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끝과 시작 (6)
“위즈덤.”
지이잉!
위즈덤은 세상의 지혜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가 세상의 지혜에 지어 준 일종의 애칭이기도 했다.
세상의 지혜는 살아생전 헨리가 가장 아끼던 물건 중에 하나였으니까.
헨리가 애칭으로 세상의 지혜를 부르자, 엘프목으로 이루어진 위즈덤이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지팡이의 가장 아랫부분에서부터 두 개의 초록 잎줄기가 뱀처럼 지팡이를 타고 올라와 위즈덤의 몸체를 감싸 안았다.
위즈덤이 헨리에게 표하는 일종의 반가움의 표시였다.
위즈덤의 크기는 헨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래서 헨리는 위즈덤을 더 좋아했다.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지혜의 나무, ‘위그드라실’처럼 든든한 존재가 되어 주는 것 같아서였다.
“맙소사……!”
헨리가 능숙하게 위즈덤을 다뤄 내자 그것을 본 로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또다시 감탄했다.
전생에 헨리가 사형당한 직후,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은 죽은 헨리의 유산을 찾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위즈덤은 헨리가 남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헨리의 유산이라고 부를 법한 것들을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위즈덤의 존재는 그야말로 기적, 그 자체였다.
헨리는 완전히 해방된 위즈덤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풍부한 자신의 마력을 느꼈다.
진하고 방대한, 마치 따뜻한 바다를 연상케 하는 마력들.
전생에 자신이 저장시켜 둔 마력이 틀림없었다.
이윽고 헨리는 위즈덤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마를 붙였다.
그러자 위즈덤에 흐르는 푸른색 마력들이 헨리의 이마를 통해 천천히 흡수되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마력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따뜻한 기운이 뿜어졌다.
덕분에 최상층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한때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위즈덤을 갖는 자가 새로운 마탑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래, 이 느낌이야!’
미라클 블루나 블랙 티어 따위로 억지로 마력을 팽창시키지 않아도 됐다.
위즈덤에 축적된 마력은 처음부터 헨리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헨리는 맡겨 두었던 힘을 다시 되돌려 받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포근하고 달콤했다.
그래서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아아아…….
위즈덤에 축적된 마력들이 헨리의 몸에 스며들면서 자연스럽게 두 개의 코어를 통과했다.
그렇게 코어를 거친 마력들은 푸른색이 아닌 에메랄드 빛으로 탈바꿈되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이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크 메이지’로서 헨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치의 마력이 헨리의 몸에 모두 축적된 순간.
‘왔구나.’
헨리의 전신이 광휘에 휩싸이게 되었다.
헨리는 직감했다.
별다른 깨달음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한 단계 더 높은 7서클의 존재로 거듭날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화아아악……!
뿜어진 광명은 탑의 꼭대기 전부를 가득히 메웠다.
그리고 광휘가 천천히 잦아들 무렵, 헨리는 위즈덤으로부터 천천히 이마를 뗐다.
헨리는 감은 눈을 떴다.
그리고 헨리는 심장에 그려진 여섯 개의 서클 위로, 새롭게 탄생한 일곱 번째 고리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됐어.”
헨리는 결국 보기 좋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환생한 직후부터 줄곧 바라 왔던 7서클의 경지를 말이다.
이에 헨리가 시선을 옮겨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어 길리언을 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로어가 반쯤 벌려진 입을 급히 닫으며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대마법사님! 제가 감히 경솔했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는 로어 길리언.
그가 솔선수범하여 무릎을 꿇자 로어의 뒤편에 있던 학파장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경솔함을 사과했다.
이에 그 광경을 본 맥도웰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반에게 물었다.
“반, 원래 마법사놈들은 저렇게 인정이 빠르냐?”
“실리주의자들이라 그래. 게다가 마법 우월주의자들이라 어설픈 자존심 따위는 안 부리지. 특히 마법에 관해선 말이야.”
“……참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이야. 쟤들은 자존심도 없나?”
일반인으로선 다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긴 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저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개중에는 반의 말대로 ‘실리주의’의 영향이 컸다.
예컨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대마법사가 탄생한다면 미제로 남았던 자신의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리주의가 아니더라도 죽은 헨리가 남긴 어마어마한 족적이 큰 영향을 끼쳤지만 말이다.
그만큼 헨리는 마법사들에게 있어선 거의 ‘신’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모두가 새로운 대마법사의 탄생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경솔함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니 헨리도 더 이상 그들의 지나간 행적에 대해 문책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마법사들의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대마법사가 되었으니 굳이 저들에게 경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헨리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었다.
헨리는 이어서 로어의 이름을 불렀다.
“로어 길리언.”
“예, 대마법사님.”
“현 시간 부로 스승님의 유지를 이어 내가 마탑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겠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진 깍듯함.
헨리는 이어서 로어의 뒤편에 꿇은 마법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 선택에 불만이 있는 자는 지금 말하도록. 다만, 현 시간 이후 쓸데없는 이유로 마탑의 기강을 흐트러뜨린다면 엄벌에 처할 테니 그리 알도록 하고.”
헨리는 다시금 마탑의 지도자가 되면서 전생에 뿜어내던 카리스마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헨리의 그 카리스마가 먹혔던 것일까?
