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꼬리잡기 (3)
지배자.
그것은 듣기만 해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단어였다.
‘갑’의 위치는 세상 모든 ‘을’들의 로망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벤트는 삶의 대부분을 갑으로 살아왔다.
물론 그 갑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체스에 관해선 절대적인 갑이었지만 공직자의 입장에선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애매한 위치의 갑.
하지만 그럼에도 벤트는 자신의 삶에 대해 꽤나 만족하며 살아왔다.
자신이 굽신거려야 할 사람의 수보다 자신에게 굽신거려야 할 사람의 수가 월등히 많았으니까.
그래서 벤트는 헨리에게 체스로 패배한 이후, 필사적으로 ‘시장’이라는 갑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헨리에게 굽신거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헨리 한 사람에게만 잘 보인다면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게 될 것이었으니까.
벤트는 지배자라는 말에 잠깐 동안 달콤한 꿈을 꾸었다.
자유도시에서 하나의 독립국이 된 비발디 타운의 유일한 지배자.
하지만 벤트는 이내 곧 머리를 털어 냈다.
잠깐 동안 꾸었던 달콤한 꿈속에서 그것이 꿈일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오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벤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이거, 이거…… 역시 교활한 말솜씨를 가지셨군요. 하마터면 당신의 궤변에 속을 뻔했습니다.”
“궤변?”
“그렇습니다. 당신이 한 말들에는 심각한 오류들이 있거든요.”
자신만만하게 오류를 지적하는 벤트.
이에 헨리 또한 여유롭게 지적을 들어 보기로 했다.
“오류라……. 어디 한번 들어나 보지.”
이에 벤트가 말했다.
“먼저 첫 번째, 제국에서 배분해 주던 그 막대한 예산들을 대체 어디서 무슨 수로 끌어 온다는 말입니까?”
“좋아. 첫 번째가 있으면 당연히 두 번째도 있겠군. 일단 계속해서 한번 말해 봐.”
“좋습니다. 그럼 두 번째, 다른 곳의 영지민들이 자유도시로 몰린다고 한들, 징집에 대한 공포에서만 해방될 뿐이지, 비발디 타운이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습니까?”
“나라의 자격을 갖추어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면 당연히 공격을 받겠지.”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도시가 아무리 독립국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한들 예산도 부족한 마당에 외세의 공격에 대비할 국방력은 대체 어떻게 갖춘단 말입니까?”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러나 벤트가 모르는 사실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그저 쿡쿡 하고 웃었다.
“좋은 지적이야. 그럼 오류는 그 두 가지가 전부인가?”
“일단은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좋아, 요컨대 문제는 도시를 운영할 예산과 타국에 대한 방어책의 부재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럼 바꿔서 이야기 하자면 이 두 가지가 해결된다면 너는 그 촌스러운 가운을 벗고 다시 정복을 입게 되겠지?”
“흥, 적어도 피난민들보단 나은 신세일 테니 당연히 그렇겠죠.”
“피난민보다 나은 정도가 아니지. 내가 만약 이 두 가지를 해결해 준다면 너는 비발디 타운의 새로운 왕이 될 텐데.”
“…….”
당연한 말들이 오갔다.
그래서 벤트는 이번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솔직해서 좋군. 그러니 여태껏 나한테 매달린 거겠지.”
“……시끄럽고 본론이나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도대체 당신이 무슨 수로 그 두 가지를 해결해 준다는 겁니까? 그리고…….”
“그리고?”
“당신은 세상을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젊은 나이에 그 아이젠의 가신 자리에 까지 올라갔다고는 하나, 지금 대륙에 불어닥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현실입니다. 당신은 전쟁이 무엇인지는 알기나 합니까?”
벤트는 늙었다.
그리고 헨리의 외견은 젊었다.
아니, 실제로도 생물학적인 나이는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를 지났을 뿐이다.
그렇기에 벤트는 헨리가 전쟁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저 허세에 잔뜩 찌든 헛똑똑이라고 생각했다.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른 법이니까.
그러나 헨리는 꽤나 진중한 벤트의 경고를 대충 흘려들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투정은 그게 전부인가?”
“뭐라고요?”
“지혜의 깊이를 따지는 것에 나이는 무의미한 법이지. 자, 그럼 지금부터 앞서 말한 두 가지에 대한 해결책을 알려 주도록 하겠다.”
이에 헨리는 웃음기를 말끔히 지운 후 벤트가 지적한 두 가지 오류에 대한 해결책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해결책에 대한 설명이 끝났을 때쯤, 벤트는 천천히 벌어지던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헨리에게 그만 목젖을 보이고 말았다.
“그, 그런……!”
“어때?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이 가나?”
간결한 설명이었지만 그 안에 든 것들은 결코 간결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다면 애초에 비발디 타운의 새로운 왕으로 널 내세울 필요가 없잖아?”
“네, 네?”
“내 말이 틀렸나? 어차피 내 명령대로 움직여 줄 말이 필요한데 그 말이 굳이 너일 필요는 없단 얘기지.”
“그, 그건……!”
헨리의 태도가 바뀌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헨리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고 애초부터 쥐뿔도 없었던 벤트는 경솔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
뼈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
그것은 벤트와 마룻바닥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제, 제, 제가 잠시 미쳤나 봅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두 번 다시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헨리는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잘못을 사죄하는 벤트를 보았다.
그러한 벤트를 보니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귀여운 놈.’
그동안 헨리에게 시달렸으니 한 번쯤 이러한 일탈도 당연히 이해가 됐다.
