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꼬리잡기 (2)
“헨리 공!”
번트는 헨리를 다급히 붙잡아 세웠다.
하지만 번트의 만류에 응해 주기엔 살게라에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놓으십시오! 지금 당장 살게라에 가야 합니다!”
“진정하십시오, 헨리 공!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살게라가 위험에 빠졌을지 말입니다!”
“그게 무슨, 아……!”
번트의 날카로운 지적에 헨리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 전, 십검들을 살게라에 데려다주고 왔을 때만 해도 살게라는 멀쩡했다.
인근에 세워진 설탑 또한 내부까지 확인해 보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는 몹시 멀쩡했으니까.
그리고 살게라에서 이곳까지 행군해 왔을 번트의 이동 시간을 따져 보았을 때, 살게라가 멀쩡한 것은 더더욱 의외였다.
‘설마 헥터가?’
헨리는 그제야 번트의 뒤편에 세워 두었던 헥터를 떠올렸다.
시간이 빠듯하다고 습관처럼 읊고 다녀서 그런지 경계를 서고 있는 헥터의 안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번트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리고 그러한 번트의 눈빛을 본 헨리 또한 민망함에 그제야 잠시 고개를 숙였다.
“이거…… 추태를 보였군요.”
흥분을 가라앉힌 헨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헨리가 당황한 까닭은 간단했다.
방패 수문장 번트가 부하들과 함께 검문소를 떠났어야 할 만큼 ‘발락’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이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번트가 말했다.
“발락이 저에게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국의 군인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의무를 질 이유가 사라졌기에 이렇게 헨리 공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킬라이브에 있어야 할 발락이 왜 살게라에 오신 것인지는 혹시 알고 계십니까?”
“오베르를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번트의 입에서 죽은 자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헨리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
아서스가 언젠간 오베르를 찾아 사람을 보낼 것이란 건 헨리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위해 보낸 사람이 다름 아닌 발락이라니?
‘아서스 이놈, 대체 무슨 말로 그 징벌왕을 꼬드긴 거지?’
발락은 유라시아 제국 시절 정의의 상징과도 같은 남자였다.
그는 바할드와 준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지만, 지나치게 편중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을 억제하기 위해 킬라이브라는 그만의 세상을 헨리가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발락 또한 그러한 제국의 배려를 받아들여 킬라이브에 한평생 몸담으며 제국에 봉사한 것이었고.
그런데 그런 남자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다니,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뭐가 됐든 간에 일이 성가시게 됐군. 근데 그 발락이 살게라에 왔다면 분명히 살게라가 한바탕 뒤집어졌어야 할 텐데 어째서 그리 멀쩡할 수 있었던 거지? 설마 부학파장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모든 것들을 머릿속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슨 가설을 세우든 간에 살게라의 안전을 좀 전에 확인하고 왔으니 일단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번트가 말했다.
“어찌 됐든…… 헨리 공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겁쟁이처럼 도망친 저희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번트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가 헨리에게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의무를 짊어져야 할 나라를 잃었다. 또한 제아무리 의리가 소중하다고 한들 부하들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더 중요시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으니까.
이에 헨리는 잠자코 머리 숙인 번트를 바라보았다.
번트는 왜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하는 것일까?
단순히 의리를 저버린 것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것이 부끄러워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그리고 불투명한 생각들이 교차되면서 점점 더 선명한 판단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헨리는 생각했다.
‘번트 이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깜찍한 구석이 있었군.’
그리고 마침내 헨리의 머릿속에 정답이라 생각될 만한 판단이 그려지자 헨리는 번트가 제법 영악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수문장 번트’가 자신과 부하들의 목숨을 위해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발락의 출입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살게라에는 발락의 침입을 알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보통의 경우엔 의리를 지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게라를 떠났으니, 적어도 미안한 마음에 헨리를 찾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번트는 뻔뻔스럽게도 헨리가 사는 곳의 대문을 두드렸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취한 행동이 헨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헨리가 추측한 것들이었다.
헨리는 과거에 번트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한번 확인해 볼까?’
이에 헨리는 한번 번트의 속내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무리 헨리가 번트를 속으로 높이 산다고 한들, 직접 그 알맹이를 확인해 보지 않으면 그것이 과대평가인지 과소평가인지 알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헨리가 물었다.
“소장님.”
“말씀하시지요, 헨리 공.”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살게라에는 소장님이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는 모르셔도 어렴풋이 살게라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도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딱히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있는 살게라의 수비를 포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저를 찾아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직접적인 언급은 하나도 없었지만 양심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이에 번트가 한동안 입을 다무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헨리 공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이 이상의 적절한 대답은 없었다.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방패 수문장 번트.
그는 헨리가 황궁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시절 때부터 알고 있었던 자기 계파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소드 마스터들에 비해 조금 부족한 실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패 수문장’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에는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장의 촉, 늙어서도 어디 안 가는군.’
실제로도 번트는 자신의 촉을 믿고서 마음 편히 살게라를 떠났다.
번트는 헨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가진 특유의 촉이 헨리에 의해 살게라가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촉 덕분에 아무런 사상자도 없이 안전하게 살게라를 수호할 수 있었다.
