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동맹국 (4)
“아, 아이라니요?”
헬라의 제안에 놀란 것은 헤라리온이었다.
그러나 헬라는 당황한 헤라리온에게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오롯이 헨리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강한 남자의 씨를 받아 더 강인한 여전사를 키워 내는 것, 아마리스의 여자라면 모두가 꿈꾸는 로망이지.”
아마리스의 여자들은 외부에서 납치해 온 남자와, 혹은 강인한 남자를 직접 찾아가 관계를 맺는다.
그녀들은 온전히 강인한 여전사를 얻기 위해 남자에게 씨를 받아 내는 것이며, 이외에는 철저하게 남자와 살갗을 닿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러한 풍습에는 헬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헨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역시 이번에도 똑같은 걸 요구하는군.’
수십 년 전, 헨리가 이곳과 동맹을 맺을 당시에도 헬라는 골든과의 하룻밤을 조건으로 동맹국 제의를 수락했었다.
그녀에게 골든과 헨리는 아이를 가져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헨리가 아닌 골든을 택했다.
당시의 헨리는 검무를 익히지 않아 골든에 비해 체격이 왜소했고, 그녀는 튼튼한 체격을 원했기에 골든이 선택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에 실패했지.’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골든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임신에 실패했다.
골든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와 하룻밤 사이에 일곱 번의 정사를 나누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불행의 여신이 강림한 것일까?
두 사람은 일곱 번이나 듬뿍 정사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는 것에 실패했다고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항간에는 그녀가 임신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딸이 아닌 아들을 낳아 그냥 죽여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골든과 헨리는 별로 그에 대한 후일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찌됐든 하룻밤의 정사로 아마리스를 손에 넣은 것은 수지맞는 장사였으니까.
이에 헨리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좋습니다.”
“역시 너라면 그렇게 대답해 줄 알았어. 그럼 지금 당장 아이를 만들도록 하지. 그러니 지금 바로 내 침실로…….”
“아뇨, 대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아이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게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난 후에 들어드리겠습니다.”
“뭐?”
“어쩌면 전쟁이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그사이에 만약 여제께서 임신이라도 하신다면 저희 연합국은 여왕님이라는 큰 전력을 잃게 됩니다.”
“흐음…….”
고민하는 여제.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리고 대답이 확실해서 좋아. 하룻밤이 아니라 아이를 만들 때까지라고 했으니 말이야.”
“전쟁이 끝나고 제가 바라던 평화가 찾아오면 아이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좋아, 훌륭한 가치관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헨리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헬라는 몹시 흡족해하며 손뼉을 쳤다.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아 참,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음?”
“차후에 마음이 바뀌셔서 아서스의 편에 서게 되신다면…… 그땐 정말로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배신에 대한 경고였다.
헬라가 아무리 훌륭한 전력이라지만 모든 사항을 물렁하게 맞춰 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연합국의 총사령관은 헨리가 맡을 생각이었기에.
이에 헬라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서스 그 녀석, 일전에 봤는데 맛없게 생겼더라고.”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헨리는 이어서 헬라에게 조그마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호출권이라는 물건인데 종이의 일부분을 찢으면 언제든지 제가 여왕님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심심할 때마다 불러야겠군.”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농담 아닌데?”
호출권 사이로 박력 넘치는 농담들이 오고 갔다.
이윽고 호출권을 건네받은 헬라는 품속에서 조그마한 펜던트 하나를 헨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마리스 왕가의 보물들 중 하나야. 이름은 ‘피의 달’. 내가 연합국에 가입했다는 증표로 너에게 맡겨 두도록 할게. 아마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일 걸?”
“감사합니다, 여왕님.”
그녀가 왕가의 보물을 연합국 가입의 증표로 내줄 줄은 몰랐다.
헨리는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뒤 텔레포트를 사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헬라가 헨리의 엉덩이를 한손으로 콱 쥐고서 말했다.
“헨리라고 했지?”
“……그, 그렇습니다만, 여왕님?”
“이 몸, 전쟁이 끝난 직후엔 내 것이 될 테니 그때까지 간수 잘하도록 해. 만약 내 허락 없이 죽거나 고자가 되어 버린다면 그땐 정말로 내 손에 죽을 테니까.”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달콤 살벌’한 경고였다.
이윽고 헨리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헤라리온을 데리고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이로써 헨리는 다섯 개의 동맹국들 중 샤하트라와 아마리스를 얻어 ‘연합국’의 초석을 다질 수가 있었다.
* * **
“이럴 수가…….”
털썩!
드라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킬라이브의 죄수들을 감시하는 교도관들은 최소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
하지만 드라칸의 촉수는 그런 교도관들의 힘을 비웃기라도 하듯 손쉽게 그들의 오러를 찢어발겼다.
“징벌왕은 어디 있지?”
다시 한 번 아서스가 물었다.
이에 공포에 질린 교도관들이 덜덜 떨며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저런 괴물, 난 들어 본 적도 없다고……!”
최소가 중죄인에 해당하는 최악의 죄수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 킬라이브.
그렇기 때문에 킬라이브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타인에 비해 공포라는 감정에 꽤나 둔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교도관들조차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하아…….”
이에 아서스가 귀찮다는 듯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징벌왕.
그는 수용국을 다스리는 제국 관리자로 킬라이브에선 압도적인 존재로 군림해 수감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서스는 그를 만나야만 했다.
