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143화 (143/522)

# 143

급물살 (2)

“소개할게. 이번에 우리 밀리언 상단과 교역을 맺게 된 샤하트라 왕궁의 대리자이신 헥터 경이라고 해.”

“반갑습니다. 헥터라고 합니다.”

저택에 도착한 헨리는 미리 입을 맞춘 대로 텐에게 헥터를 샤하트라 왕궁의 대리자라고 소개했다.

이에 텐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헥터와 악수를 나누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텐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상단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부단주님이시라고 하더군요.”

“하하, 헨리 공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럼요, 얼마나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던지. 그래서 이래저래 부단주님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처음에 헥터를 본 텐은 헨리가 웬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런 것이 인간을 흉내 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코룬의 신장은 고작해야 160cm 정도.

또한 헨리의 성형술을 거치긴 했지만, 헥터의 취향을 반영한 탓에 코룬의 얼굴은 어린 티가 폴폴 나는 미소년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말을 섞어 보고 악수를 나누어 보니, 붙잡은 손아귀로부터 성인 남성 특유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실례를 저지를 뻔했군.’

게다가 처음 보는 자신을 저토록 좋게 봐 주고 있으니, 더더욱 무례를 범해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니 앞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가 흐트러질 걱정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어서 헥터가 말했다.

“저, 그런데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탓에 제가 아직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식사부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물론입니다! 금방 사람을 시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송구스럽지만 저희 요리사가 샤하트라의 조리법에 대해선 무지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제국풍으로 식사를 준비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국에 가면 제국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역시 생각이 깨어 있으신 분이군요. 그럼 바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식사 대접을 위해 텐이 자리를 비운 직후, 생글거리며 웃는 헥터에게 헨리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주 입에 붙었군. 원래 그렇게 거짓말을 잘했나?”

“뭐가 또?”

“식사를 못 하긴? 그럼 아까 내가 본 산더미 같은 꼬치들은 다 뭐였지?”

“쯧쯧쯧, 그래서 네가 오러를 늦게 깨달은 거야. 그건 꼬치일 뿐이지, 식사가 아니잖아?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해?”

식사와 꼬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헨리를 보며 헥터가 혀를 찼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무래도 내가 착각을 했어.”

“그렇지? 그러니 이 기회에 잘 알아 둬, 바깥에서 사 먹는 군것질은 식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 네놈이 죽은 건 나 때문이 아니라, 밥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건데?”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자꾸?”

스승을 향한 헨리의 일갈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이제 헨리는 헥터의 검술은 물론이고 오러까지 완벽하게 익혔으니, 더 이상 헥터에게 잘 보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 이외에도 유일하게 헨리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이다 보니, 더더욱 마음 편히 그를 대할 수가 있었다.

이윽고 헥터가 물었다.

“그래서, 네 말대로 일단은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그다음엔 뭘 하면 되지?”

“똑같이 반복하면 돼. 그게 끝이야.”

“뭐?”

“오늘은 안면을 트기 위해 네가 먼저 오긴 했지만, 앞으로는 나 대신 텐이 샤하트라를 들락거릴 거야. 그러니 네 임무는 그때마다 네가 텐을 도맡아서 거래를 마친 다음, 텐이 안전하게 비발디 타운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호위하는 것이지.”

“굳이 내가 나서서 호위할 필요가 있나? 교역품이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향신료나 비단이 전부잖아?”

“내가 왜 사업 이야기를 할 때 너를 옆에 앉혀 놓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는군.”

“알겠으니까 그만 좀 빈정대라. 아무튼 교역이 있을 때마다 저놈만 지키면 된다 이거지?”

“그래, 지금이야 괜찮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히 샤하트라의 교역품을 노리는 놈들이 나타날 거야. 그 귀한 샤하트라의 물건들이 시장에 풀렸으니 소문도 금방 퍼질 테지.”

“차라리 헤라리온한테 호위대를 붙여 달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아?”

“너한테 헤라리온은 한낱 제자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 봬도 녀석은 한 나라의 왕이야. 교역에 응해 준 것만으로도 큰절을 올려야 할 판에, 그 뒤치다꺼리까지 하라고 하면 왕으로서 위신이 서겠냐?”

“그런가?”

