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198화 (198/522)

# 198

슬란 협곡 (2)

“참새……?”

발락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엽고 앙증맞던 참새가 이제는 징그러울 정도로 거대한 흑기사가 되다니?

발락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이내 곧 헥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학학학!”

배를 잡고 웃는 헥터.

육체가 없으니 배가 당길 리는 없겠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인간 시절의 습관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발락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목소리 속에는 자신이 놀림거리로 전락당한 것에 대한 약간의 부끄러움과 화가 뒤섞여 있었다.

이에 헥터가 대꾸했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뭐?”

“번트가 너 같은 놈을 출입시켜 줬을 리가 없을 텐데. 대체 어디로 들어온 게냐, 네놈은?”

헥터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입구를 지키는 검문소장 번트는 황제의 칙서가 없다면 절대로 길을 내줄 사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칙서를 줄 황제는 이미 헨리가 죽였으니 사실상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살게라였다.

이에 발락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번트를 아는 건 둘째 치고 분명히 사람이라고 생각될 법한 게 보이지 않았는데 태연히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당연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발락은 곧 깨달았다.

‘연금체인 모양이로군.’

사람은 아닌데 사람 흉내를 낸다.

게다가 참새를 이용해 자신을 혼란에 빠뜨렸으니 그것이 마법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또한 저 정도의 기운을 내뿜는 연금체라면 필시 고위급 마법사가 만든 창조물일 터.

그리고 현재, 아서스는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을 상대로 척살령을 내린 상태였다.

‘죽으려고 용을 쓰는군.’

발락은 등에 지고 있던 검은 형벌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헥터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크크, 그렇잖아도 심심했는데 마침 잘됐군. 체급도 나랑 비슷한 게 몸 풀기로는 딱이겠어.”

헥터의 말을 들은 발락은 기가 찼다. 하지만 이내 곧 긍정적으로 생각을 고쳤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니 봐줄 필요가 없고 척살령이 떨어진 마법사의 창조물이니 자비는 더더욱 힘을 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검은 형벌을 뽑아 든 발락이 철퇴를 들어 올리며 헥터에게 말했다.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있을 마법사여.”

“응?”

“네놈이 감히 이까짓 연금체로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크나 큰 오산이다.”

“뭐, 뭐? 너 지금 뭐라고…….”

당황하는 헥터.

그러나 발락의 경고는 계속됐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한다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 주실 것이다. 그러니 쓸데없는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해 목숨을 부지해라.”

‘여기에 마법사들이 있다는 걸 저놈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발락의 경고에 헥터는 진심으로 놀랐다.

살게라에 설탑이 있다는 것과 그 설탑 속에 전 제국의 마법사들이 이주했다는 사실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오해가 격돌했다.

그리고 헥터는 다시 한번 헨리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역시 헨리 그놈은 똑똑해. 이렇게 될 줄 알고서 나한테 이런 일을 맡기다니. 역시 대마법사 출신은 달라.”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았다.

헨리가 전 동맹국들을 포섭하느라 바쁜 지금, 십검 못지않게 강력한 헥터를 살게라의 문지기로 둔 까닭은 간단했다.

아직 아서스가 오베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 테니, 언젠가는 그가 다시 오베르를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물론 그 방문자가 킬라이브의 수장, 징벌왕 발락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각자가 이해한 내용은 달라도 그들이 취해야 할 목적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어찌됐든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질문을 던졌던 발락이 다시 물었다.

“대답은?”

“대답은 무슨 놈의 대답, 당연히 거절이지.”

“건방진 연금체로군.”

“건방지긴 네놈이 더 건방지지. 그리고 내 이름은 연금체가 아니라 헥터다. 그러니 똑똑히 기억해 두라고.”

츠즈즈즛!

두 거구가 전신에서 살기를 동반한 오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였다.

휘몰아치는 눈보라조차 그들을 피해 갈 만큼 거대한 에너지들 말이다.

이윽고 검은 형벌에 오러를 모은 발락이 말했다.

“끝까지 황제 폐하의 자비를 무시하는군. 네놈들은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그놈의 황제 폐하는 뒈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황제 폐하 타령이야?”

