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급물살 (3)
꼬박 하루가 지났다.
드디어 반의 건강을 정상 궤도로 끌어올린 사제들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쓰러지듯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이, 이제 한동안 몸조리만 잘해 주시면 원래의 건강을 되찾으실 겁니다.”
신성력을 어찌나 쏟아부었는지, 주 사제 베드로의 손가락이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이에 헨리는 천만황금 앞으로 발행된 어음에 대충 사인을 휘갈긴 뒤 베드로에게 내밀었다.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어음을 받아 든 베드로는 어음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헥터가 헨리에게 물었다.
“저것들 진짜 사제 맞아? 아무리 봐도 사이비 같은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만약 저들이 사이비라도 반을 고칠 수만 있다면 난 얼마든지 그들의 종교를 국교로 만들어 줄 자신이 있어.”
“대단한 부하 사랑 납시셨군.”
“정신 사나우니까 가서 밥이나 먹어. 반은 내가 마저 돌볼 테니.”
헨리의 얼굴엔 웃음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이에 투덜거리던 헥터는 내심 헨리의 심정을 이해하여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반의 빈사 상태는 헨리에게 있어 굉장한 충격이었다.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던 그였다.
게다가 제국에서 몇 안 되는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그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사람은 그 유명한 제국 십검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서스…….’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린 반이 내뱉었던 이름, 아서스.
헨리는 사제들이 치료를 재개하는 동안 끊임없이 아서스의 이름을 곱씹으며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 떠올렸다.
하지만 반보다 강할 법한 소드 마스터들로 용의자를 좁히니 오히려 머리만 복잡해졌다.
이제 제국에 남은 대다수의 소드 마스터들은 아서스에게 줄을 대는 기사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으득!
화가 났다.
대체 어떻게 알고 성형까지 한 반을 습격한 것일까? 내부 고발자라도 있는 것일까?
헨리의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결국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헨리는 반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둘러 엘라곤을 소환했다.
“엘라곤.”
-뀨?
헨리의 부름에 팔찌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엘라곤.
엘라곤에게 치유의 힘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을 부른 까닭은, 몇 번 경험해 보지 못한 불확실한 치유력보다는 확실하게 검증된 신성력으로 반을 치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겠어?”
-뀨!
의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헨리의 뜻을 이해한 엘라곤은 이윽고 헨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욕조에 잠긴 반의 위로 올라갔다.
펄럭!
날개를 펼쳐 욕조 전체를 끌어안은 엘라곤.
이윽고 엘라곤의 몸으로부터 청명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슈아아아!
빛은 금세 멎었다.
치료를 마친 엘라곤은 욕조에서 내려왔다.
잠시 뒤, 겨우 목숨을 건졌던 반은 거짓말처럼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헨리?”
“반!”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이에 헨리는 감격스러운 나머지, 반과의 관계를 잊은 채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반의 이름을 불렀다.
“살았구나……!”
그러나 그런 문제는 구사일생한 반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반의 가슴에 남은 것은 비발디 타운을 코앞에 두고 쓰러졌을 때, 눈물을 삼키며 포기해야만 했던 비참한 자신의 말로였기 때문이다.
“신이 아직 나를 버리지 않은 모양이로군…….”
만감이 교차했다.
하마터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뻔했으니까.
그리고 다시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반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피어올랐다.
“헨리, 네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아서스라니? 그놈이 형님을 어떻게 알고 형님을 공격한 겁니까?”
헨리와 뜻이 통했던 것일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반은 생기를 되찾자마자 헨리의 가려운 부분들을 긁어 주기 시작했다.
“아서스가 아니야. 엄밀히 말하자면 하이랜더가의 모드레드다.”
“모드레드라면, 그 제국 육검의 모드레드 말입니까?”
“그래.”
“설마 그놈한테 당하신 겁니까?”
헨리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반 또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작 본인도 사흘 밤낮이나 사투를 벌였지만, 다시 그 기억을 떠올려 보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반이 이어서 말했다.
“헨리,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다.”
“마음 편히 말씀하세요.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녀온 사람의 말을 장난으로 여길 정도로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래, 그럼 결과부터 이야기하지. 나는 모드레드를 가볍게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 전에 난 네가 시킨 용병단 영입 대상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지. 모드레드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야.”
“모드레드를 제압했다고요?”
“그래, 제압했을 뿐만이 아니라 압도적인 격차로 놈을 베어 넘겼지.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녀석이 괴물이 돼서 다시 살아났거든.”
반의 입에서 부활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헥터의 부활 시기와 맞물렸던 탓일까? 우연치고는 좀 공교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는 내색하지 않고 그의 대답에 반문했다.
“괴물이라니요? 구체적으로 어떤 괴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르겠어.”
“예?”
“나도 그런 괴물은 난생처음 봤다. 마치 모든 생물들을 전부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심지어 문어처럼 촉수까지 가지고 있더라니까?”
“촉수요?”
“그래, 촉수뿐만이 아니야. 놈은 갑각류처럼 단단한 외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살을 베어 넘기면 잘린 부위가 트롤처럼 몇 번이고 재생했다. 그리고 잘라 낸 살점도 끊임없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였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건…… 몸 곳곳에 붙어 있던 사람의 얼굴이었지.”
“얼굴?”
“여러 생물을 뒤섞어 놓은 듯한 몸 위에 마치 갑옷을 장식하듯이 사람의 얼굴들을 갖다 붙여 놨더라고. 그 모습을 쳐다보기가 얼마나 께름칙하던지……. 게다가 몸 곳곳에서 독과 화염을 뿜어 대는 바람에 사흘 밤낮 동안 정말 미친 듯이 싸우기만 했다.”
