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발화 (3)
“황제 폐하께서 나한테?”
“그렇습니다, 후작님.”
아이젠은 황제가 보낸 칙서를 받아든 뒤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내용물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칙서를 거의 다 읽어 갈 때쯤, 아이젠은 상당히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물건이 준비되는 대로 곧장 황제 폐하를 알현하도록 하겠다.”
아이젠의 대답을 들은 전령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갔다.
전령이 저택을 떠나는 것을 확인한 아이젠은 급히 시종에게 일렀다.
“지금 당장 헨리를 호출하도록 해라!”
칙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아이젠이 유통시키고 있는 핑크 스왐프에 향정신성 물질이 함유되어 있는 것 같으니, 직접 핑크 스왐프를 가지고 입궐하여 진실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알프레드 이 망할 놈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시국에 갑자기 황제가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는 건 분명히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다는 뜻이다. 아이젠은 그 밀고자로 당연히 알프레드를 떠올렸다.
‘하아, 일이 점점 더 커지는구나.’
그러나 알프레드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황제의 호출 명령에 아이젠은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젠은 핑크 스왐프를 입에 대 본 적도 없고, 애초에 핑크 스왐프 자체를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이젠은 직감하고 있었다.
알프레드의 아들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분명히 좋은 일로 부르는 것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이젠은 한시라도 빨리 핑크 스왐프를 유통시킨 헨리를 만나 이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젠이 헨리를 호출하고 며칠 뒤, 텐의 저택에 아이젠의 전령이 도착했다.
* * *
텐의 저택에 도착한 전령은 서둘러 헨리에게 아이젠의 편지를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젠의 편지를 읽은 헨리는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호재로구나!’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었다.
아이젠이 보낸 편지에는 황제가 핑크 스왐프를 마약으로 의심하고 있으니,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에서 아이젠의 불안함이 잔뜩 느껴졌다.
하지만 헨리에게는 오히려 아주 좋은 기회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황제가 이러한 서신을 아이젠에게 보냈다는 것은 ‘마약에 대한 처벌’의 목적이 아닌 ‘핑크 스왐프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황제 그놈은 내가 잘 알지. 남들은 다 피우고 있는 핑크 스왐프를 궁금해하는 게 분명해. 거기다 샤하트라의 새로운 궐련이라고 하니 몹시 구미가 당기겠지.’
헨리가 아는 실버 잭슨은 엄청난 쾌락주의자였다.
그러니 법으로 금지한 마약이라 할지라도 본인에게 막대한 쾌락만 줄 수 있다면,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 어떻게든지 즐기고야 마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 있을 아이젠의 호출은 헨리에게 있어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것도 핑크 스왐프를 황제에게 직접 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애초에 핑크 스왐프 자체가 황제를 중독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으니, 더 이상 입질을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나저나 알프레드 이놈,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군. 그렇게 이를 갈더니 고작 하는 짓이 겨우 고자질이었어?’
헨리 또한 아이젠과 같은 생각이었다.
하필 지금 이 시국에, 타이밍 좋게 핑크 스왐프에 대한 감사가 나온 걸 보니 분명히 알프레드 후작이 밀고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한심했다. 하지만 한심함과 동시에 기특하기도 했다.
알프레드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준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황제의 입에 핑크 스왐프를 물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아이젠의 전령에게 말했다.
“내 금방 해결책이 적힌 서신을 적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도록 하여라.”
전령을 대기시킨 헨리는 곧바로 개인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다음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 둔 여분의 핑크 스왐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좀 부족하다 싶을 만큼만 주어야겠지.’
황제를 핑크 스왐프에 중독시키려던 이유는 예민해진 황제를 이용해 아서스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핑크 스왐프를 넉넉하게 챙겨 주기보다는 황제가 금단 현상으로 예민해질 수 있게 부족하다 싶을 만큼만 챙겨 주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보급하는 궐련의 양을 통해 황제의 예민함을 조절하는 것이었으니까.
