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00화 (200/522)

# 200

꼬리잡기 (1)

“지, 지금 뭐라고 했느냐?”

“로난이 포람의 성을 버렸습니다, 아버님.”

“이, 이, 이 은혜도 모르는 양자 놈이……!”

로난과 이셀란에게 된통 당한 헤밀턴은 두 동강 난 포세이라를 들고 다시 하이랜더로 복귀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낯짝을 푹 숙인 채 자신이 겪은 고초를 킹턴에게 낱낱이 고했다.

헤밀턴의 이야기를 들은 킹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분노와 수치스러움이 한데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낯빛이 변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의자에 주저앉아 화를 달래었다.

‘끄응, 내 설마설마했거늘. 정말로 이렇게 될 줄이야……!’

현 대륙의 상황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아무리 아서스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유라시아 제국을 대부분 집어삼켰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부분’일 뿐, 대륙이 완전히 아서스의 손 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전 유라시아 제국의 유지를 이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상당히 삐걱거리는 상태였다.

예컨대 하루아침에 모셔야 할 주군이 바뀐 군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탈영한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도 대륙 통일을 서두르시려는 거지만.’

내부가 많이 불안할 때 그것을 외부에 들키지 않으려면 외부에 더 큰일을 벌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하면 대부분의 관심이 그쪽으로 몰리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기존 동맹국들의 주종관계에서 유라시아 제국이라는 ‘주’가 사라진 지금, 한시라도 빨리 다시 아이니아 제국이 그 관계를 형성해 놓지 않으면 여러모로 곤란하기도 했다.

매년 받아 오던 조공의 부재에 의해 예산이 부족해진다든가, 더 이상 동맹국이 아니게 되었으니 그들을 경계하기 위한 국방비 지출을 늘려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게다가 아서스는 현재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민심을 휘어잡기 위해 세율을 20%나 낮춘 상태.

물론 전 제국의 국고를 일부 확보해 놓긴 하였으나 황궁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보물이라 부를 법한 것은 거의 건지지 못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삐걱거린다고 해서 킹턴은 현재의 제국이 망할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아이니아 제국은 전 제국을 대부분 흡수해 대륙의 60%를 차지한 거대한 ‘제국’이 되는데 성공했으니까.

‘그나저나 이를 어찌한다? 폐하께선 분명히 잔뜩 기대하고 계실 텐데…….’

새로운 제국 내부에 자신의 사람을 박아 넣는 것은 둘째 치고, 당장 폐하를 실망시키게 되었다는 것부터가 큰 걱정이었다.

킹턴은 이마를 짚었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혼날까 두려움에 떠는 무능한 적자를 보았다.

‘후우…… 한심한 놈.’

킹턴은 두통이 밀려왔다.

로난.

녀석은 확실히 양자들 중에서도 발군에 해당하는……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녀석은 천재였다.

타고난 근골부터 각종 신체적 능력, 그리고 천재와 일반인을 가를 수 있는 종이 한 장 차이의 센스.

학습이 빠른 것은 물론이고 녀석은 평민들 중에서도 보기 드문 금발에 금안을 가진 녀석이었다.

즉, 귀족보다 훨씬 더 귀족스럽게 생겼다는 말.

그런 놈이 검술에까지 재능을 선보였으니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고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킹턴은 로난이 아무리 뛰어나도 양자 이상의 사랑을 주지는 않았다.

녀석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태평성대가 유지되었던 전 제국 시대에선 녀석이 활약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라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아서스가 새로운 황권을 만들었다.

덕분에 혈통만 믿고 깝죽대던 헤밀턴은 킹턴의 피붙이라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쓸모도 없는 무능아가 되어버렸다.

단순히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의 소모품으로 전락시켰던 로난에게 패배하면서 말이다.

