 아서스를 섬기는 것일까?
그리고 아서스가 행하는 행위들이 자신의 정의와 닮았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헥터의호기심을 자극했다.
‘한번 물어봐?’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발락이 적의를 드러내며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면 재빨리 동굴 속으로 숨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오러나 마법에 의한 타격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굴 속으로 영체를 투영시키면 아무런 피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헥터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저자와 말을 섞을 수 있을까?’
이에 헥터는 그동안 지켜봐 온 발락의 속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
발락은 벽에 기대어 단잠을 청했다.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안구를 뒤덮은 눈꺼풀에 무게가 실리면서 점점 더 흐릿한 무의식의 경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짹짹!”
“……?”
“짹짹!”
흐릿한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발락은 똑똑히 들었다.
야밤에 지저귀는 참새의 소리를.
‘참새?’
참새의 지저귐에 발락은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자작자작.
눈앞에는 자신이 피운 모닥불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동안의 침묵.
발락은 한동안 정신을 날카롭게 세웠다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곤 모닥불이 들려주는 평온한 자장가에 다시금 잠을 청했다.
그러나…….
“짹짹!”
“……!”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참새의 지저귐은 잘못 들은 것이나 환각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발락의 귀를 간지럽히는 참새의 지저귐이었다.
발락은 눈을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귀에도 신경을 모았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곤두세워도 주위에는 자신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드디어 잠에서 깼군.”
“누구냐……!”
느껴지는 기척이 없다.
그럼에도 동굴 전체를 울리는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에 발락은 재빨리 검은 형벌을 손에 쥐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나?”
“당장 나타나서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일대를 전부 파괴하겠다.”
징벌왕다운 경고였다.
그러나 영체의 몸으로 도망이 자유로운 헥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협박이었다.
이에 헥터가 말했다.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말고,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그 흉측한 물건부터 내려놓는 게 어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 그 솜방망이가 없으면 나랑 마주설 자신이 없나?”
“쓸데없는 말장난을 하는군. 아쉬운 건 네놈이 아닌가?”
“아쉽긴. 난 그저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인데?”
“……좋다.”
발락은 의외로 순순히 헥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발락은 저 멀리 검은 형벌을 던졌다.
그리고 전신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차하면 검은 형벌을 불러들여 곧바로 손에 쥘 수 있게끔 말이다.
그리고 발락이 검은 형벌을 던진 순간, 헥터가 말했다.
“자신감이 넘쳐서 좋군.”
“원하는 대로 해줬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시지?”
“둔하긴……. 아래다.”
“……?”
아래라는 말에 발락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아래엔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푸른 영체의 헥터가 있었다.
“…….”
“재미없긴.”
내심 깜짝 놀라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킬라이브에서 이보다 더한 것들을 보아 와서 그런 것일까?
발락은 푸른 영체의 헥터를 보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침착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혐오스럽다는 듯이 헥터를 바라보았다.
“흠흠.”
헥터는 이내 곧 바닥에서 완전히 몸을 끄집어내 발락 앞에 섰다.
거대한 몸뚱어리.
비록 테두리가 불분명한 영혼의 상태였지만 그 크기만큼은 거구의 발락과 맞먹었다.
헥터가 말했다.
“신기하군. 나라면 깜짝 놀랐을 텐데 어떻게 그리 평온할 수가 있지?”
“평온한 게 아니라 침착한 것이다. 그리고 네놈은…… 혹시 나와 겨루었던 연금체인가?”
“누가 연금체라는 거야? 나는 내가 연금체라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하지만 네놈은 사람 또한 아니지.”
“끄응, 사람은 맞긴 한데 산 사람도 아니고, 꼴도 이 모양이니 뭐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
“언제부터 날 쫓은 거지? 마법사들의 명령을 받은 건가?”
“명령은 무슨? 그리고 추궁하는 놈치곤 태도가 너무 여유로운데?”
“추격당했다 해도 놈들에겐 의미 없는 짓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이번엔 나 혼자서 살게라에 갈 생각이 아니거든.”
예상대로 발락은 단호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예상대로 움직여 오히려 웃음이 날 정도였다.
“앉지그래? 난 영체라 상관없지만 넌 앉아서 이야기 하는 게 편할 것 아냐?”
“네가 신경 쓸 건 아니다.”
“더럽게 딱딱하네. 뭐든 다 이야기해 줄 테니까 일단 앉아 봐. 나도 앉아서 얘기하는 편이 정서적으로 편해서 그래.”
