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슬란 협곡 (3)
거대한 텔레포트가 발동되고 주위는 침묵을 한 움큼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텔레포트를 사용해 모든 것을 통째로 옮겼다고는 하나 격렬한 마법 포격의 흔적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침묵이 1분 정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안전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하늘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한 것 같지?”
“응, 계산은 정확했어.”
“좌표는 어디였는데?”
“대륙 최남단의 어딘가.”
“대륙의 끝과 끝에 떨어뜨려 놓았군.”
“그 정도는 되어야 최소 열흘은 시간을 벌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의 수는 많았다.
그들은 모두 큼지막한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대다수가 젊어 보였다.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전 마탑의 부학파장들.’
물론 현재는 설탑의 부학파장직을 맡고 있었지만 말이다.
바닥에 착지한 사람들은 여섯 명의 부학파장들이었다.
그들은 순서대로 4대 원소학, 즉 불과 물, 그리고 대지와 바람을 전공하는 네 명의 부학파장들과 이동학파의 두 부학파장들이었다.
화염 속성을 전공한 파이어 마스터, 이그니 람토가 말했다.
“불시에 기습한 것이긴 했지만 내 공격이 완전히 먹히지는 않았어. 그놈, 분명히 발락이었지?”
“응, 삼각뿔이 달린 투구에 그런 무식한 무기를 쓰는 놈은 분명히 징벌왕 그놈밖에 없어.”
“아서스 이 지독한 놈, 우릴 잡으려고 징벌왕까지 보낼 줄이야!”
“근데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알고 보낸 거지?”
“뭐가 됐든 역시 대마법사님은 대단하셔. 설마 7서클 마법 중에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에 관한 마법도 있는 걸까?”
오해는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어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하지만 과정이 어찌 됐든 헨리의 판단은 맞았다.
헨리는 아서스를 대비해 헥터를 살게라의 문지기로 세웠다.
하지만 제아무리 헥터라 할지라도 혹시 모를 변수를 대비하기 위해 부학파장급 인물들에게도 미리 언질해 두었다.
예방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언질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져 살게라를 최악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적어도 열흘은 걸릴 거야. 그사이에 대마법사님을 모셔 와야 해.”
“대마법사님이 지금 어디 계신 줄 알고?”
“듣기로는 소레국에 가신다고 들었어.”
“거긴 그럼 내가 다녀오도록 할게.”
이동을 자처한 것은 이동학파의 이동학 전공 부학파장, 크랩 플릭커였다.
“좋아, 그럼 다른 사람은 협곡 입구로 가서 검문소의 상태를 살피고 나머지는 경계선을 구축해. 그동안 나는 헥터 님의 행방을 찾을 테니까.”
“알겠어.”
“모두 움직여!”
평화로웠던 시절에는 모든 학파가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지적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대마법사가 탄생하면서 이들은 경쟁을 멈추고 집단으로서의 순기능을 완전히 가동하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마법사는 효율성을 따지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이윽고 여섯 명의 부학파장들이 모두 흩어졌다.
물론 아직 설탑에는 아홉 명이나 되는 부학파장들이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고 어린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탑에 남은 비상 인력들이었다.
지도자들이 없는 지금, 그 아랫단계의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파지지직!
번갯불이 일어나듯,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허공을 비집고 나오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명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사방이 눈부신 광휘로 휩싸였을 때, 고요했던 남부의 산맥에는 때아닌 파괴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콰광! 쾅! 콰드득! 콰지지직!
그 안에는 인간 한 명이 있었다.
머리에 삼각뿔을 얹고 전신이 핏빛으로 물든 갑옷을 입은 한 남자가.
그 남자는 자신의 몸을 강타하는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더욱 몸을 웅크렸다.
…….
고요함.
폭풍이 지나갔다.
파괴의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고요함과 더불어 가득했던 푸르른 숲 내음이 황무지처럼 사라진 뒤였다.
