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이간질 (2)
불이 일어나자 헨리는 곧바로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곤 콜아머를 해제한 뒤 가벼운 평복을 입고서 허둥지둥 모습을 드러냈다.
“불이야!”
“뭐해! 얼른 안 일어나고!”
“빨리 일어나서 불 꺼!”
혼비백산하는 병사들.
시간이 지날수록 외침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깬 병사들은 서둘러 화재 진압에 나섰다.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일이더냐!”
“불입니다! 보급품이 보관되어 있는 막사에 불이 났습니다!”
“뭐라고?”
갑작스러운 소란에 아이젠을 포함한 천부장들도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화재 진압에 합류했다.
하지만 근처에 강이나 연못이 없기 때문에 화재는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다.
“막사가 쓰러진다아!”
쿵!
결국 막사를 지탱하고 있던 기둥까지 쓰러졌다.
치명적이었다.
기둥이 쓰러졌으니 화마의 덩치가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
“후작님! 이대로 가다간 다른 막사에까지 불길이 번질 것 같습니다!”
“모두들 물러서라!”
방법이 없었다.
화재를 진압할 물은 없었던 데다가 인력으로만 화재를 진압하기에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이에 아이젠은 자신의 검을 가져와 칼을 뽑았다.
그리고 오러를 한껏 모아 불이 난 보급 천막을 향해 검기를 뿜었다.
콰과과과과!
불을 소화시킬 수 없다면 아예 화재 자체를 없애 버리자는 것이 아이젠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화재를 진압하는데 있어서 꽤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 번의 검격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아이젠은 몇 차례나 검기를 내뿜어야 했다. 그 때문에 천막이 전소되었을 때쯤엔, 아이젠의 검기에 의해 ‘보급품’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제기랄……!”
아이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보급품 몇 개 살려 보겠다고 화재의 진압을 늦출 순 없었으니까.
화마를 잠재운 아이젠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불침번들은 대체 뭘 했나!”
불똥은 자연스레 화재를 발견한 불침번들에게로 튀었다.
애초에 불침번의 역할이 이러한 것들을 방지하는 것이었으니까.
이에 아이젠이 도끼눈을 뜨고서 불침번들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멀쩡하던 보급 막사에 왜 갑자기 불이 났지?”
서슬 퍼런 살기.
새벽에 일어난 끔찍한 소동은 아이젠의 심기를 건드리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침번들은 쉬이 대꾸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불침번의 대부분이 피곤에 절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니까.
“불화살을 보았습니다.”
그때였다.
불침번 대신 대답을 한 것은 다름 아닌 헨리였다.
일부러 온몸에 물을 묻혀 땀이 범벅된 것처럼 꾸민 헨리가 아이젠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는 열심히 화재 진압에 참여했다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아이젠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불화살이라고?”
“그렇습니다. 내일 있을 전략 회의를 구상하던 중 머리나 좀 식힐 겸 해서 잠시 바깥 공기를 쐬었는데, 그때 마침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화살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불화살의 소행이라고 보기엔 화살 같은 잔재가 발견되지 않았잖느냐?”
다른 사람이 아닌 헨리였기에 아이젠은 분노를 삭이고 침착하게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이에 헨리가 한층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것은 이더웨더군의 야습이라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야습이라니?”
“이 밤중에 불화살을 쏠 수 있는 건 저희와 영지전을 벌이던 이더웨더군뿐입니다. 또한 제가 본 것이 불화살이긴 하였으나…… 화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분명히 ‘파이어 애로우’ 같은 마법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마법이라면, 혹 정령술을 이용한 것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헨리의 의도대로 아이젠이 곧잘 대답하자 헨리가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아이젠이 무거운 음성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으음……!”
확실히 이 밤중에 자신들을 공격할 만한 용의자는 이더웨더군뿐이었다.
게다가 불화살의 흔적이 남지 않았으니 마법사의 소행이 아니라면 이는 필시 정령술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아이젠의 얼굴에 굵직한 힘줄이 솟아났다.
“알프레드, 이 망할 놈이……!”
‘됐다!’
아이젠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헨리의 말이 옳다고 판단하여 이 모든 만행을 알프레드의 소행이라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이젠을 좀 더 부추기는 것뿐.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후작님?”
“명예로운 결투는 끝났다.
남은 것은 조약을 어긴 겁쟁이 놈한테 본때를 보여 주는 것뿐! 모든 병사들에게 출정 준비를 명령해라!”
