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눈치 싸움 (7)
“그렇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한 개비의 궐련으로 간신히 숨통을 틔운 시레드는 또다시 끔찍한 금단증상을 겪고 싶지 않아 더더욱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시레드의 대답은 진실이었다.
제국 최고의 정령가 집안의 차남으로서 진화의 알에 대한 사용법은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이계의 것이라기에 사용법이 다소 까다로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고작해야 알을 약재처럼 갈아 진액을 추출하여 강력한 마력과 섞어 먹이는 것이 전부였다.
손쉬운 활용법. 게다가…….
‘현 제국에서 나보다 강한 마력을 지닌 놈은 없다.’
적어도 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어쩌면 엘라곤은 제국의 그 어떤 정령들보다 강력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시레드에 대한 볼일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볼일을 마친 헨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조그마한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유리병 속에 든 것을 본 시레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건 대체……?”
“왜긴, 살아서 나가고 싶다며?”
“그, 그렇긴 한데 그건…….”
“그럼 가만히 있어. 이게 널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니까.”
헨리가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나르웜’이었다.
케일의 입막음을 위해 사용되었던 나르웜.
헨리는 이번에도 보다 확실한 보안성을 위해 시레드의 심장에 나르웜을 박아 넣을 생각이었다.
“잘 들어. 이놈은 식성이 괴랄한 놈이라서 숙주의 마력을 먹고 사는 놈인데 그마저도 입맛이 까다로워서 평생 동안 두 종류 이상의 마력을 섭취하지 않아.”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잠자코 듣기나 해. 그리고 이놈은 숙주의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데 만약 억지로 이놈을 없애려 하거나 기존에 먹던 두 개의 마력이 아닌 다른 마력이 이놈 입에 닿는 순간 바로 자폭해 버려.”
“……!”
“그러니 무슨 말인지 잘 알겠지? 그리고 이놈은 지금 내 마력을 섭취한 상태야. 그럼 이제 이놈이 섭취할 수 있는 마력은 한 종류뿐이라는 거지.”
말을 마친 헨리는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런 다음 여전히 쇠사슬에 감긴 시레드의 몸뚱이 위로 나르웜을 풀어 주었다.
-시에에…….
날카로운 주둥이를 앞세워 시레드의 살갗을 파고드는 나르웜.
이어서 헨리가 말했다.
“그리고 말인데, 나르웜은 한 번 맛본 마력을 주기적으로 섭취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자폭해 버리는 습성이 있어. 그러니 넌 늦어도 일주일마다 한 번씩은 나한테 마력을 공급받아야 해.”
“크윽, 크으…… 펴, 평생 동안 말입니까?”
“당연하지.”
“크흐흑…….”
“너무 슬퍼하지 마. 바꿔서 이야기하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나를 만나야 하니 적어도 핑크 스왐프가 끊길 일은 없다는 얘기잖아?”
악마 같은 헨리의 속삭임.
하지만 그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평생 동안 핑크 스왐프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말에 안도해 버린 건 시레드,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니 나가서도 입단속 잘하자고, 시레드.”
딱!
촤르르륵!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마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시레드의 전신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 사라졌다. 시레드는 반나절 만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은 네가 가져도 좋아.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 이 정도도 못 받으면 억울하잖아?”
“크흑, 흐흐흑!”
“고맙다는 말 안 해?”
“가, 감사합니다, 크흐흑……!”
숨죽여 흐느끼는 시레드.
비참하고 수치스러웠지만 손은 이미 바닥에 흩어진 핑크 스왐프들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시레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볼일을 끝마친 헨리는 즉시 손가락을 튕겨 모몬트 마을을 벗어났다.
* * *
모몬트 마을을 벗어난 헨리가 도착한 곳은 살게라에 위치한 자신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시레드에게 그런 정보를 들었으니 엘라곤의 진화를 더 미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잡아, 붙잡으라고!”
“거기 막아!”
헨리는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 연구실 옆에 마련된 블랙 티어 공방을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전과는 달리 눈에 띄게 살이 붙은 노예들이 보강된 장비로 최선을 다해 사이클론 히드라와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잘하고들 있네.’
