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동맹국 (3)
“나, 남자?”
“예, 그렇습니다.”
“이, 이 미친놈이! 당장 저놈을 죽여라!”
당혹스러운 물음에 헨리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에 대해 화끈하게 답변했다.
슬겅! 슬겅!
곳곳에서 칼날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헤라리온이 사색이 되어 헨리에게 말했다.
“헤, 헨리 님! 여, 여긴 대체 어딥니까?”
“좀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마리스로 간다고.”
“예에? 하지만 보통은 아마리스의 입구로 텔레포트한 다음에 예를 갖추고 입국하는 것이 보통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헨리가 헤라리온의 물음에 답변하려던 순간, 칼날을 뽑아 든 근위병들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로 달려들어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수 개의 칼날이 두 사람의 몸에 닿으려던 찰나, 헨리가 발을 구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빵!”
휘오오오!
엄청난 풍압.
헨리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엄청난 양의 풍압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이에 헨리에게 칼날을 들이밀던 여검객들이 순식간에 저 멀리 튕겨져 나갔고 그녀들의 눈매는 더더욱 표독스러워졌다.
“그렇게 하면 절차가 복잡해지잖습니까?”
“예에?”
헨리가 도착한 곳은 아마리스의 왕궁 정중앙이었다.
그리고 헨리를 덮친 여검객들은 왕실의 근위병들.
이에 근위병 한 명이 헨리에게 소리쳤다.
“네놈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상대가 마법사임을 깨달은 근위병들은 섣불리 다가서지 않았다.
대신 여제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둥글게 포위진을 그리며 진열을 가다듬었다.
츠즈즛.
근위병 모두가 짙은 푸른빛의 오러를 띄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검사뿐만이 아니라 창잡이와 궁수까지 모습을 드러내 헨리와 헤라리온을 겹겹이 포위해 나갔다.
“헤, 헨리 님?”
서슬 퍼런 살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눈이 내린다.
그렇기에 여자들이 내뿜는 살기는 남자들의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이에 헨리가 헤라리온을 안심시켰다.
“전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대답을 마친 헨리는 헤라리온을 뒤로한 채 앞으로 몇 발자국을 걸어 나갔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 근위병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내 이름은 헨리 모리스, 전 제국 마법사들의 새로운 주인이다.”
“새로운 주인?”
“사정이 있으니 대충 그리 알면 돼. 굳이 직위를 따지자면 새로운 마탑주 정도?”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어쩌긴 뭘 어째? 너희들한테 물음을 보냈는데 답변은커녕 사신도 돌아오고 있지 않으니 내가 직접 찾어온 건데.”
“뭐라고?”
“시치미 뗄 생각하지 마. 어차피 처음부터 답변은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그러니 나는 지금 당장 너희들의 여왕을 만나야겠어.”
“거짓말하지 마라!”
패악을 부리는 근위병.
근위병이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마탑의 주인이란 작자가 이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우리의 땅을 침범한단 말이더냐! 네가 새로운 마탑의 수장이라는 증거를 대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헨리 또한 아마리스의 입국 방식이 다소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헨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뻔뻔하고 당당한 인물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라고?”
“너희들은 이미 내가 보낸 사신을 무례하게 대접하지 않았나? 그렇기에 나는 그에 걸맞게 대접해 주려고 한 것뿐인데?”
“아마리스에 왔으면 아마리스의 법을 따르어야 한다! 남자는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온전한 ‘죄인’!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마탑의 사신이라 할 지라도 ‘제국 황제의 인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우리의 법을 따라야 마땅하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뭐라고?”
“네가 지금 감히 나에게 조건을 내걸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 뭐라고?”
“5분, 지금부터 딱 5분을 주도록 하겠다. 그때까지 너희들의 여왕을 불러오지 않으면 이곳, 아마리스의 절반을 날려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네놈! 네놈은 지금 그따위 말로 우리를 겁박하는 것이더냐!”
“그따위 말?”
수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증명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근위병의 비웃음에 헨리는 제어하고 있던 오러와 마력들을 일시에 해방시켰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진동했다.
7서클에 접어든 헨리의 힘은 이젠 더 이상 일반인은커녕 일개 익스퍼트 유저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경지의 힘이 되었다.