“예!”
아이젠의 명령에 헨리를 포함한 천부장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모든 병사들에게 전달되어 쇼난군 전체의 분노로 끓어올랐다.
“이더웨더군, 이 비겁한 새끼들이……!”
“대체 뭐가 명예로운 결투라는 거야?”
“그렇게 자신들이 없나?”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내일 밥은 집에서 먹겠다!”
보급품이 불탔으니 당장 내일 먹을 밥도 없다.
그러니 오늘 밤 안에 복수와 영지전을 동시에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윽고 전 병력이 무장을 마치고 횃불을 치켜들었다.
“가자!”
뿔피리는 불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기습에 대한 대비도 하지 않았다.
아이젠은 아예 확실하게 전면전을 벌여 완전히 끝내 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기습이 있을 리가 없지.’
이에 헨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이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보급병들까지 무장을 마친 삼천팔백의 쇼난군 전체가 테헤른 평야를 지나 이더웨더군 진영의 외곽에 도착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전군, 불화살을 준비해라!”
“후작님, 죄송하지만 보급품이 모두 불타 버리는 바람에 쏠 수 있는 화살이 없습니다.”
“제기랄! 그렇다면 당장 모두 칼을 뽑아라! 자비는 필요 없다! 가서 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알프레드 놈들의 목을 치고, 알프레드는 산 채로 내 눈 앞에 무릎 꿇려라!”
아이젠은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 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부하의 말대로 보급품이 모두 불타 버린지라 쇼난군이 가진 것은 병사들이 출정할 때 보급받았던 창칼들이 전부였다.
이에 아이젠이 돌격을 명령했다.
“돌격하라!”
“와아아아아!”
조용히 전진해 오던 쇼난군 전체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물소 떼처럼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꾸벅꾸벅 졸던 이더웨더군의 불침번들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 어?”
“야습! 야습이……!”
“사, 살려 줘!”
“크허어억!”
이곳에 귀족의 명예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
쇼난군의 성난 병사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적군의 목에 칼침을 박아 넣었다. 그들은 받은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일념 하에 끊임없이 칼을 휘둘러 피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쇼난군입니다! 쇼난군의 야습입니다, 후작님!”
“뭐라고!”
그리고 놀란 것은 알프레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신사 협정에 의해 밤에는 기습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무슨 연유로 이러한 행태를 벌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이젠, 네놈이 드디어 미쳐 버린 게로구나!”
분노가 머릿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동시에 곧 펼쳐질 아서스의 새 시대에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생각을 하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
“노이어! 실디아!”
-쿠어어어어!
-키아아아아!
계약자의 부름에 곰과 매가 울부짖었다.
그리고 주인의 분노에 따라 노이어와 실디아 또한 짙은 노기를 보였다.
쾅!
“으아아악!”
두 최상급 정령의 폭주로 잠시 쇼난군의 진격에 제동이 걸렸다.
“모두 물러서라!”
하지만 적군의 우두머리가 나섰다면 아군의 우두머리 또한 응당 나서는 것이 인지상정!
게다가 두 최상급 정령의 폭주를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에 아이젠 또한 잔뜩 노여운 기색을 띠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천부장들은 모두 위치로!”
“위치로!”
쇼난군의 맹장들과 두 최상급 정령들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 * *
‘확실히 쇼난군이 우세를 점하는군.’
끊임없는 난전 속에서 평화롭게 이 모든 것들을 관망하는 이.
다름 아닌 헨리였다.
헨리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가만히 두 군대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보급 막사를 공격당했다고는 하나, 쇼난군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상황.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더웨더군은 ‘진짜 야습’을 당했으니 웬만해선 기세를 뒤집지는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헨리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헨리는 두 군 모두 사이좋게 궤멸하기를 바랐다.
이에 헨리는 난전 속에 뒤로 물러나 준비해 둔 다음 패를 꺼내 들었다.
“헥터.”
“짹짹!”
헨리의 부름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참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헥터였다.
슈우웅!
전신에 오러를 띤 참새는 어둠 속에서 푸른 섬광을 그리며 급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에 헨리는 헥터에게 은신 마법을 시전했다.
“으아아악!”
“커헉!”
은신 마법이 적용된 참새는 어둠 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는 솜씨 좋은 암살자가 되었다.
쇼난군은 영문도 모른 채 잔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대, 대체 이 무슨! 크하아악!”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쇼난군.