“역시 반란 종자다운 인성이구나. 내 절대로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얼씨구, 참새랑 짹짹거리던 놈이 똥폼은.”

“죽어라!”

콰아앙!

비난을 주고받던 두 거구가 맹렬하게 격돌했다.

그 모습은 마치 붉은 코뿔소와 검은 물소의 충돌을 연상케 할 만큼 무지막지한 것이었다.

“제법이구나, 네놈!”

“지랄하네, 진짜.”

검은 형벌과 헥터의 검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의 투구 또한 한 뼘도 안 될 거리만큼 좁혀졌다.

발락의 투구 사이로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헥터는 영적인 존재였으므로 붉은 안광만을 번뜩일 뿐, 발락처럼 입김을 내뿜지는 못했다.

‘겨우 이 정도로는 숨도 안 찬다는 것이냐?’

그러나 발락은 오해했다.

그리고 그러한 오해는 발락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다.

콰광! 쾅! 쾅!

발락은 거대한 철퇴를 솜방망이처럼 휘둘렀다.

그리고 발락의 철퇴가 헥터의 검과 맞부딪칠 때마다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났다.

쿠궁! 쿠궁! 쿠궁!

진동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퍼져 나간 진동은 살게라의 설산 전체를 뒤흔들며 눈들을 조금씩 움직이게 했다.

쩌엉!

검은 형벌이 흑기사의 후두부를 가격했다.

그러자 금속 마찰음과 함께 엄청난 크기의 진동이 헥터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러나 찌그러지진 않았다.

전면에 두른 오러 덕분이었다.

하지만 헥터의 오러를 뚫고 몸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헥터가 부활한 이후, 발락이 처음이었다.

‘……이놈이?’

기세가 출중하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닝 스타를 검처럼 휘두르면서도 모닝 스타 특유의 파괴력까지 놓치지 않는 걸 보니 이 녀석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헥터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발락의 등장은 헥터의 부활 이후, 지루하게 이어져 왔던 식객 생활의 새로운 활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좀 더 나를 만족시켜라!’

희열이 전신을 지배했다.

검은 형벌이 자신의 몸을 두드릴 때마다 헥터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생기의 희열을 느낄 때마다 검에 두른 오러의 불꽃이 더더욱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헥터의 영혼에 잠재된 영적인 코어가 헥터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더더욱 달구어졌다.

화르륵!

열기는 거세져만 갔다.

그리고 그 열기가 거세질수록 두 사람이 디딘 주위의 눈발이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의 발밑으로 살게라에선 보기 드문 황토색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은 흙색이 드러나든 말든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서로의 힘을 주고받았다.

‘성가신 놈!’

검은 형벌을 휘두를수록 발락 또한 어렴풋이 깨달아 갔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 무지막지한 흑철 덩어리를 쓰러뜨릴 수 없음을 말이다.

하지만 발락 역시 수십 년을 무기력한 죄인들만 두들기다가 펄떡거리는 활어 같은 죄인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는 헥터와 마찬가지로 발락에게도 새로운 활력이 되어 가슴 한쪽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정도라면 분명히 고위 마법사 놈의 역작이겠지! 하지만 안심하지 마라! 내 반드시 이놈을 박살 내고 네놈을 잡아갈 테니까!’

쾅!

합을 주고받던 발락은 검은 형벌을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렸다.

그런 다음 한두 번 정도 호흡을 고른 후, 모닝 스타를 앞으로 뻗어 오러를 응축시키기 시작했다.

발락이 그의 결전기인 천지분쇄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고오오오!

모닝 스타 끝에 대기가 밀집되었다.

그것을 본 헥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놈은 지금 거대한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에 헥터 또한 뜨거워진 가슴에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

이윽고 헥터의 전신에도 오러와 함께 대기가 밀집되기 시작했다.

부활한 직후 단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던 자신의 결전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설마, 연금체 주제에 결전기를?’

결전기.

소드 마스터들 중에서도 결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자만이 상급 소드 마스터로 구분되었다.

