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로난 (1)
“저…… 빌턴 님?”
“왜?”
“제국에 저런 깃발을 가진 나라도 있었습니까?”
“무슨 깃발? 어디 한번 보자.”
칼리번 요새의 성문을 지키는 상급 병사 빌턴은 부사수의 망원경을 빼앗아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그곳에는 정말로 부사수의 말대로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깃발이 칼리번을 향해 펄럭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다행히 무리의 수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깃발 앞에 선봉장을 서고 있는 사람은 좀 못생기긴 했지만 척 보기에도 고귀해 보이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가서 소장님 모셔 와.”
“옛!”
이럴 땐 더 높은 직급을 부르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빌턴은 성문의 경비를 총괄하는 허번트를 모셔오기로 했다.
“뭐? 낯선 깃발?”
방 안에서 혼자 체스를 두던 허번트는 낯선 깃발에 대한 보고를 받자마자 체스 판을 뒤엎고 허겁지겁 얼굴을 내비쳤다.
“저게 뭐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깃발인지라…….”
“깃 모양이 삼각형이 아니라 사각형이니 가문의 상징은 아닌 것 같고……. 분명히 나라에서 사용하는 공식 깃 모양이 맞는데?”
국가의 규격대로 제작되어 있어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이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경비대는 허번트의 지시에 따라 금방이라도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경계를 갖추었다.
이윽고 낯선 깃발을 든 무리가 성문 앞에 도착했다.
이에 허번트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신분을 물었다.
“멈춰라! 어디서 누가 보낸 놈들이냐!”
“하, 누가 보낸 놈들이냐고?”
허번트의 물음에 방문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턱을 높이 치켜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내 이름은 헤밀턴 포람! 제국의 기사왕, 킹텀 포람의 아들이다!”
“뭐, 뭣? 킹턴의 아들이라고?”
킹턴 포람.
전 제국의 기사왕이자 전 그랜드 마스터들 중 한 명, 그리고 제국 최고의 무력 단체인 십검들 중 첫 번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일검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친아들이 바로 헤밀턴 포람이다.
“뭐, 뭣들 하고 있느냐! 얼른 문을 열어라!”
이에 허번트가 혼비백산 문을 열고 그를 맞이했다.
* * *
“……그래서,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그렇습니다. 뭣하면 직접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한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다.
그렇다 보니 아직 칼리번 요새에는 소문이 닿지 않고 있었는데 헤밀턴이 처음으로 그 소식을 칼리번에 전한 것이다.
이에 소식을 들은 칼리번의 두 지도자,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 부사령관인 이셀란의 얼굴은 더더욱 구겨졌다.
“나 참, 이거……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하루아침에 제국이 망해?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거짓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그리고 황제를 살해한 범인은 마탑의 마법사들로 추정되며, 그들은 황제를 살해한 직후 황궁 전체를 불태우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인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마법사들이 단체로 반역을 일으키고 사라졌다든가, 아서스가 황제의 유지를 이어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에 이셀란이 말했다.
“그래서? 너는 지금 뭣 때문에 온 건데?”
“너라니요, 이셀란 경! 나라를 잃어 머리가 복잡한 것은 알겠으나 그래도 말씀에 주의해 주십시오!”
연신 반말을 해대는 이셀란에게 헤밀턴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이셀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학학학!”
“왜 웃으시는 겁니까?”
“……지랄하네.”
“예?”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상관이야? 지금 나라를 잃은 군인 앞에서 감히 예의를 따져?”
“예, 예? 이, 이셀란 경,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경 같은 소리하고 있네. 군인이 지켜야 할 나라를 잃어버렸는데 무슨 놈의 경? 진짜 경이라도 치고 싶어? 게다가 난 아서스 밑으로 들어간다고 한 적도 없는데 어디서 이래라저래라야?”
이셀란은 진심으로 살기를 내뿜었다.
이셀란의 무력은 칼리번 요새 내에서도 제일. 경력으로 사령관이 된 이셀란의 상관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존재였다.
유라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이셀란은 유라시아 제국의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 거친 성격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신분을 주었던 나라가 무너졌으니 더 이상 성격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었다.
말인즉슨, 주인 잃은 야생마가 날뛰기 시작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말.
