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결투 (3)
해가 높이 떴다.
높은 해는 결투를 알리는 신호다.
테헤른 지방에는 때아닌 일만의 군사가 집결했다.
산새조차 숨소리를 죽였다.
사박사박.
평야의 들풀을 밟는 군화 소리만 귓전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창을 든 병사들은 사방을 주시했고 방패를 든 병사들은 긴장을 삼켰다.
지평선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가고 나니, 평야 저편에서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병사들이 창을 꼬나 쥐고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저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알프레드의 이더웨더군이었다.
백병전이 일어날 테헤른 평야.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몸을 숨기거나 도망칠 곳이 없는 드넓은 대지. 그곳에서 두 개의 군대가 마주쳤다.
이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전투가 벌어질 땅이다.
각 군의 선봉에 선 대가문주들이 군마 위에 앉아 서슬퍼런 눈빛을 뿜어냈다.
“얼추 비슷하군.”
알프레드는 눈앞에 정렬한 쇼난군의 수를 얼추 가늠해 보았다.
어림잡아 삼천.
자신이 데리고 온 군사들과 비슷한 숫자였다.
‘당연히 나와 비슷하게 데리고 왔겠지. 백병전에서 밀려 버리면 단숨에 승부가 나 버릴 테니까.’
각자가 오천의 군사로 협의를 보았으니 생각하는 것 또한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데리고 온 오천의 병사들 중 보병에 해당하는 삼천의 병사를 테헤른 평야로 데리고 왔다.
물론 숫자를 똑같이 맞추었다고 해서 무작정 난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알프레드에겐 아이젠의 목을 쳐야 한다는 목표도 있었지만 아서스가 왕궁을 점거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벌어 둘 의무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알프레드가 앞장서서 말했다.
“지휘관 결투를 신청한다!”
“바라던 바다!”
알프레드의 외침에 아이젠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목청껏 포효했다.
지휘관 결투.
그것은 백병전을 벌이기 전에 각 군의 대표 지휘관이 출전해 일대일 결투를 벌이는 것을 뜻했다.
이는 몹시 중요한 결투였다.
자기 군을 대표하는 무장이 승리를 쟁취하면, 적군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뿐더러 아군의 사기 역시 드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림버!”
“예!”
지휘관 결투가 받아들여지자 알프레드가 먼저 대결에 사용할 천부장의 이름을 호명했다.
호명된 남자의 이름은 림버.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남성으로 그는 젊은 나이에 기사단에 입단해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더 빠른 출세를 위해 기사단이 아닌 알프레드의 사병대를 택한 탐욕적인 인물이었다.
이를 들은 아이젠이지지 않겠다는 듯 외쳤다.
“라이논!”
“예엣!”
라이논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일전의 샤하트라 토벌 전에서 고용되었던 인물로, 이젠 쇼난군 내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가진 S급 용병 출신의 천부장이었다.
그는 짙은 회색빛으로 무장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아이젠의 블리킨과 유사한 두 자루의 양날 도끼를 쌍검처럼 뽑아 들었다.
“오오오오!”
라이논은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덩치라면 림버에 뒤지지 않았다.
아이젠이 일부러 덩치 큰 라이논을 호명한 이유는 알프레드의 천부장에게 덩치조차도 뒤지기 싫은 마음 때문이었다.
쿵! 쿵!
두 사람은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제법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서슬 퍼렇게 부딪히는 두 사람의 살기.
두 사람은 닮은 점이 참 많았다.
림버는 평민 출신의 재능 있는 천재 기사였고 라이논은 평민 신분의 S급 용병 출신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된 빼어난 평민들의 결투.
두 사람은 각자 육천에 해당하는 눈동자를 등에 업고서 이가 덜덜 떨리는 투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시작하라.”
부우우우!
저들은 귀족이 아니었으므로 허례허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뿔 나팔이 시작을 알렸고 두 거구는 터질 듯한 근육들을 앞세워 순식간에 격돌했다.
마치 두 마리의 성난 버팔로가 격돌하듯이 말이다.
콰앙!
주인의 자존심을 건 사냥개들의 첫 번째 혈투가 시작되었다.