아직 여기까진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이 닿지 않았을 테니, 자신이 직접 그 소식을 전하고 징벌왕을 자신의 부하로 등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써 교도관들을 수십 명 찢어발기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징벌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드라칸.”
“예, 폐하.”
이정도 소란이면 진즉에 나타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징벌왕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아서스는 하는 수 없이 지하 최하층에 있을 징벌왕의 사무실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저 많은 교도관들을 뚫고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때, 묵직한 쇳덩이가 날카로운 파공음을 가르며 드라칸을 덮쳤다.
콰드득!
사정없이 부러지는 드라칸의 촉수들.
이에 아서스가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왔구나!’
아서스는 저것이 징벌왕의 공격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욱한 흙먼지가 걷힐 무렵, 병사들 사이에는 정말로 수용국의 수장, ‘징벌왕’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무슨 일로 이런 소란을 피우시는 겁니까, 아서스 대공작님?”
징벌왕.
그의 진명은 ‘발락 더 오니르’로 흡사 오거를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한 신장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그가 오거만큼 큰 신장을 가졌다고 해서 체격 또한 퉁퉁할 것이라면 큰 오산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신장만 오거만큼 클 뿐, 이외의 것들은 잘 훈련된 기사처럼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발락은 차갑게 식은 피를 연상케 하는 탁한 자줏빛에, 양 어깨에 두 개의 뿔이 돋아난 흉악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또한 그는 십자가 모양의 홈이 파진 커다란 풀 헬름을 착용하고 있었고 위에는 세 개의 뿔이 매섭게 돋아나 있었다.
척.
그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가 드라칸에게 집어던졌던 흑색의 모닝 스타가 움직이더니 이내 곧 발락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을 본 아서스가 물었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주인을 섬긴다는 철퇴인가?”
“그렇습니다. 이 철퇴의 이름은 ‘검은 형벌’. 오직 저만이 다룰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기입니다.”
발락의 말 그대로였다.
그가 다루는 거대한 크기의 모닝 스타는 ‘검은 형벌’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졌는데, 대륙에서 오직 발락만이 저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아무튼 이제 그만 제 질문에 대답해 주셔야겠습니다. 공작님께선 무슨 일로 제 부하들에게 손을 대신 겁니까?”
십자가로 파여진 홈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 눈빛 속에 담긴 저의는 단순한 물음 따위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너를 죄인으로 취급하겠다는 엄중한 경고가 담긴 눈빛이었다.
이에 아서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를 데리러 왔다, 징벌왕 발락.”
“저를 말입니까?”
“그래, 너는 혹시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황제 폐하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
옅게 떨리는 눈동자.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황궁이 멸망하고 제국이 와해되었다. 그래서 난 유라시아 제국의 의지를 이어 ‘아이니아’라는 새로운 제국을 건국했다.”
“대공작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증거로 유라시아 제국에 속해 있던 대부분의 귀족들이 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난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너 같은 충신들을 나의 신하로 등용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
아서스는 교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진실만을 추려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서스의 말이 끝나자 발락은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자리에 서 있었다.
‘당황스럽겠지.’
발락은 공포의 징벌왕이다.
하지만 그의 근본은 형을 집행하고 죄를 다스리는 정의로운 존재.
그리고 그런 정의로운 존재이니 만큼 제국에 대한 충성심도 남다른 몸이었다.
이에 아서스가 목소리를 드높였다.
“발락! 내 사람이 되어라! 내 사람이 되어 내가 세운 나라의 새로운 징벌왕이 되어 더 정의로운 제국이 될 수 있게 나를 도와라!”
아서스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발락은 아서스가 몸소 찾아와 등용할 정도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남자였다.
그의 실력은 죽은 모드레드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정도로 막강한 괴물이었으니까.
이에 발락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정말로 유라시아 제국이 멸망했다면 유라시아 제국에서 잡아들인 킬라이브의 죄수들 또한 그 죄가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여기 있는 죄수 전부를 세상 밖으로 풀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발락! 너에게 새로운 킬라이브를 주겠다. 그리고 구시대의 죄수들은 오늘부로 모두 처형하고, 너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도록 하겠다.”
설득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남은 것은 발락의 선택뿐.
장고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생각을 마친 발락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발락 더 오니르, 새로운 주군을 섬기겠습니다.”
“그래, 나 아서스 하이랜더는 너를 내 제국의 새로운 정의로 등용토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폐하.”
발락 더 오니르.
킬라이브의 잔혹한 징벌왕이 아서스의 편에 서는 순간이었다.
이후, 아서스는 발락에게 부하들을 데리고 하이랜더 지방, 즉 새로운 수도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남은 죄수들은 내가 처리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너는 내가 세운 새로운 제국으로 가 새로운 정의를 준비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제국 정의의 상징이었던 킬라이브가 천천히 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킬라이브를 관장하던 수호자들이 빠져나가자,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쇠창살을 두드리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데려가!”
“이봐! 어딜 가는 거야! 이봐!”
“너 이 빌어먹을 놈들! 야! 이쪽을 보라고!”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교도관까지 킬라이브를 빠져나갔다.
이윽고 킬라이브에는 아서스와 드라칸,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에 아서스가 널찍한 킬라이브의 천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드라칸.”
“예, 폐하.”
“킬라이브에 있는 죄수 전부를 너에게 하사한다. 그러니 너는 내 기대를 절대로 실망시켜선 안 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에 달할지도 모를 거대한 수용국 킬라이브.
드라칸은 아서스 덕분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실험 재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