이윽고 이셀란이 몰려오는 편두통에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잠시 뒤, 헤밀턴에게 짜증을 부리며 물었다.
“그래서? 넌 지금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설마 아이니아인가 뭔지 하는 그 밑으로 들어오라고?”
“저, 저…… 그, 그것도 있고, 실은…….”
“아, 빨리빨리 말해!”
“히이익!”
이셀란이 진심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하자 사령관도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에 헤밀턴이 속사포로 대답을 내뱉었다.
“제, 제, 도, 동, 동생, 로, 로난을 데리러 왔습니다!”
“뭐? 로난을? 왜?”
“지, 지금 제국 십검에 자리가 비어서 아버지가 로난을 추천하려고 하십니다…….”
“킹턴 그놈이?”
“예, 예……!”
“하, 누구 맘대로?”
“예?”
“로난은 내 부관이다. 그런 로난을 누구 맘대로 데려가?”
“하, 하지만 아버님과 황제 폐하께서…….”
“야, 그게 네 아버지고 네 황제지, 내 아버지고 내 황제냐? 이것들이 감히 어디서 내 부관을 오라 가라 해?”
“…….”
헤밀턴은 더 이상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상대는 폭주하는 이셀란.
도저히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제기랄…….”
이셀란이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뜩이나 마물의 숲의 동태가 어지러워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러한 시국에 나라가 망한 것도 모자라 쓸 만한 부관까지 데려가겠다고 하니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헤밀턴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이셀란 자신은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도 됐지만 로난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사령관 니첼이 말했다.
“저…… 이셀란. 우리는 그렇다 쳐도 로난은 포람 가의 사람이 맞지 않은가?”
“그래서요?”
“‘그래서요?’는 무슨 ‘그래서요?’야! 가문에서 데려가겠다고 하면 당연히 데려가도록 놔둬야지. 그리고 사실 나라가 무너진 지금, 로난에겐 더 이상 칼리번 요새에서 복무할 의무도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었다.
나라가 무너졌다.
그 말은 요새의 그 누구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마물의 숲은 원래 제국에서 자체적으로 징병하여 겨우겨우 마물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병사들은 너도나도 사선을 벗어나기 위해 탈영하려 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제기랄.’
입 안이 썼다.
문제는 탈영뿐만이 아니다.
이제 물자를 공급해 주던 나라가 무너졌으니, 칼리번 요새 자체를 운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칼리번 요새는 생산이나 자치가 목적이 아닌, 오로지 마물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국의 기관이었으니까.
그렇게 니첼이 이셀란을 어르기 시작하자 이셀란의 눈치를 보고 있던 헤밀턴이 자신의 의견을 슬쩍 다시 피력하기 시작했다.
“흠흠, 어찌됐든 그런 이유로 저는 로난을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잠깐의 침묵.
이윽고 이셀란이 대꾸했다.
“좋아! 남의 집 자식이니 만큼 그 정도 권리야 있지. 하지만!”
꿀꺽.
웬일로 고분고분 답해 주나 싶었다. 그러나 이셀란은 역시나 말끝에 사족을 붙였다.
씨익.
그리고 웃었다.
이셀란이 말했다.
“나라가 망한 판국에 가문이라고 소중할까?”
“예?”
“어이! 밖에 나가서 로난 좀 데리고 와!”
“예!”
호출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헤밀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셀란과 니첼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하지만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로난이 도착해 인사를 올렸다.
“부르셨습니까?”
“어, 그래. 와서 앉아라.”
이셀란이 로난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로난은 눈앞의 헤밀턴을 슬쩍 바라본 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형님.”
“누가 네 형님……! 흠흠, 그래, 간만에 동생 얼굴을 보니 좋구나.”
헤밀턴은 하마터면 가문에 있을 때처럼 행동할 뻔했다.
그러나 헤밀턴은 빠르게 첫말을 얼버무린 후 반가운 미소로 로난을 맞아 주었다.
이에 로난과 헤밀턴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셀란은 생각했다.
‘누가 적자이고 누가 양자인지, 원!’
헤밀턴은 킹턴을 빼닮았다.
그래서 얼굴이 각지고 코가 주먹만 하다.
또한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헤어스타일에 치열도 고르지 않아, 척 보기에도 귀족과는 거리가 멀게 생겼다.
