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슬란 협곡 (1)
발락은 환한 빛 무리와 함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아이니아의 황궁이 아닌, 눈발이 휘날리는 북방의 살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리는 익숙했다.
여기서 방향을 틀어 걷다 보면 자신의 근무지였던 킬라이브가 나타났으니까.
발락은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을 더듬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슬란 협곡이 나타났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협곡 너머에는 제국이 버린 땅, 살게라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슬란 협곡 입구에 있는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했다.
발락은 다시 걸었다.
그리고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발락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도 없어?’
발락이 기억하기로는 여기에는 두 명의 병사와 한 명의 검문소장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발락이 검문소를 아무리 기웃거려도 병사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발락은 무단 침입임을 알면서도 검문소 안쪽에 위치한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푸하아아아……!”
“커어어어어……!”
“푸르르르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이런…….”
이에 발락은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유라시아 제국의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근무 태만.
그것이 발락이 화가 난 이유였다.
이에 발락은 등에 이고 있던 검은 형벌을 꺼내 들어 사무실 바닥에 거세게 내리쳤다.
콰아앙!
콰지직!
오러는 싣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오러를 싣지 않아도 검문소의 나무 바닥을 부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휘오오오!
오래된 나무 바닥이 부러지며 검문소 사무실 전체에 금이 갔다.
그러자 바닥에서 코를 골고 있던 세 명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야, 무 무슨 일이야?”
“으악! 추워!”
“뭐야, 벼락이라도 떨어진…… 허억!”
잠에서 깨어난 병사들은 그제야 눈앞의 핏빛 기사를 보았다.
꿀꺽.
번트를 제외한 두 병사들은 그 흉흉함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 서슬 퍼런 살기 속에서, 오로지 번트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락과 눈을 맞추었다.
번트가 말했다.
“당신은 킬라이브의 징벌왕이 아닙니까?”
“나를 아는가?”
“지금은 비록 변방의 문지기로 근무하고 있지만 저 또한 황궁에서 근무했던 몸. 그러니 당연히 당신을 알 수밖에요.”
“나는 너를 모른다.”
“굳이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킬라이브에 있어야 할 분이 왜 남의 근무지에 와서 행패입니까?”
과연, 방패 수문장이라고 불렸던 남자였다.
번트 또한 소드 마스터이긴 하나 자신의 실력이 발락에게 한참이나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번트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분노를 흘리는 발락을 응대했다.
이에 발락이 말했다.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살게라로 추방된 죄인, 오베르 크림슨 후작을 데리러 왔다.”
“황제 폐하가 말입니까?”
“그래.”
“그렇다면 칙서를 보여 주십시오.”
“폐하께선 내게 칙서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설령 징벌왕이라 할지라도 들여보내 줄 수 없습니다.”
번트는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그의 임무는 살게라의 입구를 지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칙서가 없는 한 그 누구도 살게라에 발을 들이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발락이 말했다.
“웃기는군.”
“무엇이 말입니까?”
“너는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했다는 것을 아는가?”
“그게 무슨……?”
“황제가 죽었다. 그리고 제국도 함께 멸망했지.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군림하신 아서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다.”
“……!”
간결한 설명.
번트는 그의 설명에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국 멸망 같은 것을 소재로 시답잖은 농담 따위를 하지 않을 인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너의 임무는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미 그 책임을 상실했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제국의 군인도, 무엇도 아니다.”
“…….”
맞는 말이었다.
지켜야 할 나라를 잃은 군인은 더 이상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발락의 지적에 번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자 발락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너는 부하들을 데리고 당장 이곳을 떠나라. 더 이상 이곳에 올 보급은 없을 테니까.”
방식이 거칠었을 뿐, 발락은 꽤나 친절한 사람이었다.
이에 번트가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소장님!”
“조용히 해!”
발락의 말에 번트가 순순히 응하자 곁에서 긴장하고 있던 부하 병사가 소리쳤다.
그러나 번트는 병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병사를 제압했다.
“그럼.”
쿵. 쿵. 쿵……!
볼일을 마친 발락은 짧은 작별 인사와 함께 검문소를 벗어나 슬란 협곡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는 발락을 보며 병사가 말했다.
“소장님, 하지만 이대로 저 녀석을 보내면 분명히 안쪽에서……!”
“조용!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럼 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자를 보내 주신 겁니까?”
“너희들 때문이다.”
“예?”
“저자의 이름은 발락 더 오니르. 전 제국 일검이었던 바할드 경과 쌍벽을 이루는 제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한 명이다.”
“그, 그런……!”
“나 또한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했다. 하지만 내가 노력한다고 한들 모두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쓸데없는 만용을 부려 너희들까지 잃고 싶지 않다.”
“소장님…….”
“그리고 징벌왕의 말대로라면 우린 더 이상 이곳을 지킬 의무가 없다. 모두들 짐을 챙겨라. 짐을 챙기는 즉시 바로 이곳을 떠나도록 한다.”
“그럼 이제 저희도 새로운 제국으로 가는 것입니까?”
“아니, 우린 새로운 제국으로 가지 않는다.”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병사의 물음에 번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번트가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 * *
번트에게 제국이 멸망했음을 알린 발락은 검문소를 지나 슬란 협곡에 들어섰다.
