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동맹국 (2)
이밖에도 헨리는 자신이 죽은 대마법사의 하나뿐인 제자라는 점과 전 제국의 새로운 마탑주가 되었다는 점 등, 헤라리온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법한 사실들을 모두 말해 주었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헨리 님은. 아니, 이젠 대마법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하하, 전하께서 편한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불안함이 말끔히 해소되었습니다. 헨리 님께서 그 대마법사님의 유일한 제자시라니, 게다가 대륙 유일의 7서클을 이루셨으니 어쩌면 제국놈들과 싸워도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승산이 아닙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전하,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전하께서 이번 연합국의 형성에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말입니까?”
“예, 이미 마탑의 아크 메이지들을 보내 연합국 제의에 대한 서신을 전달하도록 하였으나, 그래도 낯선 아크 메이지들보다는 동맹국들 중 하나인 전하와 함께 권유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긴 싸움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초석을 잘 쌓아야겠지요.”
“그 말씀에도 동감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향수 같은 샤하트라 특산품들을 생산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음? 궐련도 말입니까?”
“흠, 핑크 스왐프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테니 계속 생산하시되 평소처럼 소량만 확보해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무엇을 말입니까?”
“얼마 전에 혹시 몰라 헨리 님께 받은 돈의 대부분을 군량미와 무기를 구매하는데 모두 사용한 참이었거든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이 모든 게 다 위대하신 태양신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명색이 태양신의 아들이신데 아버지께서 잘 보필해 주시는군요. 뛰어난 부성애입니다.”
악재는 없었다.
때마침 조건들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고 헤라리온은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전쟁을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왕비님께선 좀 괜찮으십니까?”
“물론입니다. 헨리 님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도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참 다행이로군요.”
“근데 헥터 님께서 요 며칠 안 보이시는데 혹시 어디로 가셨는지 아십니까?”
“아, 헥터에게는 제가 잠시 다른 일을 좀 맡겨 두었습니다. 지금쯤 살게라에서 맡은 일을 잘 수행해 내고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선…… 어떻게, 검술 실력이 좀 느셨습니까?”
“좋은 스승님을 둬서 전보단 많이 늘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흠,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저와 대련을 한 번 나누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헨리 님과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대륙 유일의 7서클 마법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러를 깨우친 한 명의 검사이기도 합니다.”
“으음, 그럼 한동안 제대로 된 대련을 나누지 못했으니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련 한번 나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윽고 태양빛이 내리쬐는 왕궁 대련장 위에 섰다.
헤라리온이 잡은 것은 보통의 목검.
이에 헨리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허공 속에서 조그마한 목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단검?”
“무례한 행동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이거면 충분합니다.”
일부러 헤라리온을 도발했다.
분노는 그 사람의 힘을 끌어내기에 좋은 촉매제였으니까.
이에 헤라리온의 얼굴이 무안함에 조금 상기되었다.
‘흥분했군.’
그래도 헥터보다는 배려해 줬다고 생각했다.
헥터에게 듣기론 헤라리온은 여태껏 검을 쥔 헥터와 단 한 번도 대련해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참새보단 낫지.’
이에 헨리가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겠습니다. 저는 다쳐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 공격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헤라리온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그것도 헥터에게서 배운 ‘헥터 스텝’으로 말이다.
‘제대로 배웠군.’
그러나 헨리의 눈에는 그의 보법이 마치 손바닥을 보듯 훤히 보였다.
지난 시간 동안 죽을 듯이 연습해 왔던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저 빌어먹을 발재간이었으니까.
제법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헨리는 휘둘린 헤라리온의 목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하며 천천히 그의 검무를 감상했다.
‘속임수도 괜찮고, 불필요한 동작도 적고.’
헥터에게서 배웠으니 헤라리온은 헨리의 후배쯤 된다.
그렇기에 이다음에 헤라리온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올지 정도는 뻔히 보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물론 헤라리온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그러하듯 무언가를 배워서 그 분야에 대해 칭찬받을 때쯤이면 다들 특별한 상상을 하곤 한다.
어쩌면 내가 이 분야에 있어 소질이 있는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제아무리 칸이라 할지라도 헤라리온 또한 그러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련에서 헥터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를 쟁취하진 못했지만, 헥터에게서 어느 정도의 칭찬은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의 회피가 길어질수록 헤라리온의 마음에 조바심이 드러났다.
‘역시 금세 평정심을 잃고 흐트러지는군.’
그리고 헨리가 예상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경험의 부족.
헤라리온은 헨리의 예상대로 경험이 몹시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뛰어난 소질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페이스에 금방 휘말렸다.
이는 실전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자신의 호흡을 올곧게 유지하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관람을 마친 헨리는 이제 그만 평가를 종료하기로 했다.
“전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예?”
퍼억!
헨리는 정중하게 실례를 여쭈었다.
그런 후 여태껏 수비에서도 한번을 사용하지 않았던 목검을 휘둘러 헤라리온의 손목을 가격했다.
바닥에 떨어지는 칸의 목검.
무기를 놓쳤으니 헨리의 승리였다.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련이 종료됐다.
대련을 마친 후 헨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처음보단 실력이 많이 느셨군요.”
“휴……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헨리 님의 옷깃 한 번을 스치지 못했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단순한 경험 부족인 것 같습니다. 전하께선 확실히 선대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검술에 소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유가 생기실 때마다 왕실의 근위병들과 끊임없이 대련을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흠흠, 알겠습니다.”
어차피 패배할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헥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패배하자 패배의 쓴맛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럼 대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슬슬 나갈 채비를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나갈 채비라면, 아까 말씀하셨던 타 동맹국의 설득 말씀이십니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습니다. 지금쯤이면 제가 보낸 사신들의 서신이 전해졌을 터이니 이제 슬슬 직접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련을 나눌 잠깐의 여유는 있었지만 연합국의 제의 같은 큼직한 중대사는 한시라도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클린, 차밍.”
