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이간질 (1)
“일 똑바로 안 하지?”
헨리는 수렁 앞의 헥터에게 캄사디아의 수급을 던졌다.
피가 빠져 창백해진 캄사디아의 수급.
캄사디아의 수급을 본 헥터가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미안하다. 그놈이 갑자기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어?”
“내가 잡아서 망정이지, 이놈 하나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면 어떡할 뻔했어?”
“미, 미안하다.”
헥터는 여전히 클레버가 자신 때문에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헨리가 무슨 말을 하면 기도 못 펴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다른 놈들은?”
“전부 처리했어, 이놈만 빼고.”
“이더웨더군까지 모두 다?”
“아니, 그놈들은 아직…….”
“네 실력이면 두 군 다 처리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동안 뭘 했기에 아직도 처리를 못 해?”
“그, 그게…… 너무 오랜만의 전투이다 보니 여흥을 즐기느라고……. 하, 하하…….”
더더욱 움츠러드는 헥터.
얼핏 보기엔 인간미 넘치는 대화였다. 하지만 이들 주위에는 헥터가 베어 넘긴 천오백의 쇼난군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에 헨리가 헥터를 한 번 더 다그쳤다.
“시간 없어. 당장 처리하고 와.”
헨리의 종용에 헥터는 등을 돌렸다.
그런 다음 칼을 뽑은 후 악취 나는 수렁 앞으로 다가갔다.
늪은 여전히 코를 찌르는 악취와 함께 정체 모를 기포가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협곡만큼이나 높게 쌓여진 거대한 돌무덤이 있었다.
헥터의 작품이었다.
헥터는 캄사디에게 소환된 직후, 여유 있게 쇼난군을 처리하기 위해 늪 주변의 협곡을 무너뜨려 후방을 확실하게 막았다.
그리고 쇼난군을 늪지대로 몰아넣어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병사들을 척살했다.
부웅! 부웅!
헥터는 헨리가 처음에 주었던 투핸디드 소드를 여전히 사용했다.
헥터는 그것을 롱소드처럼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그것을 본 헨리가 물었다.
“뭐하는 거야?”
“준비 운동.”
“근육도 없는 놈이 무슨 놈에 준비 운동?”
“아차, 그랬지?”
헥터는 여전히 인간 시절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행해 온 습관이었으니 하루아침에 고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따금씩 이러한 행동들이 튀어나왔다.
“갔다 올게.”
“그래.”
이윽고 헥터는 전신에 오러를 둘렀다.
그리고 폭발적인 스피드로 수렁을 넘어 돌산을 뛰어넘었다.
“적?”
“저놈은 또 뭐야?”
“어, 어?”
“으아아악!”
돌산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비명은 오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몸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헥터가 다시 돌산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 * *
부우우우!
석양이 지면서 테헤른 평야의 각 진영에서 뿔피리 소리가 높이 울려 퍼졌다.
해가 졌으니 전투를 중지하라는 신호였다.
아이젠은 생각보다 훌륭한 전투 결과에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큭큭큭! 잘했다, 라이논! 오늘은 네 덕분에 이긴 거나 다름없다!”
“과찬이십니다, 후작님!”
용병 생활의 오랜 잔뼈가 촉망받는 천재 기사를 이겼다.
그로 인해 압도적인 기선 제압에 성공한 쇼난군은 기세를 몰아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전투가 끝날 무렵, 쇼난군은 겨우 칠백의 사상자가 전부였지만 이더웨더군은 천삼백에 달하는,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복귀하는 아이젠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막사로 돌아가면 믿음직한 참모인 헨리와 뛰어난 천부장인 캄사디아의 승전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꿈이었다.
“뭐?”
“협곡으로 출정나간 캄사디아군이 모두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침울한 목소리로 상황을 보고하는 이는 다름 아닌 헨리였다.
헨리는 잘린 캄사디아의 수급을 아이젠에게 내밀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무려 천오백에 달하는 병사들이었다.