반쯤은 짜증이 섞인 헥터의 권유에 발락은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발락은 여전히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헥터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누군가의 이름을 물을 땐 자신을 먼저 소개해야 하는 것이 예의다.”
“덩치는 오거만한 게 예의범절은 더럽게 따지네, 진짜……. 내 이름은 헥터다. 마법사들의 연금체 따위가 아니라, 오래 전에 죽은 작은 왕국의 기사였다. 그리고 현재는 모종의 이유로 이 세상에 남아 이러한 상태로 삶을 영위하고 있지.”
헥터의 자기소개에 발락은 그의 대답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리고 이내 곧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흑마법인가?”
“아쉽지만 아니야.”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군.”
“종교적인 힘을 빌렸다고 하지. 그 누구도 피해를 받지 않은 정당한 종교의 힘으로 부활했으니 안심하라고.”
“믿을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증명할 수도 없잖아?”
“……그 말도 일 리가 있군. 그럼 이제 슬슬 너의 용건에 대해 말해 보실까?”
“이놈 보게? 어디서 은근 슬쩍 넘어가려고. 넌 아직 너에 대한 소개를 하지 않았잖아?”
“난 아이니아 제국의 새로운 정의, 발락 더 오니르다.”
“음, 역시 누군지 모르겠군.”
“쯧.”
“시끄러워! 그나저나 네놈, 꽤나 강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아서스 같은 놈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거냐?”
“무슨 뜻이지?”
“난 네가 누군지 몰라. 그런데 오늘 하루 동안 널 지켜본 바로는 너는 고지식할 정도로 법을 준수하고 충의가 넘치는 놈이다. 만약 차가운 피로 정의를 빚어낸다면 네놈이 태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난 그냥 단순히 너의 신념이 궁금할 뿐이다. 네가 모시는 주군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사람이라도 너의 충의가 그대로일지 말이야.”
“내 주군은 멸망한 유라시아 제국의 의지를 잇고 죽은 황제 폐하를 대신해 더러운 마법사 놈들에게 단죄를 내리려 하시는 분이다. 또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대륙의 치안을 위해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미신 아주 고마운 분이시다.”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모시는 주군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깨끗한 사람이다?”
“세상에 완벽한 도덕은 없다. 도덕 또한 인간이 정의를 내린 것이니까. 나는 단지 대륙에 평화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군인으로서 내 한 몸을 희생할 뿐이다.”
“흐음…….”
헥터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놈은 똑똑함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 힘만 센 바보멍청이라고.
‘무식한 놈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더니, 이놈이 딱 그 짝이로구나.’
발락의 말에는 모순이 넘쳤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 녀석은 아서스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것만 같았다.
이에 헥터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흑마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제국에선 이미 흑마술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흑마술은 제국을 좀먹는 벌레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지. 제국을 좀먹는 벌레 같은 것이지. 그런데 네가 모시는 주군이 남들 몰래 흑마술을 사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헤쳐 왔다면 그때는 어쩔 작정이지?”
“난 증명되지 않은 모함을 극도로 혐오한다.”
헥터의 말에 발락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좋은 태도였다.
무엇이 됐든 한쪽 말만 듣고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었으니까.
‘이런 쪽으로는 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자기 가치관이 확실한 사내였다.
그래서 헥터는 더더욱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궁금하지 않나? 내가 보기엔 넌 지금 네가 모시는 주군에게 완전히 속고 있는 것 같은데.”
“웃기는 건 네놈이다. 어디 마법사 놈들의 수하 따위가 나에게 중상모략을 펼치려 하느냐?”
“중상모략이라니, 난 네가 모르는 사실들을 알려 주고 싶을 뿐. 정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것 아니냐?”
“어떻게 확인한다는 말이지?”
“아서스 그놈이 흑마술을 부리고 있다는 증거, 그 증거를 너에게 보여 주마.”
“좋다. 만약 그 사실을 제대로 증명해 낸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 내 주군의 행보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다.”
“좋은 생각이야. 그럼 거래는 끝난 것 같군.”
“무슨 뜻이지?”
“곧 누군가 너를 찾아올 거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넌 내 말을 이해하게 되겠지.”
호기심은 해소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발락이 아서스의 군대를 가지고 살게라를 덮치기 전에 헨리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럼 수고.”
볼일을 마친 헥터가 진한 웃음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더 이상 발락의 뒤를 밟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작자작.
동굴에는 모닥불 태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