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끝과 시작 (3)
벼락과 함께 나타난 헨리.
그러나 반을 제외하고는 헨리를 알아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헨리를 본 반이 반가운 목소리로 헨리의 이름을 불렀다.
“헨리!”
“……!”
“……!”
반의 외침에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저 새파랗게 어린놈이 걔라고?”
“……그렇군.”
“헨리?”
반응은 다양했다.
맥도웰과 바할드의 경우엔 반에게 미리 헨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그가 누구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서스군의 기사들은 달랐다.
그중에서도 특히 크로웰이 가장 크게 놀랐다.
‘헨리라고?’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헨리.
대마법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가 이러한 시국에 벼락과 함께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는 노릇.
이에 크로웰이 살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지? 마탑의 마법사인가? 소속과 정체를 밝혀라!”
“싫은데?”
“뭐?”
“그런 건 물어서 뭐하게? 곧 죽을 놈이.”
“뭐, 뭐라고?”
헨리는 크로웰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무나도 당당한 반응에 크로웰은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이에 맥도웰이 배를 잡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학! 야, 반! 네 말대로 저 녀석, 정말 제대로 미쳤는데?”
“내가 말했잖아? 대공을 훨씬 뛰어넘는 놈이라고.”
헨리는 등을 홱 돌려 반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바할드 제라칸이라고 한다.”
“난 맥도웰 커그스. 야, 근데 네가 정말로 돌아가신 대공의 하나뿐인 제자냐?”
“그렇습니다.”
“이야, 대공께서 이런 인재를 숨겨 두셨을 줄이야! 직접 보고도 안 믿기는데?”
맥도웰과 바할드는 반에게 이미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헨리 또한 한결같은 성격의 맥도웰을 보며 나직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전하네, 맥도웰은.’
말투만큼이나 호쾌한 남자.
격식과 거추장스러움을 싫어하는 남자가 바로 맥도웰 커그스였다.
헨리는 이어서 바할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국 제일검이자 최초의 기사왕인 바할드 제라칸.
그는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진중한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헨리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따뜻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그는 죽은 대공에게 숨겨 둔 제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선 저의 제안을 수락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먼저 불청객부터 처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야. 그럼 너는 가만히 보고나 있어. 여긴 우리들이 해치울 테니까.”
헨리는 맥도웰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 다음 헨리를 뒤로 보내며 목 근육을 풀기 시작했다.
“반, 네가 저기 덩치를 맡아. 바할드 네가 크로웰을 맡고. 나는 하룻강아지한테 범 무서운 걸 보여 줘야겠어.”
“뭐라고?”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화악!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맥도웰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전신에 투기를 폭발시켰다.
이에 하룻강아지로 지목된 루핀이 인상을 찡그리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렸다.
그것을 본 맥도웰이 말했다.
“이거, 자꾸 대공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헨리! 이 기회에 잘 봐 두라고, 저런 짝퉁 십검들 말고 진짜 십검들의 제대로 된 힘을 보여 줄 테니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슬겅!
맥도웰의 말대로 헨리는 오랜만에 ‘진짜 십검’들의 실력이나 느긋하게 구경키로 했다.
그래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다음 투기를 내뿜는 십검들을 지켜보았다.
이에 진심으로 분노한 크로웰이 말했다.
“카라스는 물러서라!”
“하, 하지만 크로웰 님!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물러서라고!”
오러의 폭풍에 휩쓸리긴 하였으나 카라스도 아직은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분노한 크로웰은 그런 카라스조차 심히 거슬렸다.
이에 카라스가 입술을 앙 다문 채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에 크로웰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맥도웰, 네놈은 늘 그런 식으로 날 무시했지.”
“무시라니? 난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그러고 보니 네가 예전에 몇 검이었었지? 팔검이었던가?”
“칠검이다!”
“그래, 칠검! 근데 칠검이나 팔검이나 하찮은 건 마찬가지 아냐?”
“닥쳐라!”
맥도웰의 빈정거림에 크로웰은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하지만 맥도웰의 말은 사실이었다.
바할드와 맥도웰이 십검의 자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크로웰이 오검의 자리로 승격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콰앙!
크로웰의 폭발을 기점으로 모두가 칼을 뽑고 오러를 방출했다.
그리고 맥도웰이 크로웰을 저지하려던 순간.
콰과과과괏!
뜨거운 오러의 폭풍이 다시 한 번 아서스군의 세 기사를 덮쳤다.