* * *
쇼난군 천부장, 캄사디아.
그 또한 소문난 용병 출신으로 뒤늦게 쇼난군에 면접을 봐 우연찮게 쇼난군 천부장의 자리를 꿰찬 몸이었다.
그래서인지 천부장들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렸으며, 그에 따른 서열도 제일 낮은 편이었지만, 젊은 만큼 무력은 꽤나 센 편이었다.
헨리는 그런 캄사디아에게 평야의 좌측에 위치한 테헤른 협곡을 맡겼다.
그것도 캄사디아 혼자에게 말이다. 대신 그에게는 천오백에 해당하는 넉넉한 군사들을 주었다.
‘쩝, 나는 백병전 쪽이 더 취미인데 말이지.’
그러나 캄사디아는 내심 아쉬움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헨리가 캄사디아에게 내린 임무는 협곡전에서의 승리가 아닌 협곡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버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협곡의 수비가 결코 하찮은 임무는 아니었다.
만약 캄사디아가 임무에 실패해 협곡이 뚫린다면 평야에서 전투를 벌이던 쇼난군은 순식간에 배후가 붙잡혀 양쪽에서 공격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영지전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캄사디아의 수비는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임무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캄사디아는 내심 헨리의 임무 배분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가 S급 용병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뛰어난 용병술도 천재적인 지략도 아닌, 짐승 같은 싸움 실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심 평야에서 벌어질 백병전을 기대하고 있었건만, 헨리는 그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협곡의 수비 임무를 배정해 주었다.
‘헨리라고 했던가? 그 참모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날 배치시킨 거야?’
캄사디아는 문득 좀 전까지 진행되었던 전략 회의를 떠올렸다.
사실 그것은 회의라고 보기엔 좀 어려운 면이 있었다.
순전히 헨리 혼자서 전략을 세워 아이젠이 아닌 헨리가 모든 천부장들에게 임무를 배분해 주었으니까.
이에 헨리의 명성을 듣지 못한 몇몇의 천부장이 불만을 재기하려 하였으나, 아이젠의 눈치 때문에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이걸 먼저 찢으라고 했던가?’
헨리는 그에게 천오백이라는 넉넉한 군사와 더불어 두 장의 마법 스크롤을 손에 쥐여 주었다.
스크롤 안에 담긴 마법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단지 이 스크롤 안에 담긴 것들이 너의 걱정거리를 말끔히 해소시켜 줄 것이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이에 캄사디아는 스크롤을 찢기 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펼쳐진 테헤른 협곡을 응시했다.
‘좁긴 더럽게 좁네.’
테헤른 협곡은 자연이 만들어 낸, 정정당당한 전투를 가능케 하는 구조였다.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암벽은 산맥처럼 우거져 있었고, 유일한 길목인 협곡 사이는 열 사람이면 충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넓이가 협소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티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적은 숫자로도 얼마든지 수비해 낼 수 있는 곳이 바로 테헤른 협곡이었다.
부욱!
캄사디아는 헨리가 명령한대로 스크롤을 찢어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스크롤로부터 진한 에메랄드 빛 마력이 안개처럼 뿜어지기 시작했다.
“오오!”
용병 시절에도 마법 스크롤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스크롤이 마법을 토해 내자 캄사디아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행히 이더웨더군의 등장은 아직이었다.
캄사디아는 전략 회의가 끝나자마자 헨리의 지시대로 소수의 기병대를 이끌어 가장 먼저 협곡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스크롤은 끊임없이 녹색 안개를 뿜어냈다.
그러나 안개는 생각보다 밀도가 높은지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못했고 협곡 바닥 가득히 빗물처럼 고였다.
그리고 마침내, 고인 안개가 하천을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해졌을 무렵이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캄사디아는 안개로부터 뿜어지는 지독한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부글부글.
“음?”
낮게 갈린 안개는 순식간에 협곡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내 곧 바닥의 토양을 질척이게 만들더니 끈적거리는 점성을 만들어 냈다.
‘늪?’
늪.
그것은 늪이 맞았다.
왜냐하면 헨리가 캄사디아에게 준 마법 스크롤은 무려 5서클에 해당하는 ‘악취 나는 수렁’을 컨버전시킨 스크롤이었으니까.
