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끝과 시작 (7)
이따금씩 마모된 부품의 교체는 있어도 영원히 자기 뜻대로 굴러갈 줄로만 알았던 세상이었다.
적어도 폐허가 된 황궁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아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서스는 축복의 전당 드높이 효시되어 있는 황제의 목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고, 공작님?”
“크하하하!”
아서스는 배를 잡고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양 볼이 조금 상기 될 정도였다.
아서스의 웃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광대가 아파서 더는 입꼬리를 올리지 못할 때쯤, 아서스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살짝 굽혔던 허리를 폈다.
“공작님……?”
그런 아서스를, 곁에서 보좌하던 킹턴과 다른 귀족들이 놀란 눈초리로 안절부절했다.
이에 아서스가 말했다.
“……재미있네.”
“예에?”
“재미있어.”
혼잣말을 마친 아서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늘 신선한 공기와 기분 좋은 향기가 전신을 감싸 안아 주던 황궁이다.
그러나 이제는 황량한 폐허와 매캐한 탄내만이 가득했다.
그것은 파괴의 향기였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아서스는 맡아 버리고 말았다.
이 파괴의 향기 속에 감추어진 지독한 악취를, 그리고 그 악취 속에 가려진 조롱 가득한 경고를 말이다.
‘십검들이 그랬을 리는 없고…….’
황궁이 궤멸됐다.
그렇다면 용의자는 자신의 시야에 없던 사람들 중에 있을 것이다.
아서스는 먼저 명을 받고 출동한 네 명의 십검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 그놈들이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
아서스는 그다음으로 알프레드를 떠올렸다.
거사의 첫 방아쇠를 당기기로 한, 자신의 영원한 오른팔.
물론 알프레드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령대를 이끌고 이까짓 황궁쯤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알프레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 알프레드와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내 온 아서스는 알고 있었다.
그놈에겐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배짱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놈뿐이겠군.’
아이젠 쇼난.
중앙귀족 시절, 강력한 무력에 비해 머리가 나빠 단기성 장기말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녀석.
녀석은 결국 삼대가문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만년 백작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녀석은 황제를 이용해 오베르를 제거하더니 이제는 알프레드의 목까지 노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아이젠의 기지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황좌 앞에서 청산유수 같이 오베르의 죄를 비판하던 그 신랄한 모습.
절대로 아이젠의 능력일 리가 없었다.
이에 아서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녀석 이름이 아마…… ‘헨리’였던가?’
대의를 코앞에 두고 있기에 오베르의 죽음이라든가, 아이젠의 성장 같은 자잘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굴리던 톱니바퀴에 주먹만 한 돌멩이를 끼워 넣었으니까.
‘알프레드는 보나 마나 죽었겠군.’
용의자를 그 녀석으로 지목하고 나니 대강의 그림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막바지엔 의아함만이 남았다.
‘하지만 대체 왜?’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아무리 깊게 생각해 봐도 이런 일을 저지를 만한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세?’
출세를 위해서라면 굳이 이런 식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오는 게 더 빠른 길이었을 터.
그러므로 출세를 위해선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복수일까?’
하지만 복수를 이유로 단정 짓기엔 녀석에 대한 사연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사연이야 둘째 치고, 그렇다면 모드레드의 실종도 그놈 짓이겠군.’
오베르의 죽음을 비롯해 베네딕의 도주, 모드레드의 실종, 하물며 알프레드까지.
돌이켜 보니 모든 일들에 부자연스러운 사건들이 하나씩은 꼭 끼어 있었다.
아서스는 곧 생각을 멈추었다.
더 이상의 생각은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굳이 황제의 목을 직접 취할 필요는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관식에 쓸 구시대의 상징을 저리도 친절히 걸어 놓았으니까.
이에 아서스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네요. 대관식이 끝나고 나면 황궁도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고, 공작님…….”
“그래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예요? 저기 친절하게 걸어 놨네요. 그러니 얼른 가서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네, 넵!”
아서스는 여전히 웃었다.
그러나 킹턴은 그의 웃음 속에서 새파란 광기를 보았다.
