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왈레드 (3)
단검을 뱉어 낸 왈레드는 다시금 신체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변형이라기보단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살과 근육들이 액체처럼 끓어오르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그런 종류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왈레드가 실라이온을 집어삼킨 이후 무시무시한 속도로 기세가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냥 둬선 안 된다.’
이에 헨리는 곧바로 손을 모아 수인을 맺었다.
그런 다음 주문을 외워 녀석을 얼어붙게 할 5서클의 빙계 마법을 시전했다.
“혹한의 손아귀!”
손바닥에 룬어가 응집되자, 헨리는 그것을 빠르게 땅바닥을 내리쳤다.
그러자 내려친 바닥으로부터 돌고래가 튀어 오르듯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아귀가 튀어 올라 순식간에 왈레드를 덮쳤다.
콰드드득!
얼음 손아귀는 왈레드에게 물리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다.
대신 바람처럼 왈레드의 몸뚱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얼음 손아귀가 왈레드를 통과하는 순간, 왈레드는 선 채로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덩이가 되었다.
‘성공한 건가?’
일반인은 결코 부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얼음이었다.
헨리는 이를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놈을 이대로 그냥 두었다간 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지 몰랐으니까.
딱!
이어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멀리 튕겨져 나간 단검을 다시 회수했다.
‘단검에는 이상이 없다.’
묵빛의 단검에는 여전히 헨리의 혈독이 작동하고 있었다.
말인즉슨 왈레드는 헨리가 모르는 특수한 힘을 이용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맹독을 정화시켜 냈다는 것이었다.
헨리의 눈이 다시금 가늘게 좁혀졌다.
그리고 얼음덩이 속에 갇힌 왈레드를 차갑게 응시했다.
‘역시 그냥 둬선 안 되겠지.’
마음 같아선 산 채로 잡아들여 살게라의 연구실로 가져가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기엔 변수가 너무 많은 놈이었다.
또한 지금은 영지전이 진행 중이기에 시간도 촉박한 상황. 여러모로 조건이 좋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즉, 녀석은 이 자리에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거대한 쇠망치를 소환했다.
얼어붙은 적을 쇠망치로 파괴하면, 적 또한 얼음덩이처럼 통째로 산산조각이 날 테니까.
이에 헨리는 얼음덩이 속의 녀석을 주시했다. 그리고 망치를 휘두르기 위해 손짓했다.
그리고 망치가 휘둘린 순간, 헨리는 얼음 속에 갇힌 녀석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까아아앙!
이변은 망치가 빙상에 닿는 순간에도 이루어졌다.
“……!”
소환한 쇠망치의 경도는 분명히 얼음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얼음은 박살 나지 않았다. 박살은커녕 오히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힌 것처럼 강렬한 금속음만을 낳았다.
왈레드의 술수가 분명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에 헨리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얼음덩이로부터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헨리가 녀석과 거리를 벌린 그 순간.
콰아앙!
얼음 속에 갇혀 있던 왈레드가 기지개를 켜듯 온몸을 펴며 얼음을 폭발시켰다.
강렬한 폭음.
깨져 나간 얼음은 마치 수류탄이 터지듯이 수백 개의 날카로운 파편들을 주위로 흩뿌렸다.
티딩! 티딩! 티디딩!
흩뿌려진 얼음 조각들이 헨리가 전개한 매직 실드에 날아와 부딪혔다.
그리고 그것을 본 왈레드가 다시 한 번 기분 나쁜 목소리로 헨리를 비웃었다.
-퀴륵, 퀴륵, 퀴륵!
‘저 망할 놈이……!’
녀석은 애초에 처음부터 혹한의 손아귀가 통하지 않았다.
단지 혹한의 손아귀에 당한 것처럼 ‘연기’를 한 것뿐.
헨리는 화가 났다.
조롱당한 것은 둘째 치고 왜 갑자기 마법이 통하지 않게 된 것일까?
‘갑자기 왜?’