토리안의 보고에 의하면 장비를 보강하고 식생활을 개선시켜 주니 전보다 생산성과 생존율이 대폭 상승했다고 한다.
노예들이 전에 없던 대우를 받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헨리는 그런 보고를 들으며 생각했다.
결국 저들도 과거에는 귀족이었지만 당장의 생사가 눈앞의 밥 한 그릇에 달려 있으니, 점점 더 현재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라고 말이다.
‘부질없는 놈들.’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다.
부도, 의식주도, 목숨도 말이다.
이에 헨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라곤.”
-뀨뀨!
알프레드를 상대한 이후, 엘라곤은 부쩍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래서 헨리가 부를 때마다 혹시 이번에도 그러한 놀이가 준비되어 있을까 싶어 내심 기대하는 눈치를 보였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이에 헨리는 엘라곤의 가슴팍에서 진화의 알을 꺼냈다.
마치 흑요석을 닮은 진화의 알.
이것을 곱게 갈아 진액을 추출한 다음 강인한 마력과 섞어 물약처럼 먹이면 ‘진화’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분쇄.”
파삭!
헨리가 주문을 외우자 반질거리던 진화의 알이 순식간에 고운 입자가 됐다.
헨리는 이어서 연구실 한쪽에 쌓아 둔 자신의 마력을 농축시킨 녹색 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런 다음 병의 주둥이 위에 분쇄한 가루를 움켜쥐며 주문을 외웠다.
“바위 짜기.”
화아악!
돌도 쥐어짜면 물이 생긴다는 말이 있다.
바위 짜기는 그러한 말장난에서 비롯된 연금학파의 추출마법이었다.
헨리가 바위 짜기를 시전하자 가루를 쥔 손으로부터 몇 방울의 하얀색 물방울이 손끝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똑, 또르르…….
정확히 다섯 방울.
진화의 알로부터 나온 진액은 모두 다섯 방울이었다.
이윽고 헨리의 마력 농축액에 진액 다섯 방울이 떨어지자 녹색을 띠던 농축액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뀨우?
엘라곤은 그것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끓어오르던 농축액의 색깔이 갑작스레 검게 변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뀨욱?
물의 정령조차 기겁하는 냄새.
엘라곤은 그만 지독한 악취에 고개를 홱 돌린 후 그것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음?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헨리도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악취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악취쯤이야 마법으로 얼마든지 지우면 되니까.
이에 헨리는 엘라곤의 코를 마비시켰다.
“패럴라이즈.”
후각은 오감 중에 가장 예민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쉽게 피로해지며 후각을 마비시키면 냄새 또한 맡지 못하게 된다.
헨리는 엘라곤의 코를 마비시킴으로써 가볍게 악취 문제를 해결했다.
부글부글…….
하지만 악취는 해결했다곤 하지만 구정물 같은 시커먼 액체가 주는 특유의 거부감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에 헨리는 이번에도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차라리 얼려서 주면 어떨까 싶어 끓어오르던 농축액을 꽁꽁 얼려 버렸다.
“프로즌.”
쩌저적!
순식간에 얼어붙는 농축액.
이윽고 시커먼 얼음덩어리가 완성되었다.
헨리는 완성된 시커먼 얼음을 들고서 구석으로 고개 돌린 엘라곤을 불렀다.
“엘라곤?”
-뀨?
헨리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엘라곤.
“얼음 먹자.”
-뀨뀨?
엘라곤은 얼음의 속성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씩 혼자서 살게라의 얼음을 주워 먹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가 처음 보는 형태의 얼음을 가지고 오자 엘라곤 또한 신기해하며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뀨뀨.
킁킁킁.
그러나 시커먼 모양새는 여전히 왠지 모를 꺼림칙한 거부감을 자아냈다.
이에 엘라곤이 코를 대고 얼음의 냄새를 맡아 보았으나 애석하게도 엘라곤의 후각은 이미 마비된 상태, 악취 따위가 날 리가 없었다.