기괴한 묘사였다.
하지만 반의 묘사가 계속될수록 헨리는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키메라?’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괴물.
뚜렷한 패턴이 정해져 있지 않고, 흉측하게 생겼으나, 끊임없이 재생하며, 불과 독까지 내뿜는다.
완연한 키메라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상했다.
‘하이랜더씩이나 되는 집안을 가진 검사가, 그것도 최상급 소드 마스터에 제국 육검씩이나 되는 놈이 키메라가 됐다고? 대체 뭣 때문에?’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동식물도 아닌 인간을 대상으로 키메라를 시술하다니?
‘난 인간에게 키메라 시술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는 목격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었고, 반 정도 되는 실력자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긴급 상황이기도 했다.
이에 헨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형님, 제 예상이 맞다면 형님께서 보신 것은 아마도 마탑에서 법적으로 금지시킨 키메라의 한 종류일 것입니다.”
“키메라?”
“여러 생물체를 조합해 만든 금지된 연금체입니다. 특히 사람을 대상으로는 더더욱 금지되어 있죠.”
“그럼 내가 본 건 뭐야?”
“그래서 저도 의문입니다. 분명히 스승님께서 법적으로 키메라 제작을 금지시켰을 텐데 말이죠. 게다가 모드레드쯤 되는 사내라면, 명예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키메라 시술 같은 건 받지 않을 텐데 그런 남자가 받았다는 건…… 설마?”
“그래,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다.”
가설들을 나열하던 끝에 헨리와 반의 눈이 마주치며 일시에 동공을 확장시켰다.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
그것은 하이랜더가, 즉 아서스 공작이 주체적으로 키메라 제작에 힘을 쏟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추측이었다.
“하지만 아서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에까지 손댈까?”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동안 오베르에게서 뽑아낸 정보에 의하면 현재의 아서스는 반란을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뭐? 아서스가 반란을? 이 미친놈이!”
쾅!
헨리의 입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반은 욕조를 있는 힘껏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헨리가 반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제 실수입니다. 진즉에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복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그만 간과하고 있었던 거죠.”
“확실해? 그거 그냥 오베르 그놈이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막 내뱉은 말은 아니고?”
“아뇨. 오베르의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런 것이 일전에 일어난 샤하트라 반란의 배후에도 아서스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군. 이렇다 할 꼬리를 붙잡지 못했을 뿐이지, 오베르 그놈이 실토했으니 이젠 빼도 박도 못 하겠어.”
“하지만 증거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형님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는 하나, 과연 왕이 누구의 말을 믿어 줄까요?”
“끄응, 그럼 어쩌면 좋겠느냐?”
“지금으로썬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요. 하지만 아서스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놈이란 걸 알았으니 계획의 진행 속도를 좀 더 높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계획이라니? 벌써 계획을 세워 두기라도 했다는 거냐?”
“계획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아서스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때는 이미 제국 귀족들의 대부분이 아서스 편에 선 뒤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요.”
“그럼 네가 진행시키고 있다는 계획은 뭔데?”
“바로 이겁니다.”
반의 물음에 헨리는 품속에서 핑크 스왐프 한 개비를 꺼내 보였다.
“……궐련?”
“그렇습니다.”
궐련을 본 반의 얼굴에 아리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에 헨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동안 진행 중에 있던 것들에 대해 천천히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미치겠네, 이거…….”
알프레드 이더웨더 대후작의 차남, 시레드 이더웨더는 혀끝에 남은 잔향 때문에 벌써 며칠째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와, 이거 딱 하나만 피웠을 뿐인데 왜 이렇게 생각나는 거야? 진짜 미치겠네.”
시레드 이더웨더가 딱 한 번 피웠다는 그것.
그것은 다름 아닌 중앙귀족회에서 선물로 배부되었던 헨리의 핑크 스왐프였다.
중앙귀족회 회원도 아닌 시레드에게 핑크 스왐프가 오기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중앙귀족회 회원들에게 선물로 돌린 궐련들 이외에도, 오스카가 알프레드와 아서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각각 한 상자씩 저택으로 선물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핑크 스왐프의 대부분은 애연가로 유명한 그의 아버지와 장남에게로 돌아갔다.
물론 시레드가 궐련을 즐겨 태우지 않았기에, 자신의 몫을 대부분 양보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맛이라도 보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예의상 피운 궐련 하나가 이렇게까지 큰 여운을 남길 줄은 몰랐다.
마성의 여운이었다.
고작해야 한 개비를 피웠을 뿐인데, 그 맛은 술을 무척이나 당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술로 그 여운을 좀 씻어 냈는가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그 핑크 스왐프 특유의 진한 맛이 자꾸만 혀끝에 맴돌았다.
이에 시레드는 형에게 찾아가 남은 궐련이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애연가인 그의 형, 왈레드 이더웨더는 이미 자신의 몫을 모두 피우고 술로써 그 여운을 달래는 중이었다.
‘안 되겠어. 이러다가 진짜 무슨 일이라도 나겠다.’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궐련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궐련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기호 식품이었고, 샤하트라 특제 궐련은 황제에게만 진상되던 아주 귀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궐련의 중독성이 강하다고 생각하여 궐련을 멀리하고 남들에게 이것의 흉을 본다면, 그것은 귀족으로서 사치품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른다고 핀잔을 들을 소리였다.
이에 시레드 이더웨더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이대로 금단 현상에 고통 받을 바에는 차라리 직접 궐련을 사와 만족감이 들 때까지 궐련을 태우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시레드의 마차가 오스카의 저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