불꽃은 파란색일 때가 더 뜨거운 법인데 아서스의 광기가 지금 그랬다.
“록펠러.”
“예, 공작님.”
“록펠러 경은 책임지고 황궁 일대를 수색하세요. 만에 하나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다면 생포해서 내 앞에 데려오도록 하고 먼저 출발한 네 명의 십검에 대해서도 흔적을 조사해 보도록 하세요.”
“예, 공작님.”
록펠러 이그덤.
그는 제국 십검 중 사검으로 황궁 제2 기사단의 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아서스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황궁 제2 기사단원들을 데리고 쑥대밭이 된 황궁 수색에 나섰다.
“킹턴, 바츠.”
“예, 공작님.”
“두 사람은 나와 함께 마탑으로 가도록 하죠.”
“예.”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제국을 상징하던 황궁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고, 구시대의 상징이었던 황제의 목은 잿더미 속에 효시되어 걸려 있었다.
아서스는 사라진 네 기사들에 대해선 조금도 분노하지 않았다.
또한 만에 하나 그들이 죽었다고 한들 조금도 슬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역사의 태동 속에서 누군가는 죽을 테고 누군가는 끝까지 살아남아 웃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아서스는 그 웃는 자가 자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탑을 향해 아서스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 * *
“이, 이럴 수가……!”
“……!”
황궁 마탑에 도착한 킹턴과 바츠는 그만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식의 보고라고 불리던 마탑이, 황궁과 마찬가지로 새카만 잿더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킹턴과 바츠는 나직한 신음과 함께 아서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서스는 무표정했다.
마탑이 사라졌다는 말인즉슨, 제국의 모든 마법사들이 함께 사라졌다는 뜻이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서스의 머릿속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마탑까지 없어졌다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서스는 헨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젠의 새 가신이 벌인 짓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재만 남은 마탑의 터를 보고 있자니 새로운 가설들이 머릿속을 파도처럼 헤집어 놓았다.
어쩌면 여태껏 내놓은 추측들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일 수도 있다고.
완전한 독립 세력인 마탑이라면 여태껏 나온 모든 추측들을 뒤엎고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뭐가 됐든 의도가 복수라는 게 확실해졌군.’
마탑의 마법사들은 죽은 대마법사, 헨리 모리스의 열렬한 추종자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반란의 뜻을 알렸을 때, 때맞추어 이 같은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들이 욕심이 많다고 한들 그것은 지적인 욕심이었지, 황좌 같은 권력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서스는 모든 의심을 덮고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짜 맞추기로 했다.
으득!
그 순간, 무표정한 눈빛으로 자신과 마주하던 늙은 너구리, 로어 길리언이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마법사들은 꽤나 성가신 존재다.
하지만 성가실 뿐이지 두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마법사라면 자신 또한 훌륭한 인재를 한 명 데리고 있으니까.
“……모두들 저택으로 복귀하도록 하죠.”
범인의 윤곽이 대충 그려졌다.
그러니 범인의 추적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유라시아 대륙에 발붙이고 있는 한 결국엔 자신에게 목덜미를 내놓게 될 터였다.
이에 아서스는 더 이상 대관식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그까짓 마법이나 부리는 피라미들 따위보다 자신이 열 새 시대의 공표가 더욱 중요했기에.
부욱!
자리에 있던 모두가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 * *
“여긴…….”
게이트 속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로어 길리언이었다.
로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게이트에서 걸어 나와 사위를 둘러보았다.
“마탑?”
황궁의 마탑과 닮은 듯하면서도 훨씬 더 웅장하고 거대한 이곳.
이곳은 다름 아닌 헨리가 증축한 살게라의 설탑이었다.
설탑에 설치된 화이트 게이트는 계속해서 마법사들을 뱉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마법사가 게이트 속을 걸어 나왔을 때, 헨리는 술렁이는 마법사들을 향해 가만히 입술 위로 검지를 갖다 붙여 보였다.
이에 사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모두의 시선이 헨리에게로 몰렸다.
