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뜻밖의 준비 (3)
샤하트라 왕조의 역사 강의는 사막 역사에 대한 설명보다 세 배는 더 길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 게다가 환술 쪽에 있어 비람만큼 최고의 스승이 없기에 헨리는 잠자코 지루함을 견뎠다.
그렇게 한참 뒤, 드디어 샤하트라 왕조의 일대기를 보여 주는 환술 쇼가 끝났다.
이에 사방에 흩뿌려진 어둠이 걷히고 주변은 칸의 서고로 제 모습을 되찾았다.
비람이 말했다.
“그럼 샤하트라 왕조에 대한 역사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루하긴 했으나 시각물이 톡톡 튀는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비람만의 독특한 강의였다.
하지만 강의를 모두 들은 직후, 헨리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환술 쇼 때문에 그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았지만 쓸데없는 것투성이로군.’
지루한 강의였지만 그래도 헨리는 꼼꼼하게 비람의 말을 경청했다.
혹시라도 그 쓸데없는 말들 속에 숨은 진주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비람은 헨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애국에 심취한 늙은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막과 왕조의 역사 전체를 아울러 정작 헨리가 듣고 싶어 하는 ‘진짜 역사’에 대한 것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질문했다.
“대제사장님.”
“예, 헨리 공.”
“혹시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호기심은 공부를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니까요.”
‘말은 그럴듯하게 하네.’라고 생각했다.
이에 헨리는 정말로 편하게 질문키로 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대제사장님. 대제사장님께선 여태껏 말씀해 주신 사막과 왕조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환술을 배움에 있어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무엇을 배우든 그 힘이 발생한 근본부터 배우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래서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아뇨, 제 생각에 대제사장님께선 근본보다는 그 힘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럼요?”
“저 또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만약 대제사장님의 말씀대로라면 환술이 무슨 이유에서 만들어졌고, 어디서 어떻게 발생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헨리의 말은 사실이었고 비람 대제사장 또한 일부러 핵심을 피해 빙빙 돌려 말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군.’
적어도 헨리의 추측은 그러했다.
그리고 헨리가 생각하는 비람이 숨기는 무언가란, 환술의 탄생 배경 속에 헤라리온과 비람이 숨기고 싶어 하는 신의 권능에 대한 비밀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일흔의 늙은 여우가 자신에게 이런 식의 수업을 펼쳤던 것이고.
이에 비람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궁금증은 환술을 익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역시.’
애매모호한 대답.
날카로운 질문을 회피하기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그 덕분에 헨리는 자신의 추측을 더더욱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윽고 비람이 두꺼운 책 한 권을 헨리에게 내밀며 말했다.
“받으십시오.”
“이게 무엇입니까?”
“환술서입니다.”
‘환술서?’
헨리는 대제사장이 환술서라고 소개한 두꺼운 책 하나를 받을 수 있었다.
헨리는 이것을 교과서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받아 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 훑었을 때, 이것은 교과서라기보단 샤하트라 환술의 처음과 끝을 모두 정리해 놓은 일종의 ‘족보’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술서를 살피는 헨리를 보며 비람이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환술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하지만 환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거기 적혀 있는 내용들을 ‘순서대로’ 암기할 필요가 있는데 대다수의 제사종들이 그 때문에 많이들 포기하고 있습니다.”
“고작 이것 때문에 말입니까?”
“제사종들은 환술서뿐만 아니라 다른 서적들도 암기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만약 환술서의 암기를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환술서의 암기를 포기한 제사종은 평생 제사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제사종으로 남아 위대한 태양신에게 귀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말인즉슨 머리가 나쁘면 진급도 할 수 없고 평생 종교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에 헨리가 물었다.
“그런데 ‘순서대로 암기’라니요? 제 귀에는 꼭 이 책을 통째로 외우면 최고의 환술사가 될 수 있다는 것처럼 해석되는데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그 책에 쓰인 대로 하면 분명히 환술을 다룰 수는 있으나…….”
퉁!
비람은 대답과 함께 다시금 지팡이를 한 번 바닥에 두드렸다.
그러자 서고 전체에 신비로운 빛깔의 짙은 은하수가 생겨났다.
“저처럼 ‘진짜 같은’ 환술은 사용하지 못합니다.”
“차이점이 있습니까?”
“이 역시 직접 익혀 보시면 깨닫게 되실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가르침이야?’
대제사장이기에 특별한 가르침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순 엉터리 가르침뿐이었다.
그러나 비람의 말대로 일단은 환술서에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으니, 양장본이긴 해도 환술서를 손에 넣은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렇다면 가르쳐 주실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럼 열흘 뒤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왜 하필 열흘입니까?”
“일단은 이 책을 순서대로 암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으니, 열흘이면 충분히 외울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헨리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비람이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헨리 공. 농이 지나치십니다. 환술서가 비록 한 권뿐이기는 하나 이 안에는 오랫동안 축척되어 온 환술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책을 어떻게 열흘 만에 모두 암기하신다는 겁니까?”
“적어도 ‘암기’라면 가능합니다. 단순한 암기라면 말이지요.”
“……?”
비람은 헨리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깨닫자 이번에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환술서가 한 권뿐이라고는 하나 그 안에 담긴 글자는 매우 작고 촘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제사장인 비람조차도 아직 이 책의 전부를 완벽하게 암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이윽고 가벼운 목례와 함께 서고를 빠져나와 헥터를 찾았다.
“난 이만 간다.”
“환술은? 벌써 다 배운 거야?”
“배우긴 개뿔, 망할 영감탱이가 어디서 약을 팔고 있어?”
“약?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너는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 헤라리온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맡겨 둬.”