평야에 투입된 군사의 절반을 캄사디아에게 배정해 주었건만, 어떻게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단 말인가?
이에 헨리가 말했다.
“이럴 줄 알고 천오백의 병사를 배정해 준 건데……. 하지만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래도 고지전에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나쁜 소식을 먼저 전한 뒤에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렇게 하면 상대의 충격이 훨씬 줄어들고 나쁜 소식에 대한 관심이 크게 떨어진다.
처세술의 달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화법들 중에 하나였다.
게다가 헨리는 ‘일부러’라는 단서를 붙여 처음부터 협곡전이 힘들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이는 혹시라도 아이젠이 꼬치꼬치 캐물을까 싶어서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비록 캄사디아와 천오백의 병사를 잃었지만 너라도 승리했으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아이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호탕한 남자였다.
그는 한 개의 실패 소식보다 두 개의 성공 소식에 더 큰 의의를 두었다.
‘역시 그냥 넘어가는군.’
천오백의 군사와 천부장 하나를 잃은 것은 분명히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은 급습이나 암살 따위로 이루어진 게 아닌, 영지전 중에 발생한 명예로운 죽음이었으니 달리 사족을 붙일 수가 없었다.
헨리는 이어서 아이젠이 협곡군의 전멸에 더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고지 전투에선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뭣? 단 한 명도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수로? 게다가 너는 삼백의 병사가 고작이었지 않느냐?”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
“예, 엄밀히 말하자면 고지 부근에 최상급 정령의 알이 있었는데, 적군이 그걸 잘못 건드려 최상급 정령이 폭주하였습니다.”
헨리는 미리 준비한 대로 척척 대답했다.
그리고 함께 그것을 목격한 천부장, 나다스만 또한 헨리의 대답에 힘을 실어 주었다.
“……역시 그런 수를 감추어 두고 있었군!”
이에 아이젠이 흡족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리고 다른 천부장들의 얼굴을 보며 한껏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략 회의 당시, 고작 삼백의 병사로 고지전을 치르겠다는 헨리를 다른 천부장들 모두가 반발했었으니까.
“다들 잘 보았겠지? 우리 참모가 이런 놈이다.”
“크흠, 흠……!”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가 훌륭했으니 다들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젠은 생존자가 없는 협곡전 또한 헨리가 그만한 병력을 배치했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진즉에 길을 터 주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영지전 특성상 내일 있을 전투 또한 해가 높이 떠올랐을 때 시작될 터이니, 다음 전략 회의를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 회의가 끝났으니 지휘관들은 각자의 막사로 흩어졌다.
첫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 덕분에 사기가 한껏 올랐으니 아이젠은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후한 만찬들을 포상으로 내렸다.
들뜬 분위기가 지속됐다.
그러나 사방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자 고된 하루를 보낸 병사들이 하나둘씩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불침번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특히 개중에서도 가장 피곤해 하는 불침번은 당연히 2번조와 3번조였다.
두 시간마다 번갈아가며 서는 불침번들 특성상 2번조와 3번조는 두 시간, 혹은 네 시간밖에 못 자고 다시 일어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슬슬 움직여 볼까?’
그리고 모두가 피곤에 절어 쓰러진 때, 지금이 바로 헨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때’이기도 했다.
헨리는 계획을 실행키 전에 먼저 막사 안에서 엘라곤을 소환했다.
다시 알이 된 엘라곤.
왈레드가 일으킨 폭발 때문에 폭주가 멈출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진화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다행인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력을 좀 보충해 줘야겠지.’
시레드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추가적인 마력의 공급이 정령의 진화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큰 영향이 없을 뿐이지, 아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용한 게 있는데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하지.’
이를 테면 노동에 대한 포상 같은 것이었다.
헨리는 알 표면 위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알 표면이 파삭거림과 동시에 잠깐 동안 광명을 내뿜었다.