하지만 로난은 새하얀 피부에 금발, 게다가 눈동자까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같은 자는 몇 안 되었는데, 평민 출신인 로난이 그런 귀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셀란은 킹턴에게 외모에 대해선 이죽거리지 않기로 했다.
못생긴 놈에게 못생겼다고 하면 정말로 큰 상처를 받을 테니까.
이셀란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니첼이 말했다.
“로난, 믿기 힘들겠지만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했다고 한다.”
“예……?”
“네가 들은 게 맞아. 그리고 아서스 대공작이 아이니아 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황제가 죽고 황궁이 멸망했다. 범인은 전 제국 마탑의 마법사들로 추정된다고 하더구나.”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나도 처음엔 웬 개소린가 싶었다. 그리고 유라시아 제국의 귀족이었던 놈들 대부분이 아이니아 제국으로 귀화했다. 그중에는 포람 가문도 포함되어 있지. 그리고 넌 포람 가의 사람이니 이 시간 부로 너 또한 아이니아 제국의 사람이다.”
“……!”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국적이 바뀌었다.
이에 로난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확장되자 틈을 엿보고 있던 헤밀턴이 로난에게 말했다.
“그래, 로난! 그리고 황제 폐하께선 지금 너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주시고자 하신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헤밀턴.
그러나 로난의 반응은 밋밋했다.
“입신양명……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새롭게 건국된 제국 십검에 빈 자리가 많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너를 그 자리에 추천하셨지. 로난! 나와 함께 제국 십검이 되어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자꾸나!”
“제국 십검……!”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 열 명에게만 내어지는 열 개의 자리.
그 명예로운 자리에 로난이 추천받은 것이다.
이에 로난은 이셀란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이셀란은 아무런 눈짓도,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셀란의 표정을 본 로난이 말했다.
“싫습니다.”
“그래, 당연히 수락할 거라 생각했…… 뭐라고?”
“저는 제국 십검 같은 자리보다 이곳에서 제 상관인 이셀란 부사령관님을 도와 대륙의 안녕을 보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네놈! 지금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그학학학!”
로난의 대답에 이셀란은 애써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부관 하나는 잘 가르쳤지! 암, 그렇고말고!”
“…….”
헤밀턴은 당연히 로난이 고분고분하게 승낙할 줄로만 알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양자인 로난이 가문 내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방법은 평생 동안 없을 테니까.
“그래, 애송아, 로난이 그렇다는데 이제 어쩔 테냐?”
이셀란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통쾌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얼굴이 시뻘게진 헤밀턴이 부들거리며 대꾸했다.
“이익……! 이럴 순 없습니다! 로난은 저희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네놈! 여태껏 아버님이 키워 주신 그 고귀한 은혜를 갚을지는 못할망정, 이딴 식으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혀?”
“더럽힌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단지 제국 십검의 자리에만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그곳은 저 같은 양자에겐 너무나도 과분한 자리입니다.”
“과분한 줄 알면 당연히 ‘감사합니다.’ 하고……!”
쾅!
이셀란이 책상을 내려치며 중재에 나섰다.
“그만!”
아무리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그조차도 길어지면 꼴 보기 싫은 법이다.
“로난.”
“예, 이셀란 부사령관님.”
“네 대답은 기특하다만, 포람 가가 아이니아 제국으로 귀화했다면 너는 어쩔 수 없는 아이니아 사람이다. 그러니 좋든 싫든 지금의 넌 아이니아 법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래, 당연히 싫겠지. 옛말에도 대백작 자리도 자기가 싫다면 그만이라고 했는데, 고작해야 십검 자리가 무어라고 대수겠느냐?”
“…….”
로난은 말을 아꼈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이셀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로난.”
“예, 부사령관님.”
“나는 유라시아 제국이 무너지면서 지켜야 할 나라를 잃고 모셔야 할 주군을 잃었다.”
“부사령관님…….”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도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구나.”
“어떤…… 제안을 말씀이십니까?”
“로난, 포람의 성을 버려라.”
“예?”
“이셀란 경!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로난. 포람의 성을 버리고 너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되어라.”
이셀란이 생각해 낸 로난이 제국으로 끌려가지 않는 법.
그것은 간단했다.
로난이 포람의 성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