그것은 바할드의 오러였다.
바할드는 검을 한 번 휘두름으로써 엄청난 양의 오러 폭풍을 쏟아 냈다.
그것은 바할드의 주특기인 ‘태양 폭풍’이었다.
치이이익!
“크아아악!”
오러 폭풍 사이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뜨거운 수증기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바할드가 쏟아 낸 오러의 폭풍이 몹시 뜨거웠기 때문이다.
“오!”
그것을 본 헨리가 나지막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양 폭풍이라니, 오랜만에 보는 기술이로군.’
하지만 태양 폭풍은 그가 사용하는 수많은 기슬들 중 하나일 뿐, ‘음속의 맥도웰’ 같은 별칭이 아니었다.
바할드의 별칭은 다름 아닌 ‘태양’. 그는 과거 십검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태양의 바할드’라고 불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오러는 마치 태양처럼 뜨거웠고, 광범위하게 출력된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태양 폭풍이 멎었다.
바할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자 그곳에는 크로웰을 제외한 루핀과 엘펀이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채로 전신을 떨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카라스나 루핀, 엘펀 모두 최상급의 경지를 이룬 최상급 소드 마스터였지만 바할드는 그중에서도 정점을 이루었던 기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로웰은 조금 달랐다.
“아직이다……!”
“오?”
크로웰은 전 십검 중에서도 칠검의 자리를 꿰찼던 몸.
루핀이나 엘펀 같은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질이 달랐다.
이에 맥도웰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야, 그래도 너는 좀 다르네. 우리랑 같은 세대여서 그런가? 바할드랑 반은 가만히 있어. 저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래.”
“그러지, 뭐.”
맥도웰은 크로웰마저 바할드에게 빼앗길까 봐 바할드와 반을 뒤로 물렸다.
그런 다음 뽑은 칼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간다.”
츠팡!
짧은 경고.
순간 맥도웰이 사라졌다. 감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였다.
그리고 다시 맥도웰이 보였을 땐.
푸욱!
“커, 커허억……!”
맥도웰의 칼날이 크로웰의 심장을 꿰뚫은 직후였다.
그리고 맥도웰이 크로웰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너무 오랜만이라 까먹은 거야? 네 주제에 감히 나랑 칼을 섞으려 하다니.”
푸슉!
말을 마친 맥도웰이 심장에 박아 넣은 검을 회수했다.
그러자 크로웰의 깨진 플레이트로부터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기댈 곳을 잃은 크로웰의 몸뚱어리는 그만 자리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털썩.
그리고 맥도웰이 칼날의 궤도를 바꾸며 말했다.
“상관이 죽었으면 너희도 죽어야겠지?”
“사, 살려……!”
서걱!
크로웰이 죽은 직후, 제자리에 굳은 루핀이 덜덜 떨며 목숨을 구걸하려 했다.
하지만 맥도웰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을 휘둘렀다.
투둑! 데구르르…….
루핀과 엘펀, 그리고 카라스의 수급까지 모두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윽고 맥도웰이 칼날에 묻은 핏물을 털어 내며 헨리에게 말했다.
“봤냐?”
“과연, 제국 십검님들이십니다.”
이에 헨리는 흡족함에 미소지으며 말했다.
압도적인 힘. 깔끔한 결과.
구세대와 신세대가 가지는 힘의 차이가 이 정도였다.
이로써 헨리는 황궁 점령에 성공했다.
바닥에 쓰러진 십검의 부하들은 이미 시체가 되었고 황궁에는 변혁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놈뿐인 건가?’
헨리는 고개를 돌려 기절해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볼품없는 모양새로 쓰러진 제국 최고의 권력자, 실버 잭슨 에드워드 2세.
헨리는 포승줄에 묶인 황제를 향해 손짓해 보였다.
부우웅.
허공으로 떠오르는 황제.
마법이었다.
이윽고 허공 위로 떠오른 황제가 네 사람 앞에 등장하자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맥도웰이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진짜 역겹게도 생겼네.”
그는 더 이상 기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실버 잭슨 또한 황제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한 욕지거리도 허용이 되었다.
이에 헨리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기절한 황제를 바라보았다.
‘실버…….’
실버는 황제가 아주 어렸을 적에, 전장에서 그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어렸을 때의 황제는 몹시 총명했다.
그는 자신의 선대 황제를 닮아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모두들 골든의 뒤를 이어 훌륭한 성군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받았다.