물론 그 누구도 난전 속에서 참새가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싸움은 갈수록 극적으로 치달았다.
양군의 지휘관들은 서로를 견제하기에 바빴다.
헥터로 인해 쇼난군의 위세에 제동이 걸리자 이더웨더군 또한 뒤늦게 전투태세를 갖추고 반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개판이네.’
그리고 헨리는 여전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전체의 균형을 조율했다.
헨리의 바람은 두 군의 완벽한 전멸이었으니까.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이젠 두 군 모두 눈에 띄게 병력의 수가 급격히 줄었고 바닥에는 전사자들의 시체가 즐비하였다.
“알프레드 네놈……! 네놈이 감히 황제 폐하가 인정해 주신 명예로운 결투를 모욕하느냐!”
“닥쳐라! 어디서 감히 그 뻔뻔스러운 주둥이로 명예로운 전투라는 말을 들먹거리느냐!”
싸움이 길어질수록 천부장들 또한 모두 죽어 나갔다.
이제 남은 지휘관은 가문을 대표하는 두 대가문주가 전부.
그러나 두 가주의 눈에는 서로를 향한 증오심만이 뿜어질 뿐,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슬슬 정리해야겠군.’
각 군의 병사들 또한 이제 세 자리 수가 채 넘지 않았다.
이에 잠자코 싸움을 관망하던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크흡!”
“끄억!”
헨리는 마법으로 남은 병사들을 조용히 도륙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전장에는 두 가주만이 서로의 피를 흩뿌리며 뜨거운 혈투를 벌이게 되었다.
“노이어!”
콰아앙!
곰이 바닥을 내려치자 지축이 뒤흔들리며 날카로운 돌기둥들이 솟아났다.
하지만 아이젠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아이젠은 끊임없이 자신의 무기인 블리킨을 휘두르며 돌기둥을 제거했다.
하지만.
-키에에에!
바람의 매가 아이젠의 등을 할퀴었다.
물론 아이젠의 몸에 둘러진 오러 덕분에 큰 피해를 받지는 않았으나 신경이 실디아에게로 몰린 순간, 노이어의 돌기둥이 아이젠의 왼쪽 어깻죽지를 꿰뚫고 말았다.
“크허헉!”
각혈을 한 움큼 토해 내는 아이젠.
모두가 죽고 아이젠과 알프레드만이 남았다.
하지만 알프레드가 부리는 정령의 수는 둘.
아무리 아이젠이 맹장이라고 하더라도, 두 최상급 정령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끝이다, 아이젠!”
독기 가득한 알프레드의 눈에 끝을 알리는 희열이 번뜩였다.
그와 동시에 알프레드의 검이 아이젠의 목덜미를 향해 날카롭게 궤도를 그렸다.
그런데 그 순간!
챙캉!
“……!”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검.
헨리의 콜소드였다.
“헨리!”
“너, 이 개자식!”
헨리를 발견한 두 가주의 표정에 희비가 엇갈렸다.
아이젠은 기쁨이, 알프레드의 얼굴엔 분노가 서렸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커헉!”
알프레드의 몸뚱이에 대각선 방향으로 거대한 검흔이 새겨졌다.
푸슈슉!
깊은 상처.
알프레드의 피가 헨리에게 분사되었다.
“잘했다! 아주 잘했어!”
이에 아이젠은 전신 가득히 피를 흘리면서도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나.
서걱!
알프레드를 벤 헨리는 그대로 뒤로 돌아 아이젠에게도 대각선의 검흔을 새겼다.
“어……?”
푸슈슉!
가슴이 뜨거웠다.
그리고 아이젠은 뜨거움을 느끼자마자 전방으로 분사되는 자신의 피를 보았다.
“헤, 헨리, 너, 너, 지, 지금 이게 무슨……?”
“잘하긴 개뿔이나.”
서걱!
헨리는 이어서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대각선으로 그어진 아이젠의 가슴팍에 또 하나의 검흔을 새겨 커다란 엑스 자를 만들어 주었다.
“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러나 아이젠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뒷말을 잇기도 전에 숨통이 끊어지고 말았으니까.
이윽고 아이젠은 꿰뚫린 돌기둥에 기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헨리가 나직한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아이젠.”
두 번의 검상.
그리고 짧은 고통.
그것이 헨리가 아이젠에게 줄 수 있는, 허수아비로 일한 것에 대한 ‘노동의 대가’이자 ‘최소한의 용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