헨리의 전신에 에메랄드 빛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악마의 불꽃처럼.
이에 패악을 부리던 근위병의 전신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무, 무슨 힘이 저렇게……! 이 정도라면 우리 여왕님과 맞먹을, 아,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감이 좋은 근위병들은 진즉에 헨리가 가진 힘의 크기를 가늠했다.
이에 헨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자신 있으면 어디 한 번 끝까지 개겨 봐.”
“이익……!”
근위병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헨리는 좀 전에 했던 말대로 모든 상황을 진즉에 예견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서신을 가진 사신이라 할지라도 그 사신이 남자인 이상 아마리스에선 임시적으로나마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옥쇄라도 챙겨 올 걸 그랬나?’
물론 실버의 옥쇄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추궁으로부터 면책을 받을 수 있었다.
실버의 옥쇄는 제국 제일 권력자의 증명이었으니까.
헨리는 이러한 점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학파장을 사신으로 보냈다.
그녀들이 먼저 무례를 저지르게 한 다음 자신 또한 무례를 저질러도 될 충분한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게다가 이곳의 여자들은 어떻게 하면 마법사를 제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마법사를 사냥하는 법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어느 정도의 수준에나 통용되는 것.
그녀들은 헨리의 힘을 느낀 순간,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냥법이 통하지 않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나를 찾고 있나?”
익숙한 목소리.
헨리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칼과 큰 키, 그리고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를 가진 늘씬한 여인이 화려하지만 노출이 심한 갑옷을 입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헬라!’
헬라 아마리스.
이곳 여전사의 나라, 아마리스를 통치하는 유일한 철혈여제였다.
헨리는 헬라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기선제압을 위해 여전히 힘을 거두지 않고서 그녀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물론 기본적인 예의는 차리고서 말이다.
“반갑습니다, 여왕님. 전 제국 마탑의 새로운 주인,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헨리 모리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솟구쳤다.
이에 헨리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뒷말을 덧붙였다.
“아, 놀라실 만도 합니다. 저는 돌아가신 제 스승님이자 8서클 대마법사이신 헨리 모리스 스승님과 같은 이름이니까요.”
“……그렇군.”
“어떻습니까, 여왕님. 이제 저와 천천히 대화를 나누실 생각이 좀 드십니까?”
무례한 언사임이 분명했다.
절반 정도는 협박을 연상케 하는 물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마리스의 여자들에게 이정도 화법은 무례가 아닌 박력 정도로 구분되었다.
이에 헬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당돌한 놈이네……. 좋아! 간만에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가 나타났으니 그 제안, 기꺼이 응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여왕님.”
스륵!
대화에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헨리는 순식간에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두 사람을 포위하고 있던 근위병들은 그제야 긴장의 끈을 한시름 놓을 수가 있었다.
‘하, 하하……. 이곳이 정말로 여자들만 사는 나라라고?’
긴장의 끈을 놓은 것은 근위병들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헤라리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아마리스는 처음인 데다가 이런 식의 화끈한 통성명은 처음이었기에 아마리스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평범한 관계가 정립되었으니 대접 또한 평범하게 이루어졌다.
헨리와 헤라리온은 곧 여제가 사용하는 고급스러운 응접실에서 차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테이블에 앞에 앉은 헨리가 말했다.
“여왕님,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제 부하의 얼굴을 먼저 좀 보고 싶은데 배려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가서 데려와.”
헬라가 턱짓하자 곧 포승줄에 휘감긴 원소학파장, 더글라스 킨케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 대마법사님!”
더글라스의 얼굴에 반가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는 헨리의 명령대로 아마리스에 사신의 신분으로 왔을 뿐인데 다짜고짜 공격을 받아 꽤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승줄에 묶인 더글라스에게로 향했다.
“고생했다.”
“대마법사님……!”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이만 설탑으로 돌아가 쉬도록.”
말을 마친 헨리는 콜대거를 소환했다.
그런 다음 단검의 칼날에 오러를 씌운 후, 더글라스를 포박하고 있는 포승줄을 손쉽게 끊어냈다.
그러자 근위병을 포함한 헬라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람의 사슬을 저렇게 쉽게 끊는다고?’
람의 사슬.
