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새로운 힘 (5)
“셀렌!”
감격스러운 상봉이었다.
불과 며칠간의 혼수상태였건만 헤라리온은 몇 년이나 떨어져 있었던 사람처럼 셀렌을 끌어안았다.
“여긴……?”
엘라곤에 의해 정신을 차린 그녀는 여전히 뿌연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하지만 헤라리온의 목소리가 등불이 되어 차츰차츰 제정신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으흐흐흑……!”
헤라리온은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동안 온갖 방법을 써도 그녀를 일깨우지 못했다.
그래서 이젠 두 번 다시 그녀의 사랑스러운 웃음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갖은 맘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대단한 애처가로군.’
헨리는 두 사람이 충분히 해후를 즐길 수 있게끔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헤라리온의 마음이 진정되었을 무렵, 눈이 퉁퉁 부은 헤라리온이 헨리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헨리 공, 이번에도 정말 큰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그보다 왕비님께서 정신을 차리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는 헤라리온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눈물은 그쳤지만 애잔한 여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그럼 일단 장소를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하와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헥터, 너는 혹시 모르니 왕비님 곁을 좀 지켜 줘.”
“알겠다.”
두 사람은 곧 근처에 마련된 방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헨리였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야누스 신의 신전에서 갑자기 쓰러지셨다지요?”
“그렇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데려가선 안 되지만…… 셀렌이 저를 너무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 이번에만 예외적으로 동행을 허락하였습니다.”
“걱정? 무슨 걱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매일같이 혹독하게 수련하다 보니 셀렌 앞에서 앓는 소리를 좀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걱정된다면서 기도 의식을 돕겠다는 바람에 그만…….”
‘쯧쯧, 고작 그런 이유로?’
칸 부부가 소문난 잉꼬부부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아무리 금슬이 좋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왕조에서 금지시켜 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결국 이 사달이 일어난 것에는 헤라리온 또한 잘못이 있다고 헨리는 생각했다.
‘뭐, 어찌 됐든 일이 잘 해결되었으니 망정이지.’
과정이 어찌 됐든 헨리가 셀렌을 치료해 주었으니 한시름 덜 수는 있었다.
그리고 헨리는 또 한 번 헤라리온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그에 따른 적당한 보상을 받을 생각이었다.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왕비님께서 깨어났다는 것이겠지요. 혹시라도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생기거든 그때도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말씀만으로도 너무 감사합니다.”
물론 도와준 것에 대한 보상을 노골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때가 되면 다 가질 수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헨리는 헤라리온에게 원하는 것이 뚜렷하였기에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 보자면……. 전하, 생각했던 것보다 핑크 스왐프의 효과가 매우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핑크 스왐프 때문에 삼대가문 중에 하나인 알프레드 후작의 두 아들이 병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제 또한 핑크 스왐프를 즐기기 시작했으니, 이게 제국에 망조가 든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아서스에 대한 소식은 없습니까?”
“궐련에 대한 뚜렷한 소식은 없습니다만, 대신 그보다 더 중요한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소식입니까?”
헤라리온에게 있어 다른 이들의 소식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서스의 몰락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아서스 공작이 금지된 힘에 손을 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금지된…… 힘요?”
헨리는 헤라리온에게 반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입수한 키메라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메라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무렵, 헤라리온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불신이 반절씩 뒤섞여 있었다.
“……이거,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요. 그런 괴물이라니요?”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아서스가 강력한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키메라를 제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반란은 생각보다 많은 주장의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됐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서스는 강력한 키메라의 확보를 통해 반란의 확실한 성공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아서스의 영지라도 들쑤시고 싶으나 아직은 마땅한 명분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핑크 스왐프로 황제를 자극하여 아서스가 하루라도 빨리 반란을 일으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마음 같아선 아서스의 영지를 들쑤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충분한 무력을 모아 헨리가 먼저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헨리가 먼저 반란을 일으키기엔 부족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서스가 반란을 일으키면 등 돌리지 않은 제국군과 아이젠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아이젠과 제국군을 이용해 아서스를 저지한 다음, 알프레드마저 제거한 후 아이젠이 공작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아이젠이 공작이 되는 순간.
그때가 헨리의 진정한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무튼 아직은 때가 아니니 좀 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가 방문한 이유는 교역에 대한 성과를 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교역…… 셀렌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군요. 교역은 어떻게 됐나요?”
“궐련을 포함한 교역품 전부를 팔아 치웠습니다. 그것도 아주 비싼 값에 말입니다.”
“버, 벌써 말입니까?”
헤라리온은 또다시 놀랐다.