늪은 퍼진 안개만큼이나 점점 더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이라면 도저히 늪을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진 늪은 순식간에 협곡 사이에 자신의 영역을 표시했다.
“워우……!”
나지막히 감탄사를 내뱉는 캄사디아.
캄사디아는 감탄해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척 보기에도 깊어 보이는 늪.
게다가 토악질이 날 만큼 지독한 악취까지 풍겼다.
이 정도 늪이라면 그 어떤 대군이 몰려와도 능히 막아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확실히 이 정도 늪이라면 얼마든지 협곡을 사수할 순 있긴 하겠어. 하지만…….’
늪은 몹시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
하지만 늪으로부터 든든함을 느낄수록 캄사디아는 더더욱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 늪이면 오백의 병사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왜 하필 나에게 천오백이나 준 거지?’
평야의 백병전에 투입된 삼천의 병사.
그리고 병사들의 의식주를 책임질 이백의 보급병.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할당된 천오백의 병사들.
도합 사천칠백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렇게 되면 고작해야 삼백밖에 안 남게 되는데 헨리는 한 명의 천부장과 삼백의 병사들을 데리고 테헤른의 우측에 해당하는 ‘고지’를 맡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놈이야.’
하지만 자신에게 늪의 스크롤을 준 것처럼 뾰족한 수가 있겠거니 하고 대충 넘기기로 했다.
캄사디아는 걱정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으니까.
부우우우!
그때 협곡 너머로 이더웨더군의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부우우우!
뒤늦게 도착한 아군 후발대의 뿔피리 소리 또한 들려오기 시작했다.
“때 맞춰 왔네.”
자신은 기병대와 함께 먼저 도착하였으니, 저들이 늦게 도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에 캄사디아는 늪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을 끝마친 후, 후발대를 맞이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 참,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캄사디아는 품속에서 한 장의 스크롤을 추가로 꺼내 들었다.
헨리가 캄사디아에게 내민 마법 스크롤은 총 두 장.
걔중에 하나는 ‘악취 나는 수렁’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에도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걸 나중에 찢으라고 했었지.’
헨리는 스크롤을 찢는 것에 순서를 부여해 주었다.
캄사디아는 먼저 악취 나는 수렁의 스크롤을 찢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나머지 한 장을 찢으면 되었다.
부욱!
이에 캄사디아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스크롤을 찢어 바닥에 던졌다.
물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멀찍이 떨어져서 스크롤을 던졌다.
‘이번에도 늪 같은 게 나와서 그 안에 휘말려 버리면 곤란하니까.’
늪 따위에 갇혀 죽는 비참한 말로는 어떻게든 사양이었다.
이에 찢어진 스크롤로부터 검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프스스스…….
‘검은색?’
캄사디아는 이번에도 호기심 짙은 눈동자로 그것을 응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펙트가 굉장히 짧았다.
쿵!
쿠궁! 쿠구궁!
“음?”
뿜어진 검은 안개 사이로 쏟아지는 육중하고 거대한 크기의 갑옷들.
그것은 마치 칠흑과도 같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숯검정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검은색이었다.
“갑옷?”
그리고 그것은 갑옷이 확실했다.
이에 캄사디안이 호기심에 갑옷을 들춰 보기 위해 갑옷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부웅!
“……!”
철걱! 철걱!
철거걱!
갑작스레 허공으로 떠오르는 흑갑옷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허공에서 집합을 이루더니 이내 곧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흑갑옷의 투구가 몸뚱어리에 장착되어진 그 순간!
번쩍!
텅 비어 있던 흑투구로부터 붉은색 안광이 번뜩였다.
‘이 무슨……!’
그것은 마치 맹수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전신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짙은 살기와 맹렬한 투기!
캄사디아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찰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귓전을 때렸다.
이에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흑갑옷 또한 바닥에 착지하며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쿠웅……!
협곡 가득히 나풀거리는 먼지.
이에 흑갑옷이 말했다.
“네놈이로군, 헨리가 처리하라는 녀석이.”
흑갑옷의 정체는 다름 아닌 ‘헥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