이에 적당량의 핑크 스왐프를 챙긴 헨리는 이어서 아이젠이 황제 앞에서 취해야 할 행동과 말 들에 대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황제를 직접 만나야 하는 것은 헨리가 아닌 아이젠이므로.
‘최고의 시나리오를 써 주지.’
* * *
“폐하, 아이젠 대후작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오, 그래! 아이젠이 도착했단 말이지?”
황제는 하루라도 빨리 아이젠이 황궁에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 뒤, 드디어 아이젠이 황궁을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황제는 정사를 나누던 궁녀들을 밀쳐 내고 허겁지겁 그를 맞이할 채비를 했다.
‘드디어 맛 볼 수 있겠군! 샤하트라의 새 궐련을 말이야!’
핑크 스왐프.
이름부터가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궐련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장인들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해 매해 공물로만 받아 오던 샤하트라 궐련의 새로운 시리즈라니?
쾌락주의자인 황제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회장에서 독대할 수 있었다.
먼저 아이젠이 예를 차리며 인사를 올렸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오, 그래그래! 쇼난 지방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다정하게 환대해 주는 황제.
그런 황제의 모습을 본 아이젠은 다시 한 번 헨리의 통찰력에 소름이 끼쳤다.
‘정말 헨리의 말대로야. 그 황제가 환대를 다 해 주다니!’
헨리에게 보냈던 전령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젠은 헨리와 함께가 아닌 혼자서 돌아온 전령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헨리의 편지를 확인한 직후 왜 굳이 헨리가 오지 않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헨리의 편지는 마치 어려운 시험의 해답이 적힌 답안지와도 같았다.
그리고 아이젠은 그런 헨리의 답안지를 활용하는 것에 충분히 훈련이 된 몸이었다.
이른바 헨리의 유능한 허수아비이자 베테랑 배우가 된 셈이었다.
아이젠은 헨리의 편지를 받자마자 곧바로 황궁으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헨리가 써 준 행동 양식들과 황제의 심리 상태에 대해 외우고 또 외웠다.
이윽고 아이젠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저 하루라도 빨리 제가 유통시킨 핑크 스왐프에 대한 오명을 벗겨 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래! 그 핑크 스왐프! 그렇잖아도 알프레드가 하도 유난을 떨기에 몹시 궁금하던 차였지.”
‘역시 녀석이 맞았군.’
밀고자에 대한 보호는 없었다.
아이젠과 헨리의 예상대로 역시 핑크 스왐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알프레드였다.
그러나 헨리의 편지에 쓰여 있었듯이 아이젠은 더 이상 알프레드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헨리의 말마따나 이번 기회에 핑크 스왐프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황궁 내에서 자신의 입지는 더욱더 탄탄해질 것이라 자명했으니까.
이윽고 아이젠은 품속에서 핑크 스왐프 한 개비를 꺼내 황제 앞에 내밀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오오, 이게 바로 그……!”
매년 샤하트라에서 공물로 받아 오던 기존의 궐련과 크게 다를 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 맛은 공물로 진상되는 궐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하고 달콤하다고 들었다.
황제가 말했다.
“후작, 아시다시피 내가 마약과 궐련에 대해선 좀 조예가 깊은 몸이지 않소?”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러니 따로 정밀한 검사를 진행하기보다는 내가 한번 피워 본 다음에 판단하고 싶은데, 후작의 생각은 어떻소?”
처음부터 핑크 스왐프를 향정신성 물질로 규정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이러한 제안을 할 것이라고 헨리의 편지에는 이미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미래를 점쳐 놓은 듯한 완벽한 답안지.
아이젠은 헨리의 답안지를 가지고 있을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사내가 되었다.
이에 아이젠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야말로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역시 그대도 그리 생각할 줄 알았소. 그럼 오래 걸릴 것도 없이 바로 이 자리에서 한 개비 피워 보면 되겠군.”
치지직!
“후우우……!”
