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끝과 시작 (4)
황제가 죽었다.
그리고 황궁 곳곳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는 궁녀나 내시 들 모두가 황제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서스의 네 기사들이 데리고 온 부하들이 모두 죽어 소문을 억제할 만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즌.”
헨리는 황제를 제외한 아서스의 죽은 네 기사를 모두 얼렸다.
그런 다음 그들의 시체를 아공간에 집어넣은 뒤 다시 등을 돌려 십검 앞에 섰다.
맥도웰이 말했다.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오는군.”
장난스럽던 맥도웰도 막상 황제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이에 반이 물었다.
“헨리, 다음 계획은 뭐지?”
그러자 헨리가 약간의 뜸을 들이다가 이내 대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아서스를 쳐야겠지요.”
“아서스가 이리로 쳐들어올까?”
“아뇨, 아서스는 이리로 오지 않을 겁니다.”
“그럼?”
“놈은 이미 자신의 지방인 하이랜더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크로웰의 승전보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수도를 옮긴다고? 그거 확실한 정보야?”
“알프레드에게서 들은 정보이니 확실합니다.”
“그럼 이제 어떡해? 크로웰이 복귀하지 않으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그렇겠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 파악을 위한 척후병을 한 명 보낼 테고 말이죠. 그래서 저흰 척후병이 오기 전에 미리 공표할 생각입니다.”
“공표? 헨리 너, 설마?”
“예, 황제는 우리가 죽였고, 다음은 아서스 네놈 차례라고 알려 줘야죠.”
전면전의 선포.
어차피 해야 할 전쟁이라면 헨리가 먼저 전쟁을 선포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모양새는 그편이 훨씬 더 멋있으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럼 슬슬 이것부터 처리해 볼까요?”
헨리는 죽은 실버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황제의 시체를 다른 기사들처럼 얼려서 챙기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황궁 가장 높은 곳에 황제의 목을 걸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헨리는 황제의 목을 전쟁 선포의 상징으로 사용키로 했다.
헨리는 이윽고 황궁에서 가장 높이 지어진 건물인 ‘축복의 성전’으로 이동했다.
축복의 성전은 황제가 모두에게 어떠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공포할 때 사용되는 곳이다.
헨리는 세 명의 기사와 함께 축복의 성전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헨리의 손에는 여전히 죽은 황제의 시체가 들려 있었다.
그 때문에 이동하는 내내 죽은 황제의 시체로부터 핏물이 흘렀다.
흐른 핏물은 붓글씨처럼 기다란 흔적을 남겼다.
헨리는 일부러 피가 흐르게 두었다.
황궁의 모든 이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에 어떠한 궁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절했다.
황궁에 있는 병사들은 그저 입을 반쯤 벌린 채 헨리의 걸음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네 사람은 축복의 성전에 도착했다.
헨리는 신전처럼 지어진 축복의 성전의 거대한 기둥들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여기도 오랜만이군.’
축복의 성전은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말을 전하기 위한 곳이었지만, 사실 헨리도 이곳을 통해 수많은 법률들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기사나 마법사들 중에서도 큰 공을 세운 자가 있다면 손수 축복의 성전으로 초대해 귀족들 앞에서 소감을 말하게 하기도 했다.
그것은 헨리가 일부러 축복의 성전을 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축복의 성전이 이용될 일은 없을 것이다.
털썩!
헨리는 축복의 성전 중앙에 황제의 시체를 내던졌다.
그런 다음 허리춤의 칼을 뽑아 사위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성둥!
에메랄드 빛 섬광이 사위로 크게 휘둘렸다.
그러자 성전의 천장을 떠받치던 기둥들이 잘려나가며 한꺼번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역중력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자 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기둥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황궁 곳곳에 뿌려졌다.
기둥의 파편들이 육중한 소리를 낳았다.
덕분에 황궁 곳곳에 퍼져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황궁의 가장 높은 곳, 축복의 성전으로 몰렸다.
이에 헨리가 축복의 성전 가장자리로 이동해 얼굴을 비추었다.
“모두들 주목!”
마력이 담긴 거대한 포효.