‘제기랄……!’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칼리번으로 쳐들어가 로난의 뒷덜미를 잡아끌어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헤밀턴이 말하길, 로난은 이미 이셀란의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그 녀석이 로난을 ‘자신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품기 시작했다면 제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로난을 끌고 나오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킹턴의 머릿속에 묘책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잠깐만…… 칼리번 요새가 아이니아 제국으로 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더 이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보급을 받지 못할 텐데?’

이는 사실이었다.

칼리번 요새는 마물의 숲을 억제하기 위해 조직된 특수군.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지원이 없는 이상, 칼리번 요새가 공중분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리고 이셀란은 책임감이 몹시 강한 남자였다.

즉, 나라를 잃었다고 해서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에 킹턴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아깝긴 하지만 한동안 칼리번 요새에 물자를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로난을 데려오는 수밖에.’

괜찮은 조건이었다.

일단은 협약을 맺고 로난을 데려온 다음, 전쟁통을 핑계로 물자를 보급하지 않으면 될 문제.

뭣하면 군대를 동원해 칼리번 요새를 밀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쯤 되는 인물이 직접 가서 담판을 짓는다면 아무리 로난이 포람의 성을 버렸다 할지라도 양아버지의 자격으로 충분히 구슬릴 만한 명분이 생긴다.

결심을 마친 킹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밀턴! 너는 지금 당장 무슈로 가서 포세이라를 수리해라.”

“예? 그럼 아버님께선……?”

“이대로 로난을 칼리번 따위에 썩힐 순 없다. 뭣하고 있느냐! 당장 움직이지 않고서! 그리고 네놈, 포세이라를 말끔히 수리하기 전까진 집 안에 한 발자국도 들일 생각하지 마라!”

“예, 옛! 알겠습니다!”

아이니아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 기사왕 킹턴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연합국 형성을 마친 헨리는 마탑으로 복귀하기 전에 먼저 살게라에 십검들을 데려다 놓은 후, 비발디 타운에 들러 텐에게 시킨 일들을 살피기로 했다.

“오셨습니까, 대마법사님.”

“어, 별일 없지?”

“말씀하신 대로 가진 재산 대부분을 처분하고 식량과 무기, 생필품 위주로 매입하고 있습니다.”

“시세 변동은?”

“당연히 폭등하고 있습니다. 아주 값싼 것이라도 최소 다섯 배는 올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오를 거야. 매입에 차질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해결해 줄 테니까.”

“예.”

“성벽 증축은 어떻게 되고 있어?”

“대마법사님께서 보내 주신 마법사님들 덕에 이젠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요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검투장은?”

“말씀하신 대로 수수료나 각종 비용을 금화 대신 식량이나 자원으로 바꾸어 두었습니다.”

“잘했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비발디 타운은 전 제국 시절, 모든 자유도시들 중 세금을 가장 많이 내던 곳이었다.

그 말인즉슨,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만큼 그만큼 물자의 교류도 활발해서 앙켈만보다 자원 확보에 훨씬 용이하다는 뜻이다.

헨리는 텐의 저택 한쪽에 가득히 쌓여 있는 물자들을 보았다.

상단, 천만황금이 가지고 있는 막대한 재산들을 대부분 처리하고 전쟁에 대비하여 사다 모은 물자들이었다.

물자 앞에는 헤글러가 조그마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헨리를 본 헤글러가 말했다.

“아, 헨리 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근데 넌 여기서 뭐하고 있냐?”

“아, 그게 요 근래 좀도둑들이 부쩍 늘어서 제가 직접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좀도둑?”

“예, 물자들을 죄다 긁어모으다 보니 아무래도 도시 전역에 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그래? 피해가 얼마나 되는데?”

“크게 본 것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자잘하게 훔쳐 가는 것들까진 어떻게 막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텐. 이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경비병을 고용해도 놈들 태반이 도둑놈들과 한통속인 경우가 허다해서 당최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 쥐새끼들이 머리를 쓴다 이거지?”

애로 사항은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피어난다.

비발디 타운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좀도둑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니.

확실히 시국이 어지러워지면서 치안이 나빠졌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는 부분이었다.