헤릅!
이어서 엘라곤은 얼음을 한번 핥아 보았다. 그러고는.
-뀨! 뀨뀨뀨! 뀨우!
‘그, 그렇게 맛이 없나?’
혀끝을 강타하는 해괴망측한 맛에 격렬하게 반항하는 엘라곤.
하지만 맛이 없다고 해서 먹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엘라곤, 먹어야 해. 이건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거야.”
-뀨! 뀨뀨뀨!
그러나 그럴수록 더더욱 격렬하게 반항하는 엘라곤.
엘라곤이 아무리 아무 얼음이나 잘 먹는 정령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그렇기에 쓰고 맛없는 것은 당연히 싫어할 수밖에 없는 노릇.
이윽고 둘 사이에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다.
‘어쩔 수 없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먹이는 수밖에 없다.
이에 헨리가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슬립.”
-뀨?
갑작스레 쏟아지는 졸음.
엘라곤은 그제야 자신의 둥지가 자신에게 모종의 술수를 부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뀨! 뀨뀨……!
엘라곤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러나 엘라곤이 아무리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최상급 정령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헨리의 마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큐, 큐큐…….
감기는 눈을 어떻게든 치켜뜨며 침 줄기 같은 물줄기를 내뱉는 엘라곤.
엘라곤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 수단, 워터 브레스였다.
“소용없다, 이 녀석아!”
이에 헨리는 바닥에 흩뿌려진 물줄기를 클린으로 청소한 뒤, 쓰러진 엘라곤의 입안에 시커먼 얼음덩어리를 집어넣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얼어 있던 농축액이 천천히 녹으며 자연스럽게 엘라곤의 목구멍 속으로 액체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큐우, 큐욱……!
끔찍한 맛.
형용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은 맛이 엘라곤의 미뢰를 강타했다.
그러자 분명히 깊이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라곤의 미간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엘라곤의 입 속에 스며들어 사라진 순간.
화아아악!
엘라곤의 전신으로부터 새하얀 광명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시작이다……!’
물과 얼음, 그리고 독과 치유의 속성을 지닌 최초의 최상급 정령.
게다가 그 개체 수까지 희박하다는 용의 형상을 지닌 엘리라곤의 후손.
헨리는 궁금했다.
타고난 재능만 놓고 보자면 단연 최고라고 칭할 만한 엘라곤이 여기서 한 단계 더 성장을 이룬다면, 과연 어떠한 존재로 거듭날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령왕, 반드시 정령왕이어야만 한다!’
역대 정령사들 중에서도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헨리는 더더욱 간절하게 바랬다.
검과 마법, 그리고 정점에 달한 정령술까지 손에 넣은, 자신의 강력하고 압도적인 미래를 말이다.
이윽고 광명이 멎은 순간, 헨리는 진화를 마친 엘라곤과 마주할 수 있었다.
* * *
“후, 후작님!”
집사는 몰골이 되어 돌아온 알프레드 후작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어디서 몰매라도 맞고 온 듯한 모양새.
알프레드의 표정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누군가를 탓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베르는 이미 죽어 있었고, 본인은 최상급 정령을 둘이나 부리는 더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라곤 한 마리조차 제압하지 못해 도망치는 신세였으니까.
그 때문에 알프레드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연속된 실패에 의한 끝없는 자기 비하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비참한 신세로구나…….’
부정적인 생각은 끊임없이 무기력함을 낳았다.
그 탓에 알프레드는 곧 시작될 아이젠과의 결투에서조차 자신감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후작의 눈치를 보던 집사가 말했다.
“저…… 후작님, 지금 응접실에 후작님을 뵙기 위해 황궁에서 오신 손님이 계십니다.”
“황궁? 누가 찾아왔단 말이더냐?”
“그게 ‘드라칸 로티크’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이온데…….”
‘드라칸?’
아서스의 명령 이외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비밀 집단 역탑의 주인.
그런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후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 당장 안내해라! 아, 아니 그 전에 옷부터 갈아입고!”
알프레드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