부학파장들이 쏘아 낸 마법들이 모든 것들을 지워 버린 탓일까?
황무지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산맥의 동식물들은 끔찍한 소음들이 멈추자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내밀며 동세를 파악했다.
그런데 그 순간…….
콰드득!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황무지 속에서 군데군데 닳아서 못쓰게 된 장갑이 마른 고목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후두둑!
장갑의 손목 쪽에는 팔뚝을 감싸 안는 보호구가 있었고, 보호구 위에는 갑옷이, 갑옷 위에는 흙먼지를 잔뜩 끼얹은 투구가 있었다.
발락이었다.
발락은 무덤 속에서 부활한 좀비처럼 그렇게 천천히 지상으로 몸뚱이를 끄집어냈다.
전신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등에 두르고 있던 검은 망토는 이젠 더 이상 망토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심히 훼손되어 거적때기가 되어 있었다.
“역시 살게라가 맞았어.”
우득, 우득!
발락은 뻐근한 목 관절을 휘휘 저으며 근육을 풀었다.
갑작스러운 마법 포격에 당황했지만 그래도 큰 상처는 없었다.
처음에는 아크 메이지급 마법사들의 기습인 줄 알고 긴장하였으나, 포격을 맞다 보니 자신의 오러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마법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활한 놈들, 대체 날 어디까지 날려 보낸 거지?”
수십 년을 북부에 있다 보니 산천초목이 푸르른 남부는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물론 발락은 이곳이 남부인지조차 몰랐지만 그저 초목이 푸르르니 남부 같구나 하고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발락이 손을 뻗고 외쳤다.
“검은 형벌.”
쿠드득, 쿠드득! 콰드드득!
착!
다행히 검은 형벌도 함께 텔레포트된 모양이었다.
발락이 손을 뻗고 검은 형벌을 부르자 근처에 파묻혀 있던 검은 형벌이 발락의 손으로 돌아왔다.
발락은 형벌을 등에 졌다.
그런 후 동서남북을 가늠해 본 뒤, 사람이 나올 법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살게라에 마법사들이 있음을 황제 폐하에게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황무지로부터 발락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 * *
덜걱.
덜걱, 덜걱.
“역시 안 되겠군.”
캄캄한 지하.
그 속에서 또 다른 이가 존재를 뿜었다.
그의 이름은 헥터.
헥터 또한 발락과 함께 이곳, 황무지가 된 남부 산맥으로 텔레포트되어 옮겨졌다.
“에잉, 쯧!”
영체가 된 헥터는 짜증을 내며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헥터는 발락에게 패배했다.
자신의 결전기인 ‘왕국의 수호자’를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억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영체가 된 이후 완전하게 자신의 힘을 다룰 줄 알았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헥터는 아직 새로운 육체에 대하여 적응을 덜 끝낸 상태.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겪은 패배는 결코 당연한 패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기도 내 것이 아니었고 말이지.”
물론 과거에 사용하던 무기를 다시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미래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그에 어울리는 무기를 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헥터의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위험했어. 하마터면 정말로 소멸될 뻔했으니.’
부활한 직후, 헨리는 헥터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마법에 의한 타격을 조심하라는 것.
영체로 이승에 부활했기 때문에 물리적인 타격은 헥터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마법이나 오러에 의한 타격은 그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부대 단위로 쏟아지는 마법 포격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니 더더욱 주의해야만 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헥터는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은 푸르고 황무지가 된 땅 주위에는 푸른 동식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또한 고도와 주위 지형을 보건데 이곳은 어딘가의 산맥 중턱일 가능성이 컸다.
헥터는 점점 멀어져 가는 발락의 뒤통수를 보았다.
발락의 뒤통수가 보인다고 해서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래 전에 죽었던 과거의 사람보다는 현재까지 살아왔던 발락이 이곳의 지리를 더 잘 알 테니, 녀석을 뒤쫓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군.’