하지만 미래는 달랐다.
골든이 마왕의 저주로 병을 얻어 일찍 죽게 되자, 실버는 자연스레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가 된 실버는 무능함의 극치를 달렸으며 아집의 끝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집에 집어삼켜진 황제는 현재라는 끔찍한 미래를 만들었다.
그래서 헨리는 여태껏 황제와 중앙귀족들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지금,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황제를 죽일 수 있는 거리에까지 도달하였다.
하지만 막상 코앞의 실버를 보고 있으니 헨리는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 미칠 것만 같았다.
‘골든…….’
헨리는 실버의 얼굴에서 자꾸만 골든이 보였다.
실버가 골든의 하나뿐인 아들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냥 실버를 증오할 수가 없었다.
‘내 잘못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헨리와 골든은 죽마고우 같은 사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의 자식이 엇나가기 전에 미리 바로 잡아 주었어야 할 의무가 헨리에겐 있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러질 못했다.
당시의 헨리는 제국을 건국한 후 서클의 증진에 미쳐 거의 탑에만 처박혀 살았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는 다시 눈을 감았다.
헨리는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더더욱 내가 끝을 내는 것이 맞겠지.’
과오의 굴레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치달아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오를 바로잡는 것 또한 자신이 해야 할 일.
물론 이 모든 일의 원흉에는 어리석은 황제의 잘못된 선택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흉은 ‘아서스 하이랜더’에게 있지만 말이다.
딱!
헨리는 손을 튕겼다.
그러자 마법으로 인해 기절했던 황제가 정신을 차렸다.
“으, 으에……?”
침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는 실버.
기절한 동안 궐련을 제대로 피우지 못해 그사이에 몸과 뇌가 망가진 탓이었다.
이에 그것을 본 맥도웰과 바할드, 반 모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끼 이거, 상태 왜 이래?”
“궐련에 중독됐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이에 헨리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딱!
이윽고 헨리는 한 번 더 손을 튕겼다.
그러자 헨리의 에메랄드 빛 마력이 뿜어져 나와 침을 흘리는 실버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사아아악…….
실버의 눈이 다시 감겼다.
그리고 실버는 자신의 몸이 마치 폭신한 담요에 감싸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헨리가 손가락을 튕기자.
“어어?”
정신이 멀쩡해진 실버가 눈을 떴다.
“여, 여긴……?”
헨리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 둔 핑크 스왐프 전용 치유 마법이었다.
물론 완벽한 치유는 할 수 없다.
헨리가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고 한들 근본은 사제가 아닌 마법사였으니까.
대신 지독한 중독자를 잠시 동안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릴 수는 있었다.
이에 허공에 떠오른 실버가 말했다.
“바할드? 맥도웰?”
실버는 바할드와 맥도웰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굳게 입을 다물고 말없이 실버를 응시했다.
황제는 당황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의 몸이 허공에 부유하고 있음을 깨닫자, 몸을 허우적대며 자신을 내려놓을 것을 명령했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더냐! 무엄하도다! 바츠와 킨리스는 어디에 있지! 아서스는!”
그러나 헨리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고개를 잠시 숙인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 너, 너는……!”
헨리와 눈이 마주친 황제.
황제의 눈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처형장 위에서 자신을 노려보던 8서클의 노현자, ‘헨리 모리스’였다.
“네, 네, 네가 여길 어떻게!”
“실버.”
“히, 히이익!”
헨리가 나지막히 실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실버가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덜덜 떨어 보였다.
“아, 아니야, 아니야, 지,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거야……!”
2대 황제는 제국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두 사람.
황제는 제국에서 딱 두 사람만을 두려워하였다.
그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오래 전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닮은 노현자, 헨리 모리스였다.
“실버.”
“아니야, 아니라고!”
헨리는 한 번 더 실버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실버는 계속해서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에 헨리는 나직이 콜소드를 소환했다.
정신을 멀쩡하게 되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미치광이 행세를 한다면 더 이상 대화를 섞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헨리는 검을 휘두르기 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실버의 죽음이 끝은 아니었지만 실버를 죽임으로써 먼저 간 동료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헨리가 말했다.
“저승에 가거든,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라.”
촤아악!
헨리가 검을 휘두르자 분수 같은 핏물이 쏟아졌다.
그러자 허공에서 벌벌 떨던 실버의 육체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미안하네, 친구여.”
헨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실버가 아닌, 먼저 죽은 골든과 동료들을 위해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