눈발이 더더욱 거세졌다.
하지만 이까짓 눈발 따위,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한 발락에겐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휘오오오!
그러나 날을 잘못 잡은 탓일까?
협곡의 안쪽으로 들어설수록 눈발은 더더욱 거세졌고 결국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거세졌다.
“음……!”
눈보라는 방해가 되지 않았으나 문제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무지막지한 폭설에 있었다.
이에 발락은 이동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곤 등에 이고 있던 검은 형벌을 꺼내 오러를 응축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거센 눈보라의 포효 속에서 그와 비슷한 소리를 가진 새로운 소리가 비집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형벌의 끝에 푸른 광명이 별똥별처럼 잔뜩 응축되었다.
‘천지분쇄!’
콰아아아앙!
발락은 오러를 잔뜩 응축시킨 검은 형벌을 휘둘렀다.
그러자 짧은 파공음이 눈보라를 가르더니 이내 곧 슬란 협곡 전체가 검은 형벌에 의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징벌왕의 주특기는 다름 아닌, ‘파괴’.
자신의 무기인 모닝 스타, 즉 검은 형벌에 맞추어 단련한 파괴에 특화된 주특기였다.
쿠구구구구!
그렇잖아도 폭설 때문에 협곡 위에 상당한 양의 눈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발락이 휘두른 천지분쇄 덕분에 때 아닌 산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엄청난 양의 눈들이 발락을 향해 덮쳐져 내려왔다.
그러나 발락은 제자리를 고수했다.
쿠구구구구!
협곡은 마치 거대한 폭포처럼 끊임없이 눈사태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눈들은 마침내 발락의 무릎이 아닌, 발락의 신장보다 몇 배는 될 법한 높이의 설산을 쌓아 올렸다.
…….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사태가 멎었다.
발락은 여전히 제자리를 고수했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부동자세를 고수하다 보니 몇 미터나 될 법한 눈 더미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콰앙!
눈 속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굉음.
굉음은 곧 설산처럼 쌓인 눈 더미를 무너지게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쌓인 폭설의 중심을 무너지게 해 마치 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동굴을 만들어 냈다.
“됐군.”
그리고 그 안에는 발락이 있었다.
발락은 쌓인 폭설 속에서 다시 한 번 검은 형벌을 휘둘러, 눈보라에 영향을 받지 않게 눈으로 만든 인공 동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츠즈즛.
동굴 내부는 몹시 어두웠다.
하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락은 전신에 오러를 띄워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오러의 푸른빛을 머금은 눈들이 빛을 반사해, 곧 발락의 시야를 밝혀 주었다.
작업을 마친 발락은 검은 형벌을 다시 등에 졌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협곡은 길었다.
발락은 동굴이 끝날 때쯤이면 몇 번이나 다시 눈사태를 일으켜 같은 방식으로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더 이상 산사태를 일으킬 수 없을 때쯤, 발락은 슬란 협곡을 모두 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다 온 건가?’
발락은 동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제는 눈발이 많이 그쳐 있었다.
‘됐군.’
발락은 안심하고 동굴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발락의 눈앞에 세상 가득히 하얀 눈이 쌓인 진짜 ‘살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내를 부탁할 걸 그랬군.’
살게라까지 온 것은 좋았다.
하지만 오베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관계자에게 전해 듣기로는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추방자들이 모여 사는 추방촌이 나온다고 했다.
발락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짹짹.
그 순간,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발락의 어깨 위에 앉았다.
‘참새?’
발락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참새가 발락의 손가락 위에 올라 앉았다.
“이런 곳에 참새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마법 스크롤이라도 한 장 챙겨 올 걸 그랬군.”
아쉬웠다.
커뮤니케이징 마법이 있으면 굳이 안내자가 없어도 참새에게 물었으면 됐을 테니까.
-짹짹?
그러자 참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을 본 발락이 말했다.
“녀석,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이냐?”
그는 죄인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한없이 차가운 남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지켜야 할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남자였다.
그는 제국을 지키는 정의의 수호신이었으니까.
게다가 킬라이브에 수십 년을 거주하면서 참새 같은 평범한 동식물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았다.
그러니 참새에게 불친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발락이 말했다.
“아쉽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만나자꾸나. 지금은 폐하께서 시키신 일을 해야 되서 말이야.”
발락은 작별 인사와 함께 손을 들어 올려 참새를 보내 주었다.
푸드득!
참새가 허공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을 가른 참새가 조그마한 점이 되어 사라지려는 순간.
슈슈슝!
“음?”
참새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시커먼 철 덩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철걱! 철걱! 철그럭!
“……?”
이에 발락은 놀란 눈초리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합체였다.
참새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철 덩이들이 날아와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그리고 그것은 오거만큼 거대한 한 명의 ‘기사’가 되었다.
쿠웅!
기사의 형태를 갖춘 참새가 이윽고 발락 앞으로 떨어지며 육중한 무게를 자랑했다.
갑옷은 어둠처럼 시커먼 흑기사 그 자체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흑기사는 드물게도 자신과 비슷한 신장을 가졌으며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거친 흉흉함을 내뿜고 있었다.
흑기사가 말했다.
“짹짹.”
“……!”
흑기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헥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