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꼬리잡기 (7)
“필요 없어.”
“뭐? 너 방금 뭐라고……!”
“못 들었어? 필요 없다니까?”
전 제국의 기사왕이었던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유라시아 대륙에 몇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킹턴이 칼리번 요새의 정문을 통과해 이셀란을 만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
이셀란과 독대하게 된 킹턴은 준비해 온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셀란에게 늘어놓았다.
그런데 킹턴이 모든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 이셀란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킹턴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이셀란의 일갈이 이어졌다.
“넌 양심도 없냐?”
“뭐?”
“정작 키울 땐 관심이 없더니, 이제 와서 아버지 행세를 하는 건 부끄럽지도 않은 거냐, 네놈은?”
“이셀란!”
쾅!
탁자를 내려치는 킹턴.
킹턴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지만, 실은 분노가 아니다.
이셀란이 킹턴의 낯부끄러운 양심을 짚어 냈기 때문이다.
이에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던 이셀란 또한 얼굴을 살짝 굳히며 대꾸했다.
“얼굴 붉히지 마라, 킹턴. 성깔은 네놈만 있는 게 아니니까.”
“네놈……!”
바할드가 일검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기 전, 그래도 킹턴은 제국 십검 중 이검의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실력만 놓고 본다면 킹턴이 더 우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력이 조금 더 우세할 뿐, 상처 하나 없이 그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셀란 또한 칼리번의 최강자로 정평이 난, 굉장한 실력자였으니까.
게다가 이셀란을 구슬려 로난을 데러러 온 마당에 이셀란과 마찰을 일으킨다면, 로난은 고사하고 칼리번을 통제할 훌륭한 인재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최악이었다.
‘제기랄……!’
그러니 킹턴에게 이셀란은 여러모로 참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이에 킹턴이 화를 삯히며 말했다.
“그럼 로난은 어디에 있지? 온 김에 그 녀석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야겠는데.”
“얼굴은 무슨? 로난이 입대하고 면회는커녕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었던 놈이 얼굴은 봐서 뭣 하게?”
“너, 이 자식이 진짜……!”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그리고 이셀란은 단호했다.
이후에도 킹턴은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들먹이며 어떻게든 로난과 접선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셀란이 철저하게 수비해 준 덕분에 킹턴은 결국 로난의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협상이 결렬되자 킹턴이 부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기 전, 여전히 쌓인 화가 풀리지 않아 문 앞에서 등을 돌린 후 일갈을 내뱉었다.
“네놈!”
“음?”
“당장은 여유가 있어 고개를 빳빳이 쳐들겠지만 조만간 네놈은 이 형편없는 요새와 함께 공멸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봤자 쌀 한 톨도 내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라!”
“공멸은 개뿔, 돌아가서 너희 황제한테 한번 물어봐라. 아서스도 너랑 똑같이 생각할지 말이야.”
“뭐, 뭐라고……?”
“그만. 볼일 끝났으면 이제 그만 나가 보는 게 어때?”
킹턴은 결국 끝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부끄러운 양심만 잔뜩 지적당한 채 귀하디귀한 텔레포트 스크롤만 낭비한 골이 되었다.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기 전까지 킹턴은 이셀란이 왜 저렇게까지 기세등등해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처뿐인 패배였다.
* * *
“……그래서 네놈이 말하고 싶은 건 요새에 보급이 끊겼으니 나더러 그 보급을 지원해 달라?”
“그렇습니다.”
“그런 주제에 내게 충성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습니다.”
“하, 이런 망할 놈들을 봤나……!”
헨리는 약속대로 니첼을 하이랜더 어귀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요새로 복귀할 수 있는 텔레포트 스크롤 한 장과 자신을 불러낼 수 있는 여분의 호출권들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로난과 함께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니첼은 심호흡을 했다.
칼리번 요새를 책임지는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세 치 혀에 요새의 존망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호흡 끝에 생각해 두었던 요구사항들을 아서스에게 읊어 내자 아서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니첼은 침묵을 유지했다.
대신 강건한 눈빛으로 아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아서스는 니첼의 강건한 눈빛을 보자, 그제야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니첼…… 변방에서 마물이나 견제하는 놈이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한 수를 준비해 올 줄이야…….’
니첼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
그것은 칼리번 요새가 요새로써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도록 아이니아 제국에서 안정적인 보급을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이에 아서스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확실히 니첼의 요구는 제법 합리적인 것이었다.