영체가 된 헥터는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런 다음 적정선의 거리를 두고 발락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놈…… 그렇게까지 안 봤는데 제법이란 말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야 할지 모를 여행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체를 하며 대화를 섞을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 보니 헥터는 자연스럽게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고독. 명상. 독백. 외로움.
이 모든 것들은 지난 수십 년간 몸담고 있었던 명계의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곱씹어 온 것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잠깐의 심심함 정도는 헥터에겐 아무것도 아닌 셈.
그래서 헥터는 익숙한 모양새로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선택지로 발락과의 전투를 복기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저 모닝 스타, 아티팩트 같은 것인가? 말하는 검이 있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저절로 귀속되는 무기라니, 형태가 모닝 스타만 아니었다면 내가 다 탐나는 물건이로고.’
익숙한 혼잣말.
그렇게 두 사람의 동행 아닌 동행이 시작되었다.
* * *
제방.
그들은 먼 과거, 동대륙에서 넘어온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든 나라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소레국과 비슷한 문화 양식을 가졌지만 두 나라는 완전히 판이한 문화를 가졌다.
그리고 그들의 수장, 도올.
그는 현재 정문에서 찾아온 정중한 방문자, 헨리와 찻잔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있었다.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는 것은 예감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방이 마지막입니다. 제방만 연합에 합류해 주신다면 전 동맹국들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연합국이 되어 새로운 제국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흐음.”
도올은 생각에 잠겼다.
도올은 눈썹이 희끗하고 머리카락이 없었으며 아흔에 가까운 나이를 가진 노인이었는데도 몹시 정정했다.
그런 그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곧 헨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대마법사님께선 저희에게 무얼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있기야 하지만 이 늙은이가 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망입니다.”
“저는 대마법사입니다. 그래도 말씀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어르신의 바램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라……?”
실처럼 가느다란 도올의 눈꺼풀이 올라가자 그 사이로 희미한 눈동자가 보였다.
탁한 색으로 변한 검은자위.
그는 맹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맹인이라 할지라도 제방을 이끄는 것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는 기능을 다한 두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상대를 본다고 알려졌으니까.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제 바람은 간단합니다. 저는 오래도록 가 보지 못한 저의 고향에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습니다.”
“고향……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현재 이곳 제방에 있는 사람들 중 ‘진짜 동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은 저를 제외하곤 모두가 죽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유라시아 대륙의 사람들이지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졌지만 유라시아 대륙에서 태어났으니 이들의 고향은 유라시아였다.
하지만 도올은 달랐다.
도올은 아흔이 되도록 유라시아 대륙에 살고 있긴 했지만, 아주 먼 과거에 동대륙에서 넘어왔으니 그의 고향은 여전히 동대륙에 있었다.
도올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근 일백 년을 살며 매번 동대륙으로 넘어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그럴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만약 연합에 참여한다면 대마법사님께선 저를 동대륙에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향수병이었다.
그리고 노인이 늘그막에나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소망이기도 했다.
도올은 진심으로 자기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편안히 눈을 감고 싶어 했다.
‘동대륙이라…….’
헨리는 전생에 유라시아 대륙을 정벌하였지만 동대륙에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동대륙이라는 존재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도올이 동대륙으로의 귀환을 조건으로 내걺으로써 동대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헨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도올을 동대륙으로 데려다 주는 것.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본인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좋습니다. 제 스승님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고향 땅을 밟게 해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제방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필요하지 않았다.
도올은 제방의 수장.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제방 최고의 지혜였기 때문에 모두들 그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됐어.’
이로써 제방까지 연합국에 가입하였다.
아직 두스카인에 대해선 확답을 받아 내진 못했지만 그쪽은 이미 테리온을 통해 수를 써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슬슬 시작이군.’
연합국의 완성.
헨리는 드디어 아이니아 제국과 맞설 수 있는 첫 번째 주춧돌을 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