허공에 분사되는 분홍빛 연기.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황제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 * *
“……망할 놈 같으니!”
알프레드는 황제에게 긴급 독대를 신청한 후 핑크 스왐프에 대한 감사를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분이 풀리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에 황제가 지어 보였던 미소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쪼르륵.
알프레드는 다시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장남의 팔이 잘리고 차남이 폐인이 된 이후로는 자신 또한 핑크 스왐프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독한 위스키뿐이었다.
알프레드는 독한 위스키를 두 병이나 비웠지만 좀처럼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시종이 알프레드 후작에게 말했다.
“후작님, 쇼난가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쇼난가에서?”
“예, 헨리입니다.”
“뭐라고?”
뜻밖의 손님.
그것도 몹시 불쾌하고 꼴도 보기 싫은 놈이 찾아왔다.
알프레드는 헨리의 이름을 듣자마자 머리로 피가 쏠리며 울화가 치미는 듯했다.
이에 알프레드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쾅 내려치며 시종을 다그쳤다.
쾅!
“이 건방진 놈이 감히 무슨 낯짝으로 여길 찾아왔다는 것이더냐!”
“그, 그게…… 후작님께 드릴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뭐라? 그놈이 나한테?”
그놈이 자신한테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에 알프레드가 씩씩거리며 응접실로 나가자 응접실에는 헨리가 여유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그 꼴을 본 알프레드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 걸 느꼈다.
“네노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더러운 낯짝을 내미는 것이더냐!”
노여움이 잔뜩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나 헨리는 그가 성질을 내든 말든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은 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저에게 섭섭한 것이 많으신 모양이로군요. 후작님, 저는 다름이 아니라 후작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뭐, 뭐라고?”
기가 찼다.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러한 행태를 저질러 놓고도 뻔뻔스럽게 웃는 낯짝은, 흡사 한 마리 악마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헨리는 알프레다가 당황하건 말건 꿋꿋이 자기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후작님 덕분에 황제 폐하께서 친히 핑크 스왐프에 대한 감사를 진행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후작님께서 애써 힘써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저도 약소한 선물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딸깍.
말을 마친 헨리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자그마한 담뱃갑 하나를 열어 보였다.
그러자 그 안에는 하나하나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핑크 스왐프’ 열 개비가 들어 있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리본으로 포장된 궐련을 본 알프레드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신의 자식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마약을, 저렇게 선물이랍시고 정성스럽게 포장해 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능멸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쿠구구구……!
이에 알프레드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치솟은 분노로 인해 정령술이 제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알프레드가 헨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능멸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닥쳐라!”
콰아앙!
분노에 찬 알프레드는 핑크 스왐프가 놓여 있는, 대리석으로 된 응접실 테이블을 있는 주먹으로 힘껏 내려쳐 박살을 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함이 떨어지며 바닥 여기저기에 핑크 스왐프들이 나뒹굴었다.
그러나 헨리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변명을 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품속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빼 들었다.
후두둑!
빼든 아공간 주머니를 거꾸로 뒤집자 그 안에서 포장되지 않은 핑크 스왐프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족히 수십 개비는 될 법한 양이었다.
헨리가 말을 이어 나갔다.
“시레드 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시레드 님에게는 이것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아!”
후우웅!
고함과 함께 내질린 굉장한 풍압. 왈레드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풍압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런 풍압을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알프레드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어, 어떻게……?”
“선택은 후작님이 하시는 겁니다. 다만, 아드님에게 다시 핑크 스왐프를 건네신다면 시레드 님은 전과 같은 건강을 되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궐련을 피우는 동안에는 말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까 선택은 후작님이 하시는 거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리고 후작님께서 원하신다면, 적어도 후작님에겐 언제든지 핑크 스왐프를 부족함 없이 판매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할 말을 마친 헨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등을 돌려 보였다.
이에 알프레드가 분노에 찬 고함을 다시 한 번 내질렀지만, 헨리는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