잠깐의 기분 나쁨으로 인해 니첼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정말로 니첼이 마물의 숲 방위를 포기하기라도 한다면, 곧 일어날 전쟁을 앞두고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그곳에 투입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최악이다.’
그렇잖아도 물자와 인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마물의 숲을 견제할 제2의 칼리번을 조직한다는 것은,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는 자신에게 엄청난 출혈이나 다름없었다.
아서스는 짚었던 손을 거두고 다시금 니첼과 눈을 맞추었다.
니첼의 눈빛에는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칼리번을 지휘하던 총사령관이었으니, 충분히 그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을 법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제길.’
입안이 썼다.
니첼의 요구는 삼키고 싶지 않은 쓴 약과도 같았다.
약을 삼키지 않으면 제국의 미래에 병색이 드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몹시 쓰게 느껴질지라도 반드시 삼켜야만 했다.
한참의 장고 끝에 아서스가 대답했다.
“……알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보급 체계는 유라시아 제국 때와 똑같이 해 주겠다. 하지만 풍성한 보급은 기대하지 마라. 지금은 우리 아이니아 제국도 그리 풍요롭지만은 않으니까.”
“예, 폐하.”
“그리고…….”
대화가 끝나는 듯싶었다.
그러나 아서스는 말꼬리를 붙이며 니첼을 잡아 세웠다.
“만약 대륙 전체가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때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니첼.”
이것은 진심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러한 비책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인재라는 증명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니첼이 옅은 눈웃음을 지으며 달콤한 거짓말을 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이윽고 아서스는 멀어져 가는 니첼의 뒷모습을 보았다.
분명히 긍정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비웃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핑계로 니첼을 꾸짖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됐든 현재의 니첼은 자신의 사람이 아니었고, 이해관계에 의거하여 움직이는 국적없는 군인, 즉 용병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니첼이 돌아간 후, 아서스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큰일이군.’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방문한 니첼은 그 우려했던 일들 중 꽤나 심각한 축에 속했다.
‘시간이 촉박해.’
현재의 제국은 제대로 된 정벌 없이 전 제국의 귀족들을 흡수해 세운 나라였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이 아닌 제국에 충성했던 군인들은 아직 제대로 흡수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귀족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닌 국가에 충성했던 것이었으니까.
이는 확실히 큰 문제였다.
제국은 그동안 막대한 수의 제국군을 활용해 칼리번 요새 같은 골칫거리들을 해결해 왔다.
그런데 그런 군인들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으니 군인들이 의무와 책임감을 잃고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군인들을 오랫동안 방관한다면, 어떤 부류는 무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숨어 살겠지만, 최악에는 탈영한 병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구축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존재들은 먹고 살기 위함을 떠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아서스의 백성들을 해칠 것이 분명했다.
바야흐로 군벌의 시대가 도래하는 셈이었다.
아서스가 말했다.
“바츠, 킨리스, 록펠러.”
“예, 폐하.”
“지금 당장 출정을 준비해라.”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출정 준비에 제국 이검의 바츠가 아서스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아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지금 당장 대륙 서남부에 있는 운요의 해구로 떠나겠다.”
“알겠습니다. 즉시 출정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운요의 해구.
그곳은 마물의 숲과 마찬가지로 대륙의 평화를 위해 조직된 특수군.
즉, 삼대사선들 중 하나였다.
‘다른 놈들이 선수를 치기 전에 먼저 모범을 보여야겠어.’
심부름을 보낸 사신들이 돌아오려면 족히 며칠은 더 걸릴 터였다.
그러니 그동안 아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해 두기로 했다.
늦은 판단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칼리번 요새 하나로 족했으니까.
* * *
‘흐아암, 어째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네.’
벌써 반나절째 내리 걷기만 했는데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헥터가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그나저나 저 녀석, 몸에 걸친 것만 해도 꽤 될 텐데 잘도 돌아다니는군.’
전투에 대한 복기는 진즉에 끝냈다.
그리고 명계에서 지루함을 달랬던 노하우들을 발휘해 열심히 시간을 죽여 보았지만 더 이상 그러한 놀이들이 즐겁지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헥터가 다시 인간계로 부활하면서 그러한 놀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명계에서 유용하게 써먹었던 것들이 이곳에선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꺄아아악!”
그때였다.
반나절 만에 들은 사람의 목소리.