‘연륜이라는 건가?’
게다가 적절한 뻔뻔스러움까지.
좀 전에는 발락이라는 이름 때문에 조금 당황하였으나 머리가 완전히 식은 지금, 헨리는 이제야 번트를 완전히 이해하고 더 확실하게 반겨 줄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을 마친 헨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소장님께선 최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의리가 밥을 먹여 주진 않으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잘됐네요, 그러잖아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던 차였는데. 소장님, 제국이 멸망한 지금, 혹시 돌아가실 곳이 있으신가요?”
“있었다면 이곳에 오진 않았을 겁니다.”
“그럼 소장님과 그 밑의 두 분을 제 저택의 새로운 경비대원으로 고용하고 싶은데, 소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갈 곳 없는 저희를 받아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시간부로 소장님을 새로운 경비대장으로 임명토록 하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요즘 저택의 물자를 노리는 좀도둑들이 많아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무렴, 몇 년을 북방에서 수문장 노릇을 했는데 그까짓 좀도둑 따위를 막지 못하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텐, 들었지?”
“아, 예에! 그럼 바로 인수인계를 시작하도록 할까요?”
“뭐,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럼 이제 좀도둑 문제는 해결된 셈이로군.”
번트의 심중을 완전히 이해한 헨리는 이이상 질문을 늘어놓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에게 적절한 일자리를 내주고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그럼 이제 거의 해결된 것 같으니 난 슬슬 일어나 볼게.”
“벌써 가시는 겁니까?”
“응, 바쁘거든.”
저택에서의 볼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번트 덕분에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으니 오히려 할일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전에 벤트나 한번 보고 가야겠군.’
헨리는 저택을 나섰다.
* * *
헨리는 시청으로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평복이 아닌 가운을 입고 와인 잔을 든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벤트가 있었다.
“음?”
항상 말끔한 정복을 입고 업무를 보던 벤트였다.
그런 그가 분명한 업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운 차림으로 와인이나 즐기고 있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가 분명했다.
‘돌았거나, 미쳤거나.’
헨리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자 벤트가 헨리를 힐끗 쳐다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어인 일이긴, 당연히 시장인 너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지.”
“저에게 말입니까?”
“그럼 이곳에 너 말고 누가 또 있나?”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
원래대로라면 헨리를 보자마자 허둥지둥하며 성과 보고를 올려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벤트는 마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헨리는 생각했다.
‘이놈 혹시?’
저 초연한 태도.
확실했다.
제국이 멸망한 지금. 더 이상 시장직을 유지하기 위한 체스 마스터로서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벤트가 말했다.
“헨리 공. 아니, 이젠 헨리 님? 아니지 아냐, 사실 이제 당신에게 존대할 필요가 없지 않아졌습니까?”
‘맞네.’
좀 전의 벤트가 한 말로 인해 헨리는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신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더 이상 존대할 필요가 없어졌지. 넌 더 이상 체스 대회 우승 상금에 대해 연연해질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역시 머리가 좋으시니 이해력도 빠르시군요.”
“하지만 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군.”
“무엇을 말씀이시죠?”
벤트는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헨리에게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긴장 속에 쪼들리며 헨리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으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제국이 멸망했으니 네가 시장으로서 져야 할 의무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 도시에는 시장이 필요 없게 됐다는 말인데……. 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벌써 잊어버린 건가?”
“……?”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그 표정에 헨리가 말을 이었다.
“상태를 보아 하니 아직 아서스의 사신이 들르지 않은 모양이로군. 벤트, 잘 들어. 이곳은 원래 왕이 없고 시장이 관리하는 자유도시였다. 그리고 그 시장을 제국이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그 시장이 제국으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도시 운영에 필요한 인력들에게 인건비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그 예산이 끊긴 지금, 도시의 사람들이 너의 통제를 들으려고 할까?”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더 이상 예산이 배분될 일이 없을 테니 저 또한 시장으로서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시장으로서 책임을 져도 되지 않으니 당신이 가져간 체스 대회 우승 상금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도시의 공직자들이 제 통제하에 있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쯧,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서야……. 그 머리로 대체 어떻게 체스 마스터의 자리를 꿰찼는지 의문이네.”
“예?”
“지금 대륙에는 전쟁에 대한 불안함으로 들썩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도시가 아닌 영지령에 속한 사람들은 징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영주의 통제가 없는 자유도시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지.”
“그렇습니다만?”
“그러한 상황에서 누군가 끊임없이 예산을 배분하고 멈출 것 같은 도시를 계속해서 활성화시킨다면?”
“그렇게 된다면야 당연히…… 설마……!”
“그래,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 모양이로군. 왕과 제국의 간섭이 없는 이곳은 제국령도 영지령도 아닌 나라의 요건들을 모두 갖춘 ‘새로운 독립국’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넌 일개 시장에서 독립국을 통치하는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것이고.”
“지, 지배자……!”
헨리가 말을 마칠 때쯤, 벤트의 눈동자에 뜨거운 야욕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