이에 수많은 가설들이 헨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헨리는 그중에서도 왈레드가 실라이온을 잡아먹음으로써 실라이온이 가지고 있던 ‘마법 저항력’을 흡수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이거…… 정말 말 그대로 키메라가 되어 버렸군.’
하지만 정령을 흡수하여 그 저항력을 활용한다는 방법은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헨리는 이내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키메라 연성술은 금지된 힘.
그 힘을 몰래 발전시켜 나갔으니 헨리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까.
헨리는 손에 쥔 콜소드를 더욱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독도 마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헨리에게 남은 것은 헥터에게 배운 검술뿐이었기 때문이다.
-퀴르륵?
녀석이 다시 변화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헨리는 녀석에게 더더욱 여유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겨눔세를 취했다.
그런데 헨리가 겨눔세를 취하고 보법을 펼치려던 순간, 왈레드의 비대한 몸집이 갑작스레 반으로 쪼개졌다.
‘저건 또 무슨……!’
아니, 쪼개진 것이 아니었다.
좀 전에 보았던 번데기가 성충으로 변태하기 위해 자신의 껍데기를 갈라 내는, 딱 그 정도의 쪼개짐이었다.
이에 헨리는 겨눔세를 취한 채 녀석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곤충의 변태 과정을 연상케 하는 그 모습은, 그런 광경 자체를 처음 보는 헨리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키르륵, 키르륵!
왈레드는 비곗덩어리 같은 거대한 몸집을, 마치 허물을 벗어 내듯이 천천히 탈피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온몸이 체액으로 축축히 젖은, 늘씬한 체형의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맙소사……!’
마치 마물의 진화 과정을 보는 듯했다.
세상 그 어떤 동식물도 저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진화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발끝까지 축축이 젖은 새로운 몸뚱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을 때, 왈레드의 몸뚱이로부터 강렬한 돌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강렬한 바람은 때때로 기이한 소리를 낸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러나 헨리는 몸에 마력을 두르고 굳건한 바위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두 눈을 부릅뜨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새롭게 변태한 왈레드를 지켜볼 뿐이었다.
우드득, 우드득.
비대한 껍데기를 탈피한 녀석은 이윽고 등을 움츠려 등짝에서부터 무언가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쿠드드득! 촤악!
‘……!’
그것은 날개였다.
마치 나방의 날개를 연상케 하는 거대하고 화려한 ‘날개’ 말이다.
-하아아……!
접혀진 날개가 기지개를 펴듯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왈레드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생물체가 되었다.
그러곤 자신에게서 뿜어지는 강렬한 바람을, 마치 상쾌한 산들바람을 음미하듯 개운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군.’
진화는 끝났다.
녀석은 왈레드가 맞았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완전히 그놈이었으니까.
하지만 머리카락을 포함한 몸뚱이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왈레드는 키가 커졌다.
그리고 없던 근육이 매끈한 갑옷처럼 둘러져 있었고, 전신이 흰색과 연두색으로 나뉘어져 부분 부분 털 같은 것들이 돋아나 있었다.
생식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의복이 필요 없는 외형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녀석은 자신의 몸뚱이에 몇 배는 될 법한 날개를 펼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녀석의 눈동자는 알프레드에게 물려받은 푸른색이 아닌 완연한 노란 빛에 주황빛 동공을 띠고 있었다.
‘괴물이로구나.’
괴물.
그것 이외엔 저것을 표현할 만한 단어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녀석은 자취를 감춘 이종족도 마족도 아닌, 새롭게 탄생한 개체였으니까.
이윽고 바람이 멎었다.
그리고 바람이 멈추면서 턱을 들고 개운함을 표현하던 왈레드의 고개 또한 천천히 아래로 내려졌다.
-킥킥킥킥!
녀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헨리와 눈을 마주치면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했다.
“후우…….”
저급한 도발.
이에 헨리는 더 이상 왈레드를 동정하지 않기로 했다.
