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눈치 싸움 (3)
앙켈만 또한 무슈와 같았다.
하즈와 독대하게 된 헨리는 오히려 다른 시장들보다 훨씬 더 부담 없이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경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무렵, 하즈의 얼굴은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반응이 왜 그래?”
“……그냥 제 인생도 참 기구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이제야 좀 편히 쉬나 싶었다.
그동안 하즈는 헨리가 고용해 준 전문 경영 팀의 비호 아래에서 두둑한 휴가 수당까지 챙겨 가며 평생 누리지 못한 휴가들을 몰아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선 다짜고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니?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던 하즈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넌 하던 대로 앙켈만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전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이곳을 지켜야지. 앙켈만은 항구도시이니만큼 다른 곳에 비해 물자가 넉넉할 것 아냐? 그러니 괜히 엄한 곳으로 내빼서 물자 뺏기지 말고, 앙켈만이나 지키고 있으라고. 그럼 우리가 알아서 지켜 줄 테니까.”
“그래도……!”
“쓰읍!”
“……알겠습니다.”
눈앞의 헨리가 정말로 대마법사의 제자라면 확실히 믿음직스럽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이 주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선 아무리 견고하다고 일러 주어도 불안한 게 바로 안전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부턴 남은 예산 전부를 쏟아부어서 식량과 무기들을 매입해. 뭣하면 부두 노역자들까지 끌고 와서 수성전을 펼쳐야 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 앙켈만은 수성전을 벌이기엔 성벽이 너무 부실한데요?”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 이미 성벽을 보수해 줄 훌륭한 기술자들을 섭외해 놓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돈이 생기는 대로 물자들을 매입하고 성벽 증축 허가서나 한 장 작성해 둬.”
하즈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헨리의 말대로라면 영지전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대륙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란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오히려 헨리의 말대로 연대 협약을 맺은 자유도시가 그나마 안전한 축에 속했다.
“전달 사항은 이걸로 끝. 그럼 텔레포트 게이트는 알아서 지어 놓고 갈 테니 너는 그렇게 알고 시킨 일이나 잘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이윽고 헨리는 앙켈만 시청 지하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했다.
물론 이번에도 앙켈만의 이름을 따서 앙켈만 게이트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럼 대충 준비는 끝난 건가?’
이로써 헨리는 연대 협약을 맺어 놓은 모든 자유도시를 대상으로 전쟁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준비를 마친 헨리는 다음 계획의 실행을 위해 막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호출권 한 장이 진동했다.
‘호출권?’
헨리의 품속에는 여러 장의 호출권들이 들어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여러 명에게 호출권을 나눠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울리고 있는 호출권의 주인은 다름 아닌 ‘토리안’.
그 또한 혹시나 싶은 마음에 한 장 쥐여 준 것이긴 했으나 사실상 토리안은 평생 동안 호출권을 쓸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 토리안이 호출권을 사용했다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에 헨리는 곧바로 살게라로 급히 이동했다.
* * *
“헨리 님!”
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토리안은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헨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이에 헨리가 그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진정하세요. 갑자기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 알프레드 후작이 왔습니다!”
“예?”
“지금 슬란 협곡에 알프레드 후작이 와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오베르를 만나기 위해서요!”
“예에?”
토리안의 보고에 헨리는 맞물리던 톱니바퀴 몇 개가 이탈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뜻이었다.
심히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알프레드가 찾아오다니?
게다가 뜬금없이 오베르는 왜 찾는다는 말인가?
그 순간, 헨리는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을 번개같이 떠올릴 수 있었다.
‘진화의 알!’
오베르가 죽은 이후로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베르는 진화의 알을 대가로 알프레드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거래를 하려고 했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로군.’
게다가 시기를 따져 보았을 때, 지금 오베르를 만나겠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화의 알을 손에 넣어 전력을 보강하겠다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 시국에 아이젠이 관리하는 살게라를 찾아오다니?
헨리는 알프레드의 뻔뻔함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냥 혀만 내두르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검문소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데 불과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걸 헨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떡한담?’
시간은 촉박했고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여차하면 알프레드를 죽이고 곧바로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뀨?
헨리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둥지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감지한 엘라곤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엘라곤?’
엘라곤과 눈이 마주친 헨리.
그리고 그 순간, 헨리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묘책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 * *
“다시 한 번 묻겠다. 지금 대공작님의 서신을 가지고 온 나의 길을 막는 것이더냐?”
“……아무리 서신을 가지고 오셨다고 해도 이곳 살게라는 아이젠 후작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감히 출입할 수 없습니다.”
수문장 번트.