한두 개도 아니고 단가를 세 배나 쳐준다는 말에 매해 황실에 바치던 공물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교역품을 헨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 많은 교역품들을 벌써 다 팔아 치웠다니?
헤라리온은 헨리의 판매 수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헨리가 아공간 주머니 하나를 품속에서 꺼내며 말했다.
“기존에 드리기로 했던 것보다 조금 더 넣었습니다. 그러니 다음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받은 주머니를 열어 보는 헤라리온. 그 안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제국 금화가 주머니 가득 들어 있었다.
“역시 헨리 공이십니다, 그렇잖아도 혹시 몰라 여분의 궐련을 준비해 두고 있었긴 합니다만……. 그럼 볼일은 이것으로 끝입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사실,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헨리 공이라면 어떤 부탁이든지 응당 들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헨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참아 왔던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하, 혹시 저에게 ‘환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환술이라면…… 혹시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것 때문입니까?”
‘그것’.
신의 권능과 흑마술, 그리고 마계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공통점을 뜻했다.
이에 헨리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굳이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이전부터 샤하트라의 환술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전하와 이렇게 인연이 닿았으니 이렇게나마 부탁드려 보는 것뿐입니다.”
거짓말이었다.
헨리가 환술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고작해야 환술의 파훼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헨리는 마법 우월주의에 입각한 전직 ‘대마법사’였으니까.
그럼에도 헨리가 환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유는 헤라리온이 예상했듯이 신과 흑마법, 그리고 마계의 공통점을 찾기 위함이었다.
“으음…….”
무거운 신음.
그럴싸한 핑계를 대긴 하였으나 헤라리온 또한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잘 안다.
물론 진위 여부를 밝히기 위해 라의 눈동자를 사용하진 않았다.
방금 전에 셀렌을 살려 준 은인에게 라의 눈동자를 들이민다는 것 자체가 무례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헤라리온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헨리가 얼마나 똑똑한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전에 야누스의 신전에서 맺은 맹약만 놓고 보더라도, 헨리가 얼마나 더 큰 힘을 숨기고 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헨리가 일전에 그런 공통점에 대한 논의를 꺼낸 이후, 헤라리온 또한 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사실 헤라리온도 때때로 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헤라리온은 이것이 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셀렌…….’
헤라리온은 가만히 셀렌의 이름을 곱씹었다.
사실 셀렌이 신전에서 쓰러졌던 날, 헤라리온은 셀렌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붉은색 안개를 보았다.
안개는 마치 벌 떼처럼 셀렌의 얼굴에 모여 있었다.
그러다가 헤라리온이 다가가자 야누스가 강림한 하늘의 틈 사이로 사라졌는데, 안개가 사라진 직후 헤라리온은 야누스로부터 신의 말씀을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헤라리온은 야누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히 여느 때와 같은 언어였으나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들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아는 말 같았다. 분명히 아는 말 같았는데 나는 대체 왜 …….’
그렇다. 마족에게 직접 마계어를 배웠던 헨리와는 달리 샤하트라의 종교인들은 ‘신의 언어’를 이해한 것이 아닌 여태껏 ‘익숙한 단어’들을 통째로 외워 대충 비슷한 말들을 조합해 공무를 처리해 왔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헤라리온은 문득 욕심이 났다.
만약 자신이 그때 야누스의 말을 알아들었더라면 셀렌을 여태껏 방치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그리고 라와 야누스는 자신에게 어떠한 것을 원하는 것일까?
이상한 현상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질수록 원하는 바가 점점 더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알고 싶다……!’
결국 헤라리온은 가까운 사람, 즉 셀렌의 위기를 통해 신의 권능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 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랫동안 샤하트라 왕조가 지켜온 위대한 신의 권능을 함부로 외지인과 파헤치기엔 차마 조상님들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헤라리온은 못 이기는 척하며 헨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적어도 그라면 자신이 굳이 동참하지 않아도 이것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환술…… 정도면 되겠습니까?”
헤라리온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에 헨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덜컥 화부터 내고 등을 돌리던 과거와 비교하자면 분명한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에 헨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전하.”
“알겠습니다. 이이상 은인의 청을 모른 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 터이니 내 특별히 비람 대제사장에게 환술을 배울 수 있게끔 일러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말단 제사종에게 배워도 괜찮을 테지만 헤라리온은 특별히 비람을 선생님으로 붙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에게 있어 크나큰 호재였다.
“그럼 할 말은 이것으로 끝난 것 같으니 저는 다시 셀렌을 보살피러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궐련은 시녀들에게 일러둘 터이니 편할 때 챙겨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헨리와 헤라리온, 두 사람 다 딱히 표현하진 않았지만 모두가 충분히 만족한 훌륭한 거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