유별난 마법사가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한데 그 누구도 헨리의 행보에 불만을 재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에 헨리는 몹시 흡족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그것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복귀해도 자신의 힘이 여전히 강력함을 몸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맥도웰이 이번에도 조용히 반에게 말했다.
“확실히 대공의 제자야. 말 한마디로 마탑 놈들을 한 방에 휘어잡네.”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공의 유일한 제자인데 저 정도는 기본이지!”
“그럼 이제 마탑은 우리 편에 서는 건가?”
“헨리가 수장이 되었으니 아마도 그렇겠지?”
“벌써부터 아서스 그놈 얼굴이 썩어 들어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다 떨리는구먼.”
“나도 그 의견엔 동감이야.”
맥도웰과 반은 생각지도 못한 전력의 획득에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마법사들을 아군으로 두는 것만큼 편리한 전쟁도 없을 테니까.
“그럼 이제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
헨리는 위즈덤을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로어에게 명령했다.
“로어, 넌 앞으로 부탑주로서 물심양면으로 나를 돕도록 해.”
“물론입니다, 대마법사님.”
“좋아, 그럼 마탑주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리도록 하겠다. 현 시간부로 너는 책임지고 마탑 전체를 비울 수 있도록 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야. 오늘부로 황궁의 마탑은 더 이상 마탑으로서 운영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탑의 모든 마법사들은 새로운 마탑으로 이주할 준비를 하도록.”
“예에?”
연이은 헨리의 파격적인 발언에 마법사들은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에 로어가 안절부절하는 모양새로 헨리에게 물었다.
“대마법사님, 진심이십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 결정에는 번복이 없다.”
“하, 하지만 대마법사님. 이 마탑은 초대 마탑주이신 헨리 모리스 님께서 제국을 건국할 당시에 상징적인 이념을 두고 만드신 아주 역사 깊은……!”
“역사? 고작해야 20년 남짓한 제국 역사가 무슨 역사 깊은 마탑이야?”
“하, 하지만……!”
“로어, 마지막으로 말한다. 내 입에서 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되게 하지 마. 제국은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제국의 잔재라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나는 철저하게 지워 버릴 생각이다.”
“그, 그런……!”
헨리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마탑의 건국 때부터 함께해 왔던 로어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헨리가 내린 명령은 차마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런 종류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단호했다.
“두 시간. 딱 두 시간의 말미를 주겠다. 그 후엔 황궁 전체에 마법 포격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까지 준비를 모두 마치지 않으면 황궁과 함께 잿더미로 만들 테니 그리 알도록.”
명령을 마친 헨리는 등을 돌려 마탑을 빠져나갔다.
마법사들이 새로운 마탑으로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헨리도 황궁에서 따로 챙겨야 할 수많은 물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킹턴.”
“예, 예! 대공작님!”
“왜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죠?”
“저, 저도 그것이 잘…….”
한나절이 지났다.
그런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승전보를 가지고 와야 할 십검들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아서스가 짐짓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에 킹턴 포람은 진땀을 흘렸다.
‘뭐하는 거야, 이 자식들?’
황제의 수급을 가지고 왔어도 열댓 번은 가지고 왔을 시간이었다.
황실 친위대는 이미 아서스의 친위대가 되었고, 근위대 또한 의심받지 않을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한 모두를 빼 두었다.
게다가 황궁으로 진격한 네 명의 기사들은 모두 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제국 최고의 무력단체, 제국 십검들이 아니었던가?
‘설마 변수가 생긴 건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같은 상황에서 딱히 떠오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베이론!”
“예!”
“네가 직접 황궁으로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와라!”
“예, 알겠습니다!”
이에 킹턴은 자신의 부관을 시켜 황궁의 상황을 파악해 올 것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베이론은 즉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스크롤을 찢어 광명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모든 귀족들이 네 기사의 승전보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대관식을 치를 준비를 모두 마쳤고, 새로운 황제를 위한 새로운 왕관까지 모든 것이 준비가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실버 잭슨의 목이 필요했다.
잠시 뒤, 귀족들 앞에 다시 한 번 광명이 번쩍였다.
베이론이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베이론의 얼굴엔 형언할 수 없는 당혹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당혹감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다름 아닌 킹턴 포람이었다.
‘설마!’
킹턴의 얼굴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졌다.
임무를 마친 베이론은 아서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다급히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서스 님! 화, 황궁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아서스 대신 목소리를 드높인 것은 킹턴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더냐! 황궁이 사라지다니?”
“사실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황궁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불에 탄 재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뭐라고!”
부관의 보고에 몇몇 귀족들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황궁으로 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아서스는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리고 의견이 수용되자마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황궁으로 향하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 그 자리에서 찢었다.
부우욱!
번쩍!
숱한 광명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 * *
모두가 지정된 좌표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마치 지독한 악몽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 맙소사……!”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폐허가 되어 잿더미만 남은 황궁의 터였다.
그리고 모두가 새카만 잿더미 속에 두 눈알을 굴리던 때에 누군가가 다급히 소리쳤다.
“저, 저기!”
모두의 이목이 그가 말한 방향으로 쏠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과거, ‘축복의 전당’이라고 불렸던 곳에,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것이 효시되어 있었다.
구시대의 상징이라고 여기려던 유라시아 제국의 2대 황제, 실버 잭슨 에드워드 2세의 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