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동맹국 (8)
중립.
그것은 독립을 꾀하는 두스카인과는 조금 다른 측면의 주장이었다.
두스카인은 자신 또한 패권 싸움에 끼어들고 싶어 양쪽의 동맹을 제안했지만, 소레국은 대륙의 패권 싸움에서 빠지고 싶어 양쪽의 동맹을 거부한 것이었다.
헨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중립은 어쩌면 소레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태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국은 대륙의 60%를 쥐고 있고, 헨리는 주변 국가들 전체를 하나로 모아도 30%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단 하나의 국가라도 연합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됐든 헨리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처음에는 과거의 인연을 빌미로 전 태제였던 천강의 마음을 뒤흔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천강과 첫째, 둘째 태자까지 돌림병으로 죽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홍월보다는 좌사와 우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야 헨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릴 터였다.
헨리는 눈동자를 굴려 호랑이를 닮은 좌사와 돼지를 닮은 우사를 보았다.
둘 다 약소국의 문관들이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든 것들은 결코 강대국의 책사들에 뒤지지 않았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어차피 중립을 선언한다고 한들 아서스가 그 제안을 받아 줄 리가 없습니다. 놈은 이미 뱃속이 야욕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중립을 선언해 봤자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안전할지 몰라도 전쟁이 끝나고 대륙이 안정화되고 나면 필시 감추어 두었던 야욕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때는……!”
“그땐 동맹국이 아닌 속국이 되거나 소레국 전체가 와해되어 버릴 텐데, 설마 그때 가서 고개라도 숙이실 작정이십니까?”
헨리는 일부러 자존심을 긁어 놓았다.
상대의 자존심을 긁는 것도 무례한 외교 전략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헨리는 알고 있었다.
좌사와 우사는 소레국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제국의 속국이 될 생각을 말이다.
그래서 헨리는 먼저 자존심을 긁어 사전에 그러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지금이야 어찌됐든 헨리와 소레국은 대등한 입장으로 조건을 조율 중이었으니까.
“끄응……!”
좌사와 우사가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사이에 낀 홍월은 어른들의 대화에 잠자코 눈치만 보았다.
잠깐의 침묵.
이에 헨리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러한 제안은 어떻습니까?”
“무슨 제안 말입니까?”
“만약 저를 믿고 연합국 형성에 도움을 주신다면 모든 전쟁이 끝난 후, 소레국의 완전한 독립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입니까? 그럴 듯한 방안을 제시하셨지만 결국은 같은 말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엄연히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요구하신 대로 소레국은 연합국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지, 제국의 편을 드는 척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희 소레국 더러 첩자 노릇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어차피 첩자 노릇이라고 해도 전쟁이 시작되기 전, 태제님께서 수도에 잠시 동안만 얼굴을 비추고 오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히 제국에선 소레국에게 임무를 내줄 것입니다. 그럼 소레국은 임무를 수행하는 척만 해 주십시오. 연기에 필요한 모든 자원은 저희 연합국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제국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도 연합국을 상대로 실리를 취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레국 국민들의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된다.
또한 만에 하나 전쟁에서 제국이 승리하면 소레국은 공로를 인정받아 최소한 와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레국을 적으로 돌리지 않아도 되고 제국 전략의 한 귀퉁이를 뚫어 낼 수가 있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헨리의 의견을 둘은 좌사와 우사가 오랫동안 고민했다.
솔직히 남는 장사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들의 편의를 봐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고로 대가없는 호의는 의심해 봐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이에 의문 끝에 좌사가 물었다.
“헨리 님.”
“말씀하시지요.”
“이건 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으나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편히 질문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사양 않고 여쭙겠습니다. 흠흠, 상대는 무려 제국입니다. 듣자 하니 기존 동맹국들과 마탑의 마법사들만으로 새로운 제국을 상대한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제국과 맞서려는 것입니까?”
“자신감이라…….”
제법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헨리도 잘 몰랐다.
처형대 위에서 모가지가 달아난 이후, 헨리는 단 한 번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복수에 사무친 지독한 독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독기를 품고 있다고 해도,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헨리는 해냈다.
또한 여태껏 자신이 행하는 일에 실패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일이 잘 안 풀리지 않아도 그건 잠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침없이 나아가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곧 일어날 전쟁 또한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다.
헨리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헨리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실패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웠다면 애초에 겁 때문에 일을 저지르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애들 장난 같은 말.
그러나 좌사는 그런 말을 내뱉는 헨리의 얼굴에서 진심을 보았다.
그것도 자신감으로 가득 찬 확신어린 ‘진심’을 말이다.
물론 헨리는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충분히 좌사를 납득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기운 사람에게 속사정까지 들먹여 가며 굳이 논리적으로 납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어떨 때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진심이 더 강렬한 법이었으니까.
이에 좌사가 우사에게 말했다.
“나는 이에 동의하네만. 우사,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도 동의하네.”
두 대사가 합의했다.
이에 헨리가 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태제님께선 어떠십니까?”
“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대강 이야기가 마무리됐군요.”
어차피 태제는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대사가 눈앞에서 합의한 일이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벌써 절반이 넘는 동맹국이 연합에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니 부디 마지막까지 의를 지켜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소레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의를 중요시 하니까요.”
협의를 마친 헨리는 곧바로 소레국을 빠져나왔다.
그후, 곧바로 제방으로 이동했다.
* * *
살게라에서 텔레포트된 테리온은 다시금 두스카인의 왕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두스카인 근위병들을 포함해 뒤늦게 테리온의 행방을 수색하던 제국의 군사들이 테리온에게로 몰려들었다.