그것은 아마리스에서만 만들어지는 대마법사용 병기들 중에 하나로 포박된 대상자의 마력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헨리는 과거에 이 람의 사슬 때문에 아마리스를 상대함에 있어 꽤나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파훼법을 알고 있었기에 헨리에겐 그저 한낱 평범한 밧줄에 지나지 않았다.
포박에서 풀려난 더글라스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뒤, 이어서 자신을 끌고 온 근위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근위병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킨케이드.
그의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선했다.
그리고 충분히 독기를 발산한 그는 서둘러 설탑으로 이동마법을 펼쳤다.
이윽고 완전히 대화의 준비를 마친 헨리가 다시금 웃는 낯으로 헬라와 마주 앉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완벽하게 대화할 준비가 되었으니 어디 한번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할까요?”
능글맞고 뻔뻔스러웠다.
헬라는 헨리의 뻔뻔스럽고 당당한 태도에 도리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 하하하!”
“왜 그러십니까?”
“하하하…… 너를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말이야.”
이에 헨리 또한 속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곳은 변한 것이 없었다.
헬라는 여전히 아마리스의 굳건한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가 과거에 습득한 아마리스식 화법은 지금까지도 유용했다.
그렇기에 헨리는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그녀들의 성향에 오히려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만약 헨리의 생각이 맞는다면 그녀는 잠시 후, 반드시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 테니까.
“서신은 읽어 보셨습니까?”
“읽어 보았지. 하지만 서신 속에 담긴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야.”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폐쇄적인 아마리스 특성상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뿐. 제국은 이미 멸망했고 황제 또한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공작이었던 아서스가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는 것까지 말이냐?”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대륙 전역에 제국의 멸망과 황제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제국의 건국 소식이 퍼져 나가긴 했다.
하지만 폐쇄적인 성향의 동맹국들 특성상, 외부인의 출입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막 사신을 파견했을 아서스보다 헨리가 먼저 사신을 파견하였으니 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이에 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전히 믿기진 않지만 너 같은 남자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그리고 참 의외로군. 그 남자가 제자 같은 걸 두었다니. 난 그편이 오히려 믿기지가 않아.”
“스승님 또한 저를 오랫동안 감추셨습니다. 덕분에 제가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죠.”
“그래, 그 남자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나도 조금 슬펐거든.”
헬라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아마리스의 수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자신보다 강한 남자를 좋아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골든 잭슨 에드워드’와 ‘헨리 모리스’는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남자였다.
“서신은 잘 읽었어. 그래, 그럼 네 옆에 있는 남자는 사막의 칸이겠군?”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샤하트라의 통치자인 헤라리온 칸입니다.”
“흐음. 아쉽게도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
“……예?”
“사막의 왕이라기에 조금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생각보다 비실비실해 보여.”
“비, 비실비실……!”
헬라는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실제로도 그녀의 힘은 현재의 헤라리온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강했으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답변도 혹시 생각해 보셨습니까?”
“연합국 제의 말이지?”
“그렇습니다.”
“글쎄, 처음엔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대충 넘기긴 했는데, 서신에 적힌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확실히 심각한 문제이긴 하지.”
“어차피 아서스의 제의를 거절하면 분명히 짓밟으려 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동맹 제의를 수락한다고 해도 표면상으로만 동맹일 뿐, 속국이 되는 바와 다름없지요.”
“그건 유라시아 제국도 마찬가지였잖아?”
“아서스는 다를 겁니다. 예컨대 공물로 요구해 오던 아마리스의 여전사나 특산품들의 양을 배로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나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그리고 싸워 보지도 않고 꼬리를 내리는 건 내 성미도 아니고.”
“그렇단 말씀은?”
“연합국 제의는 받아 주지. 남자들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게 꺼림칙하긴 하지만 나는 보기보다 꽤나 현명한 통치자거든.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것도 바로 너에게 말이지.”
헬라는 헨리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러곤 꼬리가 아홉 개쯤 달린 여우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하시지요. 연합국 제의만 수락해 주신다면 어떠한 제안도 승낙해 드리겠습니다.”
“화끈해서 좋군. 내 조건은 간단해. 너의 아이를 갖고 싶어.”
헬라의 눈빛이 더더욱 요염하게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