이에 헨리는 마법으로 헤라리온의 땀을 씻겨 주고 그를 단장해 주었다.
“청결과 치장은 모두 해결하였으니 의복만 갈아입고 오시지요.”
“하하, 이것 참……. 마법은 정말 편리하군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전하께서도 마법을 부리는 신하를 휘하에 두실 수 있으실 겁니다.”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는군요. 근데 그건 그렇고 네 곳의 동맹국들 중 어디부터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마리스로 갈 생각입니다.”
“아마리스요? 아마리스라면 분명히 그…….”
“예, 철혈여제가 있는 곳. 여자들의 나라, 아마리스부터 갈 생각입니다.”
아마리스.
왕국 전체가 여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자는 번식할 때를 제외하곤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곳.
헨리는 가장 먼저 아마리스부터 연합에 가입시킬 생각이었다.
‘간만에 강철의 여제를 만나 보겠군. 아직도 여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나?’
아마리스를 통치하는 철혈여제.
그녀가 바로 헨리의 첫 번째 먹잇감이었다.
* * *
수용국 킬라이브.
전 제국 유라시아에선 중범죄 이상의 무거운 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킬라이브’라는 거대한 수용국에 가두는 제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킬라이브는 제국에서 철저하게 관리했으며 제국이 건국된 이후, 단 한 명의 탈주범도 발생하지 않은 대륙 최고의 감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수용국은 차디 찬 대륙 북방의 어느 절벽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뒤로는 까마득한 절벽이, 그 아래로는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또한 수용국 주위로는 몇날 며칠을 걸어도 언 땅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기후 또한 몹시 쌀쌀해 탈 것이 없는 한 도저히 이 일대를 벗어날 수 없는 마의 영역에 속했다.
“여기인가?”
그리고 지금.
주인을 잃은 킬라이브에 아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서스는 드라칸 한 사람만을 데리고 킬라이브를 방문했다.
“충성! 위대하신 대가문주, 아서스 대공작님을 뵙습니다!”
이에 킬라이브의 입구를 지키는 네 명의 병사들이 아서스를 향해 있는 힘껏 경례를 올렸다.
아직 킬라이브에는 아서스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아서스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입구의 경비병에게 무심히 말했다.
“징벌왕을 만나러 왔다.”
“예, 대공작님! 그럼 가져오신 출입 허가증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비병은 규율대로 행동했다.
이곳은 제국의 모든 중죄인들을 관리하는 수용국, 킬라이브.
제아무리 대공작인 아서스라 할지라도 옥쇄가 찍힌 출입 허가증이 없다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바로 킬라이브였다.
이에 아서스의 표정이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그러자 드라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얼음장 같은 드라칸이었지만 아서스 앞에서까지 얼음장은 아니었다.
아서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바로 알아챈 드라칸은 곧바로 킬라이브의 문을 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꾸득, 꾸드득.
“……?”
대답을 마친 드라칸은 등을 굽혔다.
그런 다음 마력을 끌어 올리더니 이내 곧 펑퍼짐한 망토 사이로 기괴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드득!
“무, 무슨!”
드라칸의 망토로부터 날카로운 촉수가 튀어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사의 배를 꿰뚫었다.
“커헉!”
그러자 병사는 단말마와 함께 각혈을 한움큼 토해 내며 저 멀리 내던져졌다.
“고, 공작님!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십니까!”
다른 병사들이 황급히 오러를 두르며 전투태세를 갖추려고 했다.
그러나.
콰득! 콰드득!
그것은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드라칸은 병사들의 오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순식간에 두 개의 촉수를 추가로 뻗어 남은 병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투둑, 툭.
쌓인 눈밭 위로 핏방울들이 떨어졌다.
드라칸은 꿰뚫은 촉수 끝에 병사들의 심장을 뜯어낸 뒤 남은 시체를 저 멀리 내던졌다.
그런 다음 드라칸은 병사들로부터 뽑아낸 심장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으적, 으적.
드라칸의 입이 네 방향으로 펼쳐지며 병사들의 심장을 고기처럼 뜯어먹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드라칸이 말했다.
“그럼 이제 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칸은 병사들의 심장을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그런 다음 입가의 핏물을 닦을 새도 없이 쇠사슬과 도르래로 만들어진 거대한 철문을 향해 촉수를 내뻗었다.
촤르르륵!
엄청난 완력.
도르래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드라칸은 촉수의 순수한 완력만으로 킬라이브의 성문을 개방시켰다.
콰광!
하얀 흙먼지가 나풀거렸다.
그러자 성문 너머에는 킬라이브의 병사들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치워.”
“예, 폐하.”
드라칸의 촉수가 다시 한 번 내뿜어졌다.
* * *
아마리스.
그녀들은 꽤나 오랜 전통을 가졌으며 외간 남자에 의해 대를 잇기 때문에 모두들 ‘아마리스’라는 성을 따 이름을 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에게는 ‘철혈여제’라는 호칭이 주어졌는데, 세간에서는 철혈여제를 ‘스틸 퀸’이라고 부르곤 했다.
헨리는 과거의 통일 전쟁 시절, 당연히 아마리스 또한 거쳐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강했고 대립 끝에 그녀들의 문화를 존중해 속국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들의 왕, 스틸 퀸이 내건 ‘약간의 조건’을 들어준 후에 말이다.
꽈르릉!
그리고 지금.
아마리스 왕궁 정중앙에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이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
당연히 궁정의 모든 이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벼락이 떨어진 자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흙먼지를 나풀거리며 모습을 드러낸 헨리와 헤라리온이 있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헨리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