그는 그가 맡은 소임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공작의 허가서를 가지고 온 알프레드를 들여보내 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번트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살게라는 추방자들의 감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번트는 어울리지 않게 원리 원칙을 고수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에 알프레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마음 같아선 번트의 목을 치고 그냥 뚫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이곳은 아이젠이 관리하는 땅.
아주 조그마한 흠이라도 잡히면 앞으로의 영지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최대한 행동거지를 조심해야만 했다.
그렇게 대치하기를 한참, 살게라 협곡의 안쪽에서부터 토리안이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번트는 황급히 토리안과 시선을 교환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토리안.
어떻게든 대비책이 마련되었으니 이제 그만 출입을 허락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수신호를 받은 번트는 그제야 묵은 한숨을 토해 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알프레드에게 길을 터 주었다.
“……통과!”
찌릿!
이에 알프레드는 번트를 한참이나 노려보며 말했다.
“변방으로 쫓겨난 주제에 아직까지 유세라니……! 네놈은 내가 반드시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
알프레드는 번트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쏘아붙인 후 천천히 다시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휘이잉!
검문소를 지나 살게라 협곡에 들어서자 살게라 특유의 거친 눈보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프레드의 안내는 소식을 전하러 온 토리안이 맡았다.
“후작님의 안내를 맡을 토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여전히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듯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토리안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에 토리안이 이를 부득 갈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자식!’
알프레드와 토리안은 사실 구면이었다.
과거에 황궁 사교 모임을 통해 몇 번 정도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의 토리안은 개국공신의 가족이었으므로 귀족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알프레드는 토리안이 개국공신파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애초부터 개국공신들의 가족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당시의 중앙귀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개국공신들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죽음뿐이었다.
물론 고작해야 눈인사였으니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리안은 알프레드 놈들로 인해 수많은 가족을 잃은 몸.
그러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알프레드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토리안은 사적인 감정으로 헨리의 일을 그르칠 남자가 아니었다.
이에 웃는 낯짝을 한 토리안이 알프레드에게 친절히 안내를 시작했다.
“여기 길쭉한 협곡을 가로질러 가시면 추방민들이 모여 사는 추방촌이 나옵니다.”
“그곳에 오베르가 있다는 건가?”
“아뇨, 오베르는 없습니다.”
“뭐라고?”
오베르가 없다는 소식에 갑작스레 치솟는 분노.
그렇잖아도 번트 때문에 몹시 예민한 터였다.
그런데 오베르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당사자가 없다니?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베르가 없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이냐!”
치솟는 분노에 마차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정령왕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가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 꿈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토리안은 전신을 파고드는 살기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준비해 온 다음 말을 내뱉을 수가 있었다.
“에, 엘리라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토리안의 외침에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살기.
엘리라곤이라면 물의 최상급 정령들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에 알프레드가 다시금 토리안을 다그치며 물었다.
“엘리라곤이라니? 이곳에 엘리라곤이 있다고?”
“그, 그렇습니다. 오베르가 이곳으로 이송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어느날 갑자기 설산에서 엘리라곤이 내려와 오베르를 납치해 갔습니다.”
“……!”
알프레드의 표정에 만감이 교차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을 때 짓는 그 표정이었다.
알프레드는 강렬하게 확신했다.
‘확실하다! 엘리라곤이 오베르가 가진 진화의 알을 느끼고 오베르를 납치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수많은 크림슨 일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오베르를 납치해 갈 이유가 없었다.
이에 토리안이 알프레드의 눈치를 보며 준비해 온 다음 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엘리라곤이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베르를 잡아먹은 엘리라곤은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추방촌에 내려와 추방민들을 공격하였고, 현재 추방촌에는 생존자들이 거의 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굳이 추방촌에 들러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미 추방민들의 목숨 따위는 알프레드의 흥밋거리가 아니었다.
이에 알프레드가 토리안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엘리라곤은? 엘리라곤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 그게 워낙에 출현이 신출귀몰하여 그것은 저희도 잘…….”
그때였다.
쿵!!
토리안이 엘리라곤의 행방에 대해 모르쇠를 표하는 순간, 알프레드가 타고 있는 마차 위로 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낙석?’
알프레드는 자연스럽게 낙석을 떠올렸다.
그러나 토리안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 놈이 나타났습니다, 후작님!”
“놈? 무슨 놈을 말하는…… 설마?”
“엘리라곤입니다! 엘리라곤이 지금 후작님의 마차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쿵!!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묵직한 낙석 음.
이번엔 좀 전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묵직한 것이었다. 마치 경고를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마차의 위에는, 아니, 살게라 협곡의 위에는 마법으로 얼음덩어리를 만들고 있는 헨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