그러므로 결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는 전체 소드 마스터들 중 10%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아무리 잘 만들어진 연금체라 할지라도 한낱 마법사의 피조물 따위가 결전기를 사용하다니?

발락이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씨익.

이에 헥터가 뭘 이런 걸 갖고 놀라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발락의 표정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아니, 흥미롭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 어디 한번 봐 주마! 연금체 따위가 얼마나 인간 흉내를 잘 내는지 말이야!’

쿠구구구구!

양끝에서 대기가 밀집되자 그 사이로 굉장한 울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발락의 손아귀에 오러로 빚어진 거대한 모닝 스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헹! 겨우 그 정도냐!”

이에 헥터의 전신에 오러로 만들어진 거대하고 푸른 갑옷이 씌워졌다.

갑옷의 이름은 ‘왕국의 수호자.’

전생의 헥터가 약소국이었던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하여 만든 헥터만의 비장의 결전기였다.

모든 것을 부수는 철퇴와 모든 것을 지켜 내려는 갑옷.

대기의 밀집이 끝났을 때, 푸르게 빛나는 두 개의 무구가 서슬 퍼런 기운과 함께 격돌하였다.

* * *

살게라의 설산들이 무너져 내렸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설산 위에 가득히 쌓여 있던 눈들이 두 괴물의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협곡에는 때 아닌 눈 더미로 가득 찼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폭설 속에는 천지를 뒤흔들던 두 괴수가 파묻혀 있었다.

…….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게라의 눈보라는 어느새 멈춰 있었고 사위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콰아앙!

협곡 위까지 가득히 쌓여 있던 눈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눈덩이가 떨어지는 동안 그 아래에는 승패가 결정 난 두 마리의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 온전히 서 있는 것은 삼각뿔을 뒤집어쓴 핏빛 기사였다.

그는 코웃음과 함께 바닥에 내려친 검은 형벌을 다시 등에 메었다.

후두두둑!

치솟았던 눈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진 눈발은 두 사람의 위가 아닌 좌우로 흩어져 두 괴수를 빗겨 나갔다.

이 싸움은 발락의 완벽한 승리였다.

“흥, 그래도 꽤나 괜찮은 갑옷이었다. 연금체.”

승자는 패자의 노력을 치하했다.

그것은 오직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발락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처참하게 찌그러진 흑색 고철 덩어리들이 형체를 잃고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헥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투구 속에서 번쩍이던 붉은 안광은 어느새 광원을 잃고 침묵했고, 관절이 제멋대로 꺾인 갑옷들은 패잔병의 시체처럼 덩그러니 나뒹굴었다.

“마법사!”

이에 발락은 파괴된 헥터 앞에서 다시 한 번 마법사들에게 경고를 부르짖었다.

“나는 온 살게라를 뒤져서라도 네놈들을 찾아낼 것이다! 나에게 도망은 소용없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순순히 나와 모습을 드러내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발락의 목소리.

그러나 산새는 조용했다.

산새는 조용했고 그 대신 설산에 부딪힌 발락의 목소리가 조용히 메아리쳐 돌아왔다.

“굳이 끝장을 보고 싶다 이거군.”

오해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발락의 오해는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우우웅!

끝없이 굽이치던 메아리가 잠잠해졌을 무렵, 발락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수십 개의 마법진들을 보았다.

“이런……!”

순식간에 나타난 것들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난 마법진들을 채 회피하기도 전에 수십 개의 마법진은 무수한 양의 마법 포격을 시작했다.

콰광! 콰광! 콰과과광!

우르릉! 콰릉! 콰릉!

우드득! 쩌저적!

누가 어디서 어떻게 쏟아 내는 건지 가히 짐작초자 되지 않을 무수한 마법 포격이었다.

그리고 마법 포격이 진행되는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쏟아지는 마법 포격 틈으로, 발락의 발아래에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력들이 공명을 마쳤을 때 누군가가 다급히 외쳤다.

“텔레포트!”

번쩍!

굉장한 광명이 사위를 덮쳤다.

그리고 광명이 사그라들었을 때, 그 자리에는 쏟아지는 마법 포격을 포함해, 이제 막 승리를 쟁취한 발락까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