동정심으로 녀석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에는 왈레드는 이미 너무 먼 곳까지 가 버렸다.
생각을 마친 헨리는 두 개의 코어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화르륵!
오러는 사용자의 감정을 대변하는 가장 좋은 창구이기도 했다.
헨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헨리가 피워 낸 오러는 전혀 무덤덤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에메랄드 빛의 불꽃.
그것이 바로 현재 헨리의 심정이었다.
‘헤이스트.’
콰앙!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갔다.
헨리는 헤이스트를, 왈레드는 등에 돋아난 두 날개를 이용해 순식간에 서로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헨리가 횡축으로 검을 그었다.
검은 순식간에 궤적을 그렸다.
그리고 검이 궤적을 그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왈레드의 눈빛은 헨리의 동공이 아닌 칼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홱!
고개를 뒤로 젖혀 검을 피하는 왈레드.
그것은 흡사 서커스의 곡예를 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녀석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순간, 왈레드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순식간에 앞으로 접혀졌다.
‘이런!’
이에 헨리는 발을 들어 올려 왈레드의 배를 찼다.
그 덕분에 가까스로 몸뚱이는 날개의 범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궤적을 그리던 헨리의 검은 그러질 못했다.
콰드득!
간발의 차이.
그래도 검날의 전체가 아닌 콜소드의 끝부분만이 날개에 잡아먹혔다.
-킥킥킥!
헨리가 칼끝을 붙잡히자 녀석은 다시금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홍염의 가시!”
이에 헨리는 붙잡힌 칼끝을 지팡이 삼아 거대한 화염의 폭발을 일으켰다.
그런데 분명히 마법이 발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폭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푸쉬식!
“……!”
대신 마주 접힌 왈레드의 날개로부터 거뭇한 연기가 조금씩 빠져나왔다.
헨리의 폭발이 왈레드의 접힌 날개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 했다는 뜻이었다.
연기는 마치 시골집의 굴뚝처럼 몹시 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폭발이 끝난 직후, 접혔던 왈레드의 날개가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킥킥킥킥.
날개가 벌어지면서 가려져 있던 왈레드의 얼굴이 다시금 드러났다.
왈레드는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헨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에 헨리는 굳은 표정을 하고서 왈레드와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벌린 헨리는 날개에 붙잡혔던 콜소드의 끝을 바라보았다.
날끝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더불어 폭발 속에 검이 갇혀 있다 보니 그 피해를 고스란히 흡수해 칼끝이 몹시 상해 있었다.
‘……엉망이 됐군.’
이에 헨리는 망가진 검을 역소환시킨 후 새로운 콜소드를 소환했다.
여분의 검이라면 불카누스가 충분히 만들어 주었으니까.
“착검.”
지이잉.
손에 새로운 콜소드가 쥐여졌다.
그리고 헨리는 다시 왈레드를 바라보았다.
‘과연, 반의 말대로군.’
탈피가 끝난 왈레드는 확실히 강력한 존재였다.
마도사급 마법이 전혀 통하지 않고 신체 능력 또한 훨씬 강력해졌으니까.
그리고 직접 겪어 보니 왜 반이 고전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드득, 우드득!
헨리는 천천히 목 관절을 풀었다.
녀석은 강했다.
하지만 강하다고 해서 자신보다 강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헨리 모리스니까.’
환생하면서 육체가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에 명백히 전직 대마법사 출신의 헨리 모리스의 영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키키키키!
왈레드도 그런 헨리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녀석은 전보다 더욱 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헨리에게 조소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헨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생각했다.
‘사람의 탈을 뒤집어썼지만 영락없는 짐승이구나.’
껍데기는 사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체가 강화되었다고 한들 결국 말을 하지 못하니 한낱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에 헨리는 손에 쥔 검을 다시금 강하게 움켜쥐었다.
결국 녀석이 짐승이든 괴물이든 간에 자신이 굴복시키지 못할 놈은 없었으니까.
헨리의 오러가 더더욱 거세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