“보는 바와 같이 이곳은 황궁의 마탑을 본떠 만든 나의 상아탑이다. 위치는 대륙 북방인 살게라. 그래서 나는 이 탑의 이름을 설탑이라고 지었다.”
제국의 마법사는 아크 메이지가 되면 자신의 탑을 쌓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하지만 여태껏 그 어떤 아크 메이지도 자신의 탑을 쌓지 않았다.
초대 탑주인 헨리가 죽은 이후, 마법사들은 로어와 학파장들의 주도 하에 각자의 욕심을 채우기 보단 모두가 하나 되어 서로를 지켜 주자는 뜻에서였다.
그러니 설탑은 제국에 세워진 공식적인 두 번째 마탑이었다.
“황궁의 마탑과 똑같이 본 떠 만들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크기는 더 확장하였으니 모두들 이곳에 잘 적응하길 바란다.”
갑자기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란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마냥 투정 부릴 수 없음을 마법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으니까.
이어서 헨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 후 로어와 학파장들에게 말했다.
“그럼 아크 메이지급 마법사들은 잠시 나 좀 볼까?”
“예, 대마법사님!”
죽은 대마법사의 유지를 이은 새로운 대마법사가 탄생했다.
헨리는 이들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으니만큼 마법사라는 전력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비밀의 일부를 알려 주어야겠지.’
헨리는 현재 무너진 제국에 불어닥치고 있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감춰진 비밀에 대해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자세히 알아야 적이 무슨 수를 써도 모두 승리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 같은 비밀을 알려 주기 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말이다.
이어서 헨리와 아크 메이지들은 설탑의 최상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 * *
마탑과 똑 닮은 구조의 설탑의 최상층.
그 구조가 너무 비슷하고 익숙하여 도리어 어색한 느낌까지 들었다.
딱!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이곳에 원탁을 소환했다.
“다들 앉지.”
원탁에는 총 일곱 명의 아크 메이지들이 앉았다.
원탁에는 순서대로 이제는 부탑주가 된 2대 마탑주, 로어 길리언.
로어가 부탑주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탑주의 자리를 잃게 된 2대 마법학교장, 스탠 하디라디.
원소학파의 수장, 더글라스 킨케이드.
생물학파의 수장, 아가스 드루이드.
이동학파의 수장, 링키 블락.
연금학파의 수장, 메이커 스워스.
자유학파의 수장, 정키 루비스.
마지막으로 새로운 차기 탑주가 된 헨리 모리스까지.
헨리를 포함하면 총 여덟 명의 마법사들이 원탁에 둘러앉은 셈이었다.
헨리는 우선 그윽한 눈길로 원탁에 둘러앉은 학파장들의 얼굴들을 살펴보았다.
모두들 반가운 얼굴들이다.
그동안 학파장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모두들 각 학파의 수장들답게 내분 없이 각자의 학파를 잘 이끌었다는 이야기였다.
모두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헨리가 말했다.
“우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그래도 다들 마탑에서 한 목소리 하는 마법사들일 텐데, 갑자기 나타난 새파랗게 어린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잘 들어주고 있잖아.”
“돌아가신 대마법사님의 유일한 제자임이 확인되었고,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경지로의 도달을 직접 보여 주셨으니 더 이상 무슨 사족이 필요하겠습니까?”
로어가 학파장들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그리고 학파장들 또한 모두들 수긍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 그럼 나도 너희들이 날 믿고 따라와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해. 이를 테면 7서클로의 증진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말이야.”
“……!”
비교적 담담한 말소리 속에는 전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자리에 있는 모든 학파장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했다.
“왜들 그렇게 놀라?”
재미있는 반응들이었다.
물론 헨리는 애초에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고 던진 말이다.
“내 스승님께선 인류 최초로 8서클에 도달하셨지. 하지만 나라고 8서클에 도달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미 8서클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어.”
“허, 허어억……!”
털썩!
이어지는 헨리의 파격적인 발언.
그리고 그 파격적인 발언에 숨이 멎은 이는 다름 아닌 평소 심장이 약했던 연금학파의 수장, 메이커 스워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