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146화 (146/522)

# 146

도화선 (1)

시레드가 핑크 스왐프2를 받고 저택을 떠나고 며칠 뒤.

텐의 저택 앞에는 저택이 건축된 이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던 귀족들의 유례없는 대행렬이 이어졌다.

귀족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중앙귀족회의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시레드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핑크 스왐프의 금단현상을 이기지 못해 오스카와 테리온을 통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들 모두가 함께 몰려온 것은 아니었다.

오스카와 테리온에게서 헨리의 저택을 소개받은 이들은, 아랫사람을 시켜 핑크 스왐프를 구해 오도록 심부름을 보냈다.

하지만 헨리는 그들이 보낸 심부름꾼들에게 핑크 스왐프를 판매하지 않았다.

오히려 쓴소리와 함께 매몰차게 심부름꾼들을 쫓아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이더웨더가의 차남도 핑크 스왐프를 얻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그런데 그보다 지위도 낮은 것들이 달랑 하수인만 보내오자 괘씸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건방진 놈들. 어디 시건방지게 달랑 심부름꾼만 보내?’

어찌 보면 주인이 배짱 장사를 한다며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헨리가 밀리언 상단을 만든 이유는 한낱 돈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상단을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헨리는 최근 들어 그 힘이 막강해진 ‘아이젠 후작’이 가장 아끼는 ‘유일한 가신’이었다.

그렇기에 아이젠의 고지식하고 폭력적인 성격을 아는 이상, 그 누구도 헨리의 이러한 행동에 직접적인 불만을 표출할 만한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 이 건방진 놈 같으니!”

와장창!

빈손으로 돌아온 하수인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롤링 백작은 기어코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를 쓸어버렸다.

괴로웠다.

그 또한 진즉에 핑크 스왐프를 전부 피우고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이럴 때일수록 최대한 백작의 눈에 띄지 않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걸 롤링 백작의 시종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꿀꺽! 꿀꺽! 꿀꺽!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자 이번에는 위스키 병을 집어 들어 거칠게 목구멍으로 술을 집어넣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혀끝에 남은 핑크 스왐프의 잔향을 잠재우기 위해선 독한 술을 마셔야만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금단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예민한 신경과 더불어 항상 반쯤 취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쾅!

이윽고 위스키 한 병을 비운 롤링 백작이 테이블 위에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네놈이 바라는 대로 내 직접 궐련을 사러 가 주지! 여봐라! 지금 당장 비발디 타운으로 떠날 준비를 해라!”

이는 롤링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귀족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그러한 생각들이 모였기에 현재 텐의 저택 앞에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귀족들의 대행렬이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저택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은 자존심에 금이 간 자신의 체면치레를 위해 기선 제압을 위한 거대한 마차는 물론이고 호위병을 포함한 각종 시종들까지 동행한 채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창문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헨리가 혀를 쯧쯧 찼다.

‘쯧쯧,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용기는 없고 고작 생각해 냈다는 게 우르르 몰려와서 기를 죽이는 것이라니…….’

몹시 하찮은 전략이었다.

이에 뒤늦게 나타난 반이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서 귀족들의 행렬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음? 떼거리로 몰려왔다더니 저렇게나 많이 왔어? 어디 보자, 뭐야? 저기 롤링도 있잖아?”

반에게는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이 황궁을 들락거리던 시절, 삼대가문이 되기 전의 중앙귀족들에게 어떻게든 줄을 대려던 놈들이 바로 저놈들이었으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듣기로는 저들이 한데 뭉쳐 과거의 중앙귀족파의 명맥을 잇는 중앙귀족회라는 사교 모임을 만들었다는군요.”

“중앙귀족회? 진짜 염병들을 하고 있네.”

중앙귀족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대번에 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렇게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는 건 제 계획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중앙귀족회인지 뭔지 하는 저놈들을 이렇게 끌어모은 다음에 뭘 할 생각인데?”

“물건을 사러 왔으니 물건을 팔아야겠지요.”

“뭐?”

“아니꼬우면 직접 사러 오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직접들 찾아왔으니 물건을 팔아 주는 게 도리겠지요. 물론 그냥 팔지는 않을 테지만요.”

그런 치욕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리언 상단의 물건을 사러 와 준 아주 고마운 고객들이었다.

이에 헨리는 그들의 부름에 호응하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얼른 문을 열지 못할까!”

저택의 대문 앞.

헨리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귀족들의 거친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문을 사수해야만 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저택의 입구를 지키는 일이라고 해 봤자 여태껏 누가 찾아오면 방문자의 신분이나 전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오늘, 병사들은 살면서 한 번이나 겨우 볼까 말까 한 대귀족들을 상대로 저택의 입구를 사수해야만 했다.

“안 됩니다. 주인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건방진! 지금 네놈이 누구를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더냐!”

“……그래도 안 됩니다.”

죽을 맛이었다.

대체 작은 주인님은 무얼 하시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있는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그 순간, 저택의 대문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기이이익.

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다름 아닌 헨리였다.