헥터가 듬직하게 가슴을 내밀어 보이자 헨리는 손으로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 헨리가 찾은 이는 다름 아닌 케일이었다.
“가,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케일.
이에 헨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의 마력이 농축된 녹색 병 몇 개를 건네주며 말했다.
“밥 주러 왔다.”
“예?”
“한동안 바쁠 거야. 그러니까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어.”
케일은 말없이 헨리가 내미는 녹색 병 몇 개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것들을 받아 들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묘한 기분이었다.
케일은 이럴 때마다 자신이 마도사가 맞기는 한 건지 정체성이 의심되었지만, 그래도 직접 마력을 주입받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에 군말 없이 녹색 병들을 받아 들었다.
“그럼 수고해.”
이윽고 헨리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텐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헨리 공!”
별생각 없이 텐의 저택에 도착했다.
헨리는 아직 아이젠에게서 받은 휴가가 남았으니 한동안 저택에 틀어박혀 환술서나 외울 참이었다.
그런데 헨리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헨리를 발견한 텐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아이젠 대후작님께서 헨리 공을 급히 찾으십니다!”
‘아이젠이?’
핑크 스왐프 건으로 아이젠에게 편지를 보낸 지 아직 며칠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호출이라니?
헨리는 아이젠의 호출에서 심상찮음을 느꼈다.
이에 헨리가 품속에서 아공간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며 텐에게 말했다.
“텐, 너는 책임지고 이것들을 황제한테 보내.”
“화, 황제 폐하께 말입니까?”
“호들갑 떨지 마. 앞으로 정기적으로 보내야 할 것들이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미리 말해 두는데, 호기심에라도 이 안에 든 것들을 탐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에 헨리는 아공간 주머니로부터 샤하트라에서 새롭게 수급해 온 담배 함들을 수북이 꺼내 놓았다.
이에 텐이 핑크 스왐프 무더기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지만, 헨리는 다시 한 번 단단히 주의를 준 후 저택을 빠져나갔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환술서의 암기는 한동안 좀 미뤄야 할 듯싶었다.
* * *
간만에 방문한 쇼난 저택은 대체로 분위기가 분주했다.
갑작스러운 호출과 분주한 분위기, 장담컨대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뭐, 만나 보면 알겠지.’
헨리는 정원을 지나 아이젠이 업무를 보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헨리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젠이 두 팔을 있는 힘껏 벌리며 헨리를 뜨겁게 맞아 주었다.
“헨리이!”
“후작님을 뵙습니다.”
담담하게 대꾸하는 헨리.
그럼에도 아이젠의 기세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학학! 그래그래, 그런 격식 따위는 집어치우고 얼른 이리 와서 앉아 봐.”
묘하게 과장되고 서두르는 느낌.
꼭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어른을 보는 것 같았다.
이에 헨리가 서론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갑자기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흠흠, 휴가 중에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다만, 실은 알프레드 그놈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알프레드 후작이 말입니까?”
“그래, 알프레드 그놈이 말이야. 그리고 뭐, 그래서 말인데…… 어쩌다 보니 그놈과 결투를 벌이게 됐다.”
‘결투?’
뜬금없는 결투 소식에 헨리는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투 소식을 듣고 난 이후에야 헨리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알프레드의 심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긴, 아이젠한테라도 화풀이하지 않으면 나 같아도 화병으로 쓰러질 테니.’
고작해야 손가락만 한 궐련 때문에 사랑하는 두 아들이 병신이 됐다.
그리고 최후의 수단으로 황제에게 고자질까지 하였으나 황제마저 핑크 스왐프에 홀딱 빠졌으니 당연히 복장이 터질 터.
충분히 아이젠에게 결투를 신청할 만도 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귀족들 간의 결투란 서로의 동의가 없으면 애초에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
게다가 현재 상황에서 아이젠이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득이 될 만한 게 없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젠에게 물었다.
“후작님, 혹시 홧김에 그냥 결투를 받아들이신 겁니까?”
“……허허, 당연히 아니지. 내 최대한 결투를 거절하려고 하였으나 녀석이 제법 괜찮은 조건을 걸어서 말이야.”
“괜찮은 조건…… 말입니까?”
“그래, 들어는 봤겠지? 알프레드 그놈이 가진 땅들 중에 ‘황금 삼대지’라는 땅들을 말이야.”
‘황금 삼대지!’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불리는 알프레드의 알짜배기 땅들.
사실상 알프레드의 돈줄은 그 황금 삼대지에서 나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 땅들은 웬만해선 내기의 대상으로 언급조차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황금 삼대지를 홧김에 걸다니?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상한데? 알프레드가 홧김에 황금 삼대지를 걸었을 리는 없고…… 분명히 황금 삼대지를 건 만큼 마땅한 무언가를 요구했을 텐데?’
귀족들은 장사꾼만큼이나 잇속을 챙기는 이들이었다.
특히 삼대가문씩이나 된다면 그 욕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알프레드가 황금 삼대지를 걸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요구 조건을 내걸었을 터.
그러나 아이젠에겐 황금 삼대지에 버금갈 만한 값비싼 재산이 없었다.
게다가 화병이 난 알프레드가 아이젠의 재물 따위를 원해서 결투를 신청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이에 헨리가 물었다.
“그럼 후작님께선 무엇을 거셨습니까?”
“나는 말이지…….”
뜸을 들이는 아이젠.
뜸을 들일수록 묘하게 불안감이 상승했다.
이윽고 아이젠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알프레드 그놈이, 헨리 너의 목을 원하더라고.”
“제 목을…… 말입니까?”
“그래.”
그 순간, 헨리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