이에 테리온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진정시켰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멋모르는 마법사 놈이 저를 암살하려 하였지만 제가 잘 처리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중에서 헨리를 포함해 전 십검의 얼굴은 아는 사람은 오직 테리온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테리온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식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잘하고 있다. 잘할 수 있다. 아니, 잘 해내야만 한다!’
가까스로 모두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테리온은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동시에 헨리가 자신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던 물컹한 느낌의 흑색구를 떠올렸다.
다시 떠올리니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몸 어딘가에서 눈동자가 되어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다 서늘했다.
그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테리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아서스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한들, 죽음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
‘그래, 내가 있고 충성심이 있는 거지, 충성이 있고 내가 있겠냐?’
테리온은 다시금 굳게 마음을 먹고 20년이 넘도록 두스카인을 통치하고 있는 초완족의 족장을 만났다.
그런 다음 처음에 그가 말했던 답변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럼 두스카인은 정말로 제국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입니까?”
“그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우리 두스카인은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한 이상, 두 번 다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납치당한 사이, 그사이에 마음을 바꿨으면 어떡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테리온이 안도감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폐하께는 그리 전하도록 하지요.”
태도가 저리 확고하니 오히려 테리온에겐 좋을 따름이었다.
이로써 테리온이 두스카인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사실을 아서스에게 전달하는 것뿐.
물론 아서스에게는 헨리가 일러 준 대로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것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 그 짧은 시간 동안 죽기 살기로 헨리의 말을 암기한 것이었으니까.
메카산을 벗어난 테리온은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하이랜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킬라이브에 다녀온 아서스는 궁에 돌아온 이후로도 절대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 척살령을 비롯해 골든 잭슨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 또한 대륙의 패권을 쥐기 위해 부지런히 대륙 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계획으로 이제는 유라시아 제국이 와해되며 동맹의 의무가 없어진 동맹국들에게 사신들을 보냈다.
또한 아서스는 동맹국 이외에도 나라를 잃은 자유도시들과 특수 도시들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수많은 사신들을 파견했다.
‘슬슬 오베르를 데리고 와야겠군.’
파견된 사신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아서스는 인재의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자신의 밑에서 각종 정사를 함께 돌보아 줄 유능하고 똑똑한 신하들의 부재를 말이다.
이에 아서스는 오베르를 떠올렸다.
책략가 오베르.
원래대로라면 알프레드가 오베르를 만나러 간다고 하였으나 거사 이후 아직도 알프레드에게 소식이 없었다.
아니, ‘알프레드’에 대한 소식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제국을 건국한지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그래서 아서스는 소식도 없는 알프레드를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자신이 직접 사람을 보내 오베르를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오베르를 데리고 오기엔…… 그놈이 좋겠군.’
결심을 마친 아서스는 이내 곧 발락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발락 더 오니르.
수십 년 만에 킬라이브에서 돌아온 그가 새로운 주군의 명령을 수행키 위해 아서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아서스가 말했다.
“발락, 그대에게 명을 내리도록 하겠다. 그대는 지금 당장 북방의 살게라로 가서 추방당한 전 대후작, 오베르 크림슨을 데리고 오도록 하라.”
“오베르 크림슨이라면…… 그자는 전 제국에서 추방당한 죄인이 아닙니까?”
“전 제국 시절에 지은 죄다. 그리고 그는 당시, 나에게 더 큰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멋대로 일을 저지르다가 그리 된 것이니 그가 지은 죄가 마냥 악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
아서스는 발락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가볍게 오베르를 변호했다.
아서스가 이번 일에 발락을 택한 까닭은 과연 죄인에게 만큼은 몹시 엄격한 그가 자신의 가치관과 아서스의 충성심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지 궁금해서였다.
발락은 고민했다.
그는 말없이 한참을 서 있더니 이내 곧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대만 믿고 있겠다.”
흡족한 결과였다.
아서스는 그에게 시간의 절약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황궁의 텔레포트 스크롤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얼마의 군사를 더 내주려 하였으나 그는 스크롤만으로도 족하다며 한사코 아서스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텔레포트 스크롤을 받아 든 발락이 떠난 뒤, 아서스가 곁을 지키고 있던 킹턴에게 물었다.
“킹턴.”
“예, 폐하.”
“벌써 제국 십검의 절반이 죽었다.”
“……그것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나는 한시라도 빨리 제국 십검의 빈자리를 채워 넣고 싶다.”
“제가 쓸 만한 검사들을 한 번 수소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수소문할 것도 없다. 그대의 주위에는 혹시 십검에 걸맞은 인재가 없는가?”
“……!”
‘그대의 주위’라는 말에 킹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이것은 곧 자신의 사람으로 십검의 자리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뜻.
그렇게만 된다면 새로운 제국에서 자신의 입지는 더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이에 킹턴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제 자식 놈들 모두가 검무에 출중하옵니다. 혹시 폐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감히 제 자식 놈들을 추천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출신은 상관없다. 단, 이번 십검의 자리는 그대의 혈육이든 누구든 간에 반드시 보증된 실력이어야만 한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킹턴은 고개를 숙여 승천하려는 입꼬리를 옷깃으로 가렸다.
‘됐다!’
이번 기회에 제국 곳곳에 자신의 사람들을 박아 넣을 기회가 온 것이다.
이윽고 킹턴은 자식들을 소집하기 위해 서둘러 황궁을 벗어났다.
부푼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