엘라곤의 가벼운 경고 표시였다.
‘미안하다.’
우웅!
몸을 다친 상황에서 또 다시 자극했다는 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지만 이번 한 번뿐이었다.
이윽고 헨리는 알이 된 엘라곤에게 자신의 마력을 주입시켰다.
‘됐어.’
과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주입시켰다.
헨리는 알이 된 엘라곤을 역소환시켰고 이번에는 회복 중에 있는 클레버를 소환했다.
“클레버.”
-예, 마스터.
“몸은?”
-신경 써 주신 덕분에 거의 대부분 회복되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 말은 언제든지 불러내도 되겠군.”
-물론입니다. 언제든지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때마침 클레버 또한 회복을 마쳤다.
게다가 헥터 또한 막사의 외곽에서 은신하여 대기하고 있는 상황.
계획을 진행시키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착갑.”
지이잉!
점검을 마쳤으니 남은 것은 직접 움직이는 것뿐이다.
헨리는 마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콜아머를 착용했다.
“은신.”
스스슷.
마법 무장과 같은 원리.
은신이란 단어 안에는 수많은 마법들이 축약되어 있었다.
헨리는 곧 어둠 그 자체가 되었고, 불침번의 코앞에서도 태연히 걸어 다닐 수 있는 기적을 행했다.
“플라이.”
은신을 마친 헨리는 쇼난군 진영 위로 날았다. 진영의 크기가 한눈에 들어올 때까지 말이다.
그런 다음.
“파이어 애로우, 인비저블.”
화르륵!
허공에 생겨나는 화염의 화살.
불화살은 하나가 아니었다.
헨리는 수백여 개의 파이어 애로우를 만들었다.
하지만 수백여 개에 달하는 파이어 애로우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여전히 캄캄했다.
파이어 애로우에게 은신 마법인 인비저블을 시전했기 때문이다.
‘흐음.’
헨리는 파이어 애로우들을 허공에 대기시켜 두었다.
그런 다음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아진 진영들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보급 막사가 제격이겠지.’
며칠분의 식량과 무구, 그리고 비상 의약품들이 구비된 보급 막사.
헨리는 한밤중에 보급 막사에 불을 지를 예정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지전에서 맺어진 신사 협정에는 야습과 상대의 보급계를 공격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목을 노리고 있는 주제에 무슨 놈의 신사적인 협정이라는 건지…….’
애초에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이는 주제에 명예를 따진 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하지만 그 모순되는 협정 덕분에 좋은 구실이 생겼다.
신사 협정으로 절대 건드려선 안 될 불가침 조약을, 그것도 동시에 두 개나 어긴다면 명예로운 결투는 필시 개싸움이 될 터!
헨리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헨리는 마치 지휘자처럼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자 주변에 산개해 있던 무형의 붉은 화살들이 이내 물고기 떼처럼 길쭉하게 떼를 지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회전시켰다.
이에 화살 떼 또한 헨리의 손가락을 따라 끊임없이 허공을 유영했다.
헨리는 현재 마땅한 궤도를 찾는 중이었다.
적군들이 야습하여 화살을 쏘아 올릴 법한 그런 궤도를 말이다.
‘저기가 좋겠군.’
잠시 후 헨리는 오해를 빚을 만한 마땅한 궤도를 찾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쪽 방향으로 화살 세례를 쏘아 보냈다.
그리고 뭉친 화살 세례가 바닥에 닿기 직전, 헨리는 그것들을 다시 끄집어 올려 보급 막사로 쏘아 보냈다.
딱!
불화살들이 보급 막사로 향해진 순간, 헨리는 놀리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손가락을 튕겨 발동 중이던 인비저블을 취소했다.
화르륵!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수백여 발의 불꽃 화살들.
그것들은 이내 쇼난군의 보급 막사를 기점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 불이야!”
불침번의 다급한 외침.
진영 한가운데에 화마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헨리의 은밀한 이간질이 비로소 첫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