물론 헨리의 말마따나 굳이 벤트를 비발디 타운의 통제자로 계속 둘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만 없을 뿐이지 ‘벤트 시장’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 자체가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벤트 시장.
그는 체스 마스터라는 고귀한 이미지와 더불어 유능한 시장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비발디 타운의 꽤나 신뢰할 만한 인물로 알려졌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벤트를 계속해서 채용할 생각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지도자가 가진 힘들 중에는 때때로 ‘능력’보다 그 사람이 가진 ‘이미지’가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많았으니까.
그러므로 헨리에게 벤트는 꽤나 유용한 인재였다.
어지러운 시국에 비발디 타운이 기습적으로 독립선언을 했을 때 혼란을 겪을 도시민들을 휘어잡을 얼굴 마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머리를 조아리는 벤트에게 물었다.
“난 네가 참 좋아.”
“예, 예……?”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하는 벤트.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체스 마스터라는 고귀한 이미지와는 달리 욕망에 참 솔직하거든.”
“가, 감사합니다! 헨리, 아, 아니 주인님!”
“그래, 그래야지.”
헨리의 긍정적인 반응을 본 벤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은 집 나갔던 개가 다시 집에 돌아와 스스로에게 목줄을 채우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 * *
지형상 두스카인은 하이랜더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테리온은 다른 사신들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아서스에게 보고를 올릴 수 있었다.
아서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테리온이 말했다.
“두스칸이 동맹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잘됐군.”
테리온의 보고에 아서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테리온은 여러 지역에 보낸 사신들 중 가장 빨리 희소식을 가지고 온 자.
그러니 아서스가 당연히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에 아서스는 당연한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초완족이 제의를 단번에 승낙한 건 좀 의외였다.
놈들이라면 분명히 한두 차례 얻어터진 후에 항복할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테리온이 말했다.
“폐하, 그런데 초완족에서 동맹과 전쟁을 승낙하긴 하였으나 몇 가지 사항을 부탁하였습니다.”
“부탁?”
“예, 현재 두스카인에선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계승식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계승식…… 그래, 두스카인도 무슈의 마스터피스처럼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행사가 있었지.”
“그렇습니다. 물론 두스카인 측에선 두스카인의 새로운 지배자가 누가 됐든 간에 폐하께 머리를 조아릴 것을 약속하였으나 계승식을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도록 시간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계승식 중에는 전쟁에 참가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단지 지도자의 참석이 필요한 자리의 호출 정도만 제외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두스카인의 법에 따르면 계승식 중에는 그 누구도 지도자의 자격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참석이 필요한 자리.
예컨대 출정식이라던가 전쟁을 앞두고 벌일 수뇌부 회의 같은 것들을 말했다.
이에 아서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흐음…….”
“대신 전령을 보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면 전쟁이 시작되는 즉시 곧바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또한 계승식과 전쟁이 끝나는 대로 새로운 지배자가 제국에 대한 예를 갖추어 폐하를 알현한다고 하였습니다.”
문제가 될 건 없다.
오히려 테리온의 말대로라면 두스카인은 모든 일에 협력하겠으니 자신들의 전통을 존중해 달라고 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서스는 그러한 전통을 무시할 만큼 매몰찬 지도자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군. 두스카인과 오랫동안 상생하려면 그 정도는 존중해 줘야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좋다. 그럼 테리온, 자네가 앞으로 책임지고 황실의 말을 두스카인에 전할 수 있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보고를 마친 테리온은 머리를 조아린 후 회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허어어…….”
회장을 벗어난 테리온이 뜨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다음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려 냈다.
“잘했어. 어색하지 않게 잘 해냈다고.”
몸속에 심겨진 헨리의 마력 폭탄.
그것을 터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선 헨리가 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했으니까.
덕분에 헨리가 가르친 대로 무사히 보고를 마친 테리온은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기 위해 궁을 나설 준비를 했다.
‘간만에 술이나 한잔해야겠군.’
고된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먹는 술은 그야말로 성수와도 같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남모를 고통을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기에 테리온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잔의 술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웬 낯선 남자가 다리를 절며 시녀들과 함께 이쪽으로 다가왔다.
“음?”
처음 보는 복장이었다.
다리를 절며 이쪽으로 오는 이의 복장은 대륙 특유의 양식이 아닌 처음 보는 양식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옷 전체가 새하얀 것이 마치 함박눈을 입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풍만한 풍채와 더불어 새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조합이 몹시 기이했다.
‘뭐지?’
낯선데 아주 낯설지는 않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억.
그 순간, 기이한 행색을 한 절름발이와 테리온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목례를 하는 절름발이.
이에 테리온이 정중하게 물었다.
“의복 양식이 아주 낯설지는 않은데…… 혹, 어디서 온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남자가 답했다.
“저는 소레국에서 온 우사라고 합니다.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아이니아 제국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소레국!’
테리온은 그제야 저것이 소레국 특유의 의상임을 기억해 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다시 가볍게 목례를 주고받은 후 서로를 지나쳤다.
그리고 우사는 아서스가 있을 황실로 들어섰다.
사라진 우사를 보며 테리온은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소레국은 우리 제국에 붙어먹을 요량인가 보군.’
소레국 또한 아서스가 사신을 보낸 동맹국들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테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됐어. 이 사실을 헨리 그놈에게 알려 주면 좋아하겠지.’
이에 테리온은 뜻밖의 횡재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테리온은 조금이라도 더 헨리의 호감과 신뢰를 쌓아 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좋아, 보고는 우선 여독을 푼 뒤에다.’
뜻밖의 정보를 획득한 테리온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