“주, 주인님……!”

감격에 벅찬 순간.

헨리의 등장으로 인해 전신을 적셨던 식은땀이 그제야 뽀송뽀송하게 말라 버리는 듯했다.

“고생들 했어.”

병사들의 노고를 잘 안다. 그래서 헨리는 병사들에게 싱긋 미소 지어 준 후 구름처럼 몰려든 귀족들 앞에 섰다.

헨리는 여느 때처럼 깔끔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헨리 특유의 기품 넘치는 모습과 당당한 표정은, 병사들을 다그치던 하수인들을 알아서 수그러들게 하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이윽고 헨리가 말했다.

“다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아이젠 후작님의 하나뿐인 가신, 헨리라고 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헨리.

그러나 그것은 자기소개를 가장한 간단한 기선 제압 방법이었다.

‘저, 저 건방진 놈이……!’

이에 귀족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들은 현재 금단현상에 의한 예민함과 구매를 거절당했던 굴욕감, 그리고 오랫동안 자신들을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충분히 화를 낼 만도 했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귀족들의 응석을 조금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자기소개에 굳이 ‘아이젠 후작의 하나뿐인 가신’이라는 말을 넣음으로써 눈에 쌍심지를 켠 귀족들의 기선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다.

‘저 저, 눈빛에 살기들 봐라.’

헨리에 대한 스트레스는 이미 차오를 대로 차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스트레스를 받건 말건 헨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진행될 ‘다음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끝끝내 분노를 참지 못한 롤링 백작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헨리에게 소리쳤다.

“그따위 인사는 집어치우고 당장 물건이나 가지고 오지 그래? 대체 얼마나 더 우리를 기다리게 할 셈이지?”

먼저 입을 연 것은 롤링 백작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다급함이 어려 있었다. 물론 롤링 백작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급해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런 얼굴을 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놀리고 싶어지는 법.

게다가.

‘이놈 봐라?’

기선 제압을 통해 충분히 서로의 위치를 각인시켜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롤링 백작에겐 전혀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롤링 백작은 현재 헨리에게 반말로 빈정대고 있었으니까.

‘본보기를 보여 줄 필요가 있겠어.’

물론 지위상으로는 롤링 백작이 헨리에게 얼마든지 반말을 지껄여도 좋은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 이더웨더가의 차남도 헨리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낮은 지위에 속하는 롤링이 반말을 사용하다니?

어깨 위에 달린 것이 장식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한편으로는 꽤 괜찮은 도발이라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그를 본보기 삼아 나머지 귀족 놈들에게 제대로 된 일벌백계를 해 보일 수 있을 테니까.

이에 헨리가 말했다.

“물론 물건이야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실례지만 롤링 백작님, 백작님께 지금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혹시 지금 술을 드시고 온 것입니까?”

“당연한 거 아냐? 핑크 스왐프도 못 태우는 마당에 술 없이 어떻게 버티라고?”

“……어이가 없군요.”

“……뭐?”

“백작님께선 지금 저와 거래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

그리고 처형장에서 그 황제조차도 기겁하게 만들었던 차가운 눈동자.

그 두 가지만으로도 롤링 백작의 취기를 일깨우기엔 충분했다.

헨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백작님께선 지금 핑크 스왐프를 구매하기 위해 제 저택을 방문하신 게 아닙니까?”

“그,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것이냐?”

심상찮은 기류를 느낀 롤링 백작은 뒤늦게나마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지금 와서 태도를 바로 잡기엔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그래서’라니요? 저는 지금 아이젠 후작님의 대리인으로서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핑크 스왐프는 후작님과 샤하트라 국왕의 인연으로 인해 비로소 제국의 빛을 보게 된 물건! 그런 뜻깊은 물건을 다루는 자리에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드시고 온 것입니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맥락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진짜라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롤링 백작은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기엔 한참이나 늦어 버렸다.

이에 헨리가 더더욱 차가워진 눈빛으로 롤링 백작에게 말했다.

“이 일은 반드시 아이젠 후작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뒤늦게 변명을 하려는 롤링을 무시한 채, 헨리는 이번엔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다른 귀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저희 상단과 거래를 하고 싶으신 분들은 그에 맞는 인품을 보여 주셔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번 다시 핑크 스왐프를 들여오지 않을 테니까요.”

“……!”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상단을 운영하면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을 취급하지 않겠다니!

그것은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이었다.

헨리의 경고가 떨어지자마자 몇몇의 귀족들은 술 냄새가 나는 자신의 입을 가리며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말을 마친 직후, 헨리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휴대용 궐련 보관함을 꺼내 핑크 스왐프 한 개비와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치이익!

불이 붙여진 성냥은 곧 두터운 핑크 스왐프의 머리에 불꽃을 옮겼다.

그리고.

“후우우…….”

허공으로 분사되는 분홍빛 연기.

그리고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헨리는 득의양양한 표정과 함께 나직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핑크 스왐프에 대한 거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완벽하게 나뉜 갑과 을.

거래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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