이에 헨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가득히 쌓인 물자들을 보았다.

마음 같아선 아공간 속에 집어넣고 다니고 싶었으나 이 물자들은 상황에 따라서 화폐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텐이 항상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고민이군.’

헨리가 잠깐 동안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작은 주인님.”

“음?”

그때였다.

대문을 지키던 경비병 한 명이 급히 다가와 헨리를 찾았다.

이유인즉슨 처음 보는 행색의 거지들이 헨리를 찾고 있다는 것.

평소였다면 당연히 내쫓았겠지만 귀족도 아닌 평범한 거지가 헨리의 존재를 알리가 없어 이상함에 헨리에게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거지?’

거지라는 말에 헨리 또한 궁금증이 돌았다.

경비병의 말에 의하면 거지는 헨리를 제외하고도 헤글러나 반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북방에서 왔다고 했다.

“일단 한번 보지.”

좀처럼 떠오르는 인물들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경비병과 함께 대문 앞에 선 순간, 헨리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번트 소장님?”

“오오, 헨리 공!”

거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슬란 협곡의 검문소장이자, 방패 수문장이라고 불렸던 ‘번트’였다.

“헨리 님!”

번트에 이어 낯익은 병사 둘이 헨리의 이름을 기쁘게 부르짖었다.

모두 다 행색이 초췌했다.

이들 모두 말 한 필, 텔레포트 스크롤 한 장 없이 부족한 물자들을 가지고 북부에서 비발디 타운까지 행군하여 온 것이었다.

“이,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슬란 협곡을 지키고 있어야 할 이들이 왜 텐의 저택을 찾아온 것일까?

헨리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전, 우선 그들을 안으로 들여 그동안 쌓인 여독부터 풀어 주기로 했다.

한참 뒤, 깨끗한 물에 샤워하고 물집 잡힌 발을 치료한 이들은 음식이 가득 쌓인 식탁 앞에 앉아 미친 듯이 입안으로 음식들을 쑤셔 넣었다.

“으음, 으음! 이거지, 이거! 딱딱한 건량이 아니라, 으음!”

“돌덩이 같은 빵이 아니라 으으음!”

“이 옥수수 스프! 입 안에서 살살 녹아……!”

깨끗한 물로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행군에 대한 여파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헨리는 한동안 이들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식탁의 음식이 대부분 거덜 났다. 번트는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점잖을 떨었다.

“흠흠, 이거…… 배고픈 나머지 말도 안 되는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번트 경께서 이곳에는 어인 일이십니까?”

“어인 일이긴요, 헨리 공께서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설마 살게라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헨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도 그런 것이 아직은 저들에게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살게라에 정기적으로 물자를 보급하는 건 헨리의 역할.

그러니 헨리가 검문소 식구들의 보급만 책임진다면 제국이 멸망하든 말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저들을 살게라의 문지기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검문소 인원들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필시 살게라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이에 번트가 대꾸했다.

“헨리 공, 헨리 공께선 혹시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왜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황궁이 멸망하고 한동안 너무 바쁜 탓에 소장님까지 챙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하긴 헨리 공은 여러모로 바쁜 사람이니까요.”

후루룩.

담담히 말을 마친 번트는 차가운 냉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헨리 공.”

“왜 그러십니까?”

“살게라에는…… 제가 모르는 것들이 가득하지요?”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 겁니까?”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사과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소장님께서 고생하신 걸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으라고 제가 말씀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하게 어색한 기류.

번트는 다시금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어렵게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헨리 공.”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저와 제 부하 놈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임무를 포기하고 슬란 협곡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살게라에 발락이 왔습니다.”

“발락…… 말입니까?”

발락.

분명히 입안에서 익숙하게 감도는 단어인데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순간…….

“설마, 킬라이브의 징벌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런!”

킬라이브의 수장, 징벌왕 발락.

그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 헨리는 식탁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몹시 다급한 얼굴을 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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