이에 헥터의 시선이 목소리가 난 쪽을 향해 옮겨졌다.
‘산적?’
시선이 닿은 곳에는 웬 산적 떼가 민간인을 겁박하고 있었다.
산적의 수는 척 보기에도 서른 명 남짓.
게다가 하나같이 중무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 뭐야? 제국군이잖아?’
제국군이었다.
그것도 멸망한 유라시아 제국의 군인들.
그들은 잘 벼려진 창칼로 피난민 행렬을 겁박하고 있었다.
‘하긴 나라가 멸망했으니 주군을 잃은 군인들이 안 날뛰고 배길까?”
그러나 헥터는 산적이 된 군인, 즉 군벌들을 마냥 나쁘게 보지만은 않았다.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은 이미 대륙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을 터였다. 게다가 아서스는 슬기롭게 대륙을 흡수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나오는 군벌들은 짓이겨진 상처의 진물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쿵! 쿵! 쿵!
‘음?’
군벌들을 바라보던 헥터는 시선을 돌려 다시 발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발락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코뿔소처럼 돌진하기 시작했다.
우적! 우적! 우지끈!
발락은 눈앞에 거슬리는 모든 것들, 이를 테면 나무와 바위 같은 것들을 모두 파괴하며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군벌과 맞부딪쳤을 때 발락은 창칼을 휘두르려는 놈을 향해 자신의 무기를 냅다 던졌다.
콰직!
검은 형벌에 맞은 군벌 한 명의 머리가 고기 반죽처럼 뭉그러졌다.
그리고 피와 고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여자의 비명이 멎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잔해에 동료들 또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발락이 등장했다.
망토가 거적때기가 되었고, 갑옷 군데군데가 마법에 의해 마모되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투구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함이 그러한 것들을 모두 메우고도 남았으니까.
피난민과 군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발락에게로 몰렸다.
척!
발락이 오른손을 들자 군벌의 머리를 짓뭉갰던 검은 형벌이 다시 돌아와 손에 감겼다.
발락은 군벌들의 차림새를 보았다.
유라시아 제국의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런 다음엔 민간인들의 행색을 보았다.
누가 봐도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피난을 택한, 힘없는 피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군벌들의 우두머리였던, 과거에는 소대장직을 맡았던 험브리가 말에서 내려 발락에게 말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 이름은 발락. 아이니아 제국의 기사다.”
“아이니아 제국……!”
제국이 새롭게 건국되었다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험브리를 포함한 그의 부하들은 새로운 제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스로 군벌이 되었다.
이에 발락이 말했다.
“네놈.”
“예, 예!”
험브리는 군인이었다.
그래서 근본 없는 산적들처럼 객기를 부리지 않는다.
그는 숱한 강자들을 보아 왔기 때문에 굳이 칼을 섞지 않아도 상대의 강함을 얼추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우리 모두가 덤빈다 해도 승산이 없다.’
그것이 바로 험브리의 판단이었다.
더군다나 좀 전에 발락이 머리통을 터뜨렸던 녀석은 자신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러니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섣부른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았다.
발락이 이어서 말했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다. 그리고 대답 여하에 따라 판결을 내리겠다.”
꿀꺽.
험브리가 침을 삼켰고 발락이 이어서 말했다.
“네놈, 내 수하가 되어라.”
“……예?”
“도적을 흉내 내는 것은 잠깐의 일탈로 충분하다. 내 수하가 되어 다시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해라. 그렇다면 너는 다시 자랑스러운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다.”
“…….”
생각지도 못한 제안.
그러나 발락은 진심이었다.
저들이 산적 흉내를 내는 것은 모셔야 할 주군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발락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결국 험브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름은?”
“험브리라고 합니다.”
“험브리,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 그러니 너는 지금부터 저 사람들을 안전하게 이동시킨 뒤, 하이랜더의 황궁으로 와 나를 찾아라.”
발락의 명령이 떨어지자 험브리는 예를 갖추었다.
그런 다음 산적의 탈을 벗고 새로운 제국군이 되어 부하들에게 제식을 갖출 것을 명령했다.
“잠깐.”
“예?”
이동하려는 험브리를 발락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발락이 물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지?”
“……저쪽으로 쭉 가시면 앙켈만이 나옵니다.”
“알겠다.”
방향을 안내받은 발락은 가벼운 경례를 받은 후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헥터는 생각했다.
‘미친놈…….’
발락.
그는 신념이 뚜렷한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