헨리의 목소리는 쏠린 이목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헨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지금부터 유라시아 제국의 황제 실버 잭슨 에드워드에 대한 처형식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
“뭐, 뭐?”
“황제의 처형식?”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각기 다양한 반응.
그러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평생 황제를 위하여 살았던 이들에게 황제의 죽음을 보여 주는 것뿐.
이에 헨리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기요틴.”
쿠구구구구!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거대한 처형장.
그것은 죄인의 목을 베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단두대라고 불리는 끔찍한 처형 도구였다.
그리고 이것은 헨리가 오직 ‘실버’에게 사용하기 위해 오늘을 손꼽아 기다리며 만들어 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황제를 위한 마법이기도 했다.
“마, 마법?”
갑자기 바닥에서 단두대가 솟구쳤으니 충분히 놀랄 만도 하다.
하지만 처형장을 지켜보는 이들 중에 헨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황궁의 사람이라면 마탑의 마법사들의 얼굴을 외워 두는 것은 기본이었으니까.
“내가 도와줄까?”
기요틴을 지켜보던 반이 헨리에게 물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오늘만을 기다려온 사람이 바로 저인 걸요.”
이후, 헨리는 마법으로 처형대의 작은 홈에 죽은 황제의 목을 밀어 넣었다.
황제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헨리는 일부러 황제의 목을 베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모두에게 황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말이다.
철컥!
시체는 말이 없었다.
헨리는 손쉽게 황제의 목에 칼을 채웠다.
칼은 황제의 목과 두 손을 단단히 봉했다.
꿀꺽.
황궁의 모든 이가 그 장면을 하나하나 똑똑히 두 눈에 담았다.
그중 일부는 황제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서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이 충격적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황제가 죽었기 때문에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헨리는 목에 칼을 채운 황제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쳐다보는 수천 개의 눈동자들을 응시했다.
모두의 눈동자에 짙은 기대감과 불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에 헨리가 외쳤다.
“모두들 똑똑히 보아라! 오만한 황제의 말로가 어떻게 끝나는지 말이다!”
이윽고 헨리는 손에 든 칼을 휘둘러 칼날을 붙들고 있는 기요틴의 팽팽한 밧줄을 끊어 냈다.
슈아아아악!
짐승의 아가리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처럼, 단두대의 날카로운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요틴의 칼날이 황제의 목을 집어삼킨 그 순간!
성둥!
황제의 목이 볼품없이 기요틴 아래로 굴러 성전의 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
“…….”
온 세상이 침묵에 잠겼다.
제국 절대자의 목이 잘렸다는 것은 많은 바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 순간.
“와…….”
“……와아!”
“와아아아아!”
시작은 한 명에 의한 작은 감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전염병처럼 삽시간에 주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져 나오며 신전을 가득 채웠다.
황제의 죽음을 본 이들이 내뱉는 기쁨과 환희의 포효였다.
‘역시!’
이에 헨리는 바닥에 떨어진 실버의 수급을 손에 들고서 성전 밖으로 있는 힘껏 흔들어 보였다.
“와아아아!”
전율, 그리고 소름.
형용할 수 없는 모든 감정들이 헨리의 전신을 강하게 주물렀다.
헨리도 그제야 황제의 죽음을 확실하게 실감하는 듯했다.
‘……끝이다.’
황제는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첫 번째 죽음이 헨리의 개인적인 복수로 인한 죽음이라면, 두 번째 죽음은 암암리에 품고 있던 모두의 염원을 대신한 상징적인 죽음이었다.
헨리는 이어서 손가락을 튕겨 강철로 된 기다란 가시를 뽑아 올렸다.
그런 다음 가시의 끝에 황제의 목을 걸어 올리고서 축복의 성전 높이 폭군의 목을 효시했다.
이로써 황제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말로 끝이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더더욱 좋았을 무능한 황제의 죽음.
그런 황제가 죽음으로써 무너져 가던 제국은 확실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두들 떠나라! 제국의 영광은 오늘로써 끝이다! 모두들 떠나 각자 너희들의 삶을 살아라!”
“우와아아아!”
이로써 오늘.
21년 제국의 짧은 역사가 마침내 그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 *
“신기한 놈이네.”
“그치?”
“아니, 나라면 황제도 죽였겠다, 직접 황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왜 굳이 저런 선택을 한 거야?”
“대공의 제자잖아. 그래서 그런지 난 좀 이해가 돼.”
맥도웰과 반의 대화였다.
맥도웰은 황제가 효시되고 헨리가 제국의 종말을 공포한 직후부터 계속해서 아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셔 보였다.
이에 맥도웰이 헨리에게 물었다.
“야 야, 너 진짜 황제가 될 생각은 없냐? 생각해 봐. 네가 갑자기 제국을 멸망시켜 버리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어?”
“그들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설사 제가 황제가 된다 한들, 갑자기 황제가 된 저를 받아들이기야 하겠습니까?”
“네가 뭘 모르나 본데 권력은 일단 쥐기만 하면 알아서 아랫것들이 따르는 법이야.”
“관심 없습니다.”
“이익!”
“그만해라, 맥도웰. 추하다.”
“바할드 너까지!”
물욕이 없는 맥도웰이 헨리에게 황제의 자리를 권유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아깝다, 네가 황제가 되면 뷰스티엘 이상의 미녀들을 평생 동안 품고 살 수 있는 건데……!”
“……그게 목적이었냐?”
이에 반이 한심하다는 듯이 맥도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헨리가 황제가 되면 자신은 개국공신의 일원이 되어 평생 동안 여색을 즐기며 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윽고 바할드가 헨리에게 물었다.
“헨리,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황궁을 폭파시킬 예정입니다.”
“황궁을?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황궁의 폭파는 황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종말을 알릴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잔재는 깨끗하게 털어 내야 새 출발을 할 수 있겠죠.”
헨리는 진심이었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제국을 건국하긴 했으나 이제 헨리의 곁에는 그 영광을 함께 누리던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실버가 죽은 지금, 더 이상 그 잔재인 황궁을 남겨 둘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전에 챙길 건 좀 챙겨 둬야겠지만.’
헨리가 제국의 종말을 선포한 이후, 황궁 사람들은 헨리의 말대로 모두들 황궁을 떠났다.
이제 황제가 죽고 제국의 운명이 끝났으니 지금부터라도 다른 살길을 모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자유도시로, 어떤 이들은 평소 친분이 있는 귀족에게로 향했다.
모든 것이 헨리가 의도한 대로였다.
곧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헨리는 저들의 목숨을 모두 책임질 수가 없었다.
헨리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황궁을 지우기 전에 황궁에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따로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그동안 우리는 산책이라도 하면서 추억이라도 곱씹어 보지, 뭐.”
“배려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네 덕분에 지루했던 인생에 다시 불이 붙었는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건 우리 쪽이지.”
맥도웰이 넉살 좋게 대꾸했다.
* * *
네 사람은 축복의 전당에서 내려와 두 갈래로 찢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축복의 전당에서 내려온 직후, 헨리는 축복의 전당 아래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보았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들 중에 한 사람이 나지막이 신음을 내뱉었다.
“……오, 맙소사!”
나지막히 신음을 내뱉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현 마탑주, 로어 길리언이었다.
그리고 로어 길리언 뒤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마탑에서 내로라하는 천재들.
6서클의 아크 메이지이자 각 학파들의 학파장들이 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어?”
이에 바할드와 맥도웰이 로어의 이름을 불렀다.
“바할드 님, 맥도웰 님.”
그러자 로어 또한 바할드와 맥도웰의 이름을 불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째서 두 분이 여기에……?”
로어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바할드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바할드 대신 맥도웰이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야. 황궁이 뒤집어지는데 마탑은 여태 뭐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그건…….”
로어가 무어라 대꾸하려 하였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사정이 있었겠죠. 예컨대 아서스로부터 중립 선언을 제안 받았다든가 하는 그런 사정 말이죠.”
“그, 그걸 어떻게?”
다시금 커지는 로어의 두 눈동자.
이에 헨리가 친절히 웃으며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헨리 모리스, 돌아가신 제 스승님이자, 8서클 대마법사인 헨리 모리스 님의 유일한 제자입니다.”
“뭐, 뭐, 뭐라고요?”
헨리의 파격적인 자기소개에, 모든 마법사들이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