“그리고 어차피 짜고 치는 교역이니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확실하게 구성해 두는 편이 훨씬 다 나아.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그 말은 꼭 헤라리온은 믿을 놈이 못 된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친하긴 해도 일단은 전략적인 동맹 관계일 뿐이니까.”

물론 전략적인 동맹 관계를 떠나 두 사람은 이미 깊은 신뢰를 주고받은 사이이긴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일 처리에 확신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텔레포트 스크롤 정도는 챙겨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넌 교역에 대한 안전도 책임져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헤라리온을 라의 검으로 만들어 놓는 거니까.”

“아까는 못 믿을 놈이라고 그랬다가, 이번엔 훈련시키랬다가……. 역시 마법사 놈들은 속이 시커멓다니까.”

“말했잖아, 전략적인 동맹 관계라고. 어차피 너도 밥이나 축내는 거 외엔 할 일도 없잖아?”

“말을 말자, 그냥.”

놀리는 말이긴 하였으나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헨리와 헤라리온이 없었다면 부활은커녕, 설사 운 좋게 부활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화려한 식도락의 삶을 누리진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자, 작은 주인님! 큰일 났습니다!”

작은 주인님.

그것은 저택의 시종들이 헨리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본래 이 저택의 주인은 텐이었지만, 헨리가 텐을 시종 부리듯이 부린다는 걸 알았기에 그냥 ‘작은 주인님’ 정도로 호칭을 타협했던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온 이는 저택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였다.

그는 쓰고 있던 투구가 반쯤 흘러내릴 정도로 급하게 달려와 헨리에게 급보를 전했다.

“자, 작은 주인님! 지금 반 경이 죽어 가는 상태로 병사들의 등에 업혀 왔습니다!”

“뭐라고?”

헨리는 깜짝 놀랐다. 반이 찾아온 건 둘째 치고 그 ‘앙켈만의 수호자’가 죽어 가는 상태로 업혀 왔다니?

“뭐 하고 있어! 얼른 가서 사제들을 데려오지 않고서!”

자신의 검이 죽어 간다는 말에, 헨리는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 * *

파아앗!

따뜻한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헨리가 비싼 헌금을 내고 데리고 온 고위 사제들의 치료술이었다.

반의 상태는 심각했다.

몸 곳곳에 관통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부러진 뼈만 해도 수십 군데였다.

또한 뭉개진 근육과 더불어 각종 염증이나 중독 증세, 화상 등 자잘한 상처들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다.

“살아서 여기까지 온 게 기적일 정도입니다.”

반을 업고 온 경비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초로 반을 발견한 것은 비발디 타운으로 이동 중이던 어느 여행자라고 했다.

그 여행자는 죽어 가는 반을 발견하자마자 반을 업고 가까운 비발디 타운으로 왔고, 반을 알아본 경비병들이 텐의 저택으로 그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반은 죽어 가고 있었다.

만약 헨리가 데리고 온 고위 사제들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말이다.

치료는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돌아가면서 오랫동안 치료술을 펼치던 고위 사제들은 최상급 힐링 포션을 욕조 가득히 부은 다음 그 안에 반의 몸을 담갔다.

이제는 사제들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반의 강인한 생명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시 반나절이 지난 어느 순간.

“오, 신이시여……!”

주 사제 베드로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아 신에게 기도했다.

반을 위해 치료술을 펼친 지 반나절 만에 드디어 반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속하세요! 반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헌금은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이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헨리가 다급히 사제들을 재촉했다.

희망이 보였다.

애초에 상처가 너무 심해 자신이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어서, 곁에서 기도나 해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다시 사제들이 치료술을 펼쳤다.

그리고 한참 뒤, 생기를 되찾은 반은 그제야 희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헨……리…….”

“반!”

생기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반의 입술은 마른 지푸라기처럼 퍼석했다.

헨리는 그런 반의 손을 꼭 붙잡으며 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서스…… 그놈이 기어코…….”

그러나 반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간신히 생기를 되찾았다고는 하나 아직은 완전히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는 반의 마지막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서스? 그놈이 대체 왜……?”

상상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헨리의 머릿속을 엄습했다.

* * *

어둠 속.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홀로 좋은 술을 즐기는 것은 아서스가 가진 몇 안 되는 취미들 중 하나였다.

아서스는 달을 참 좋아했다.

새까만 하늘 속에 홀로 고고히 떠 있는 노란 달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서스는 달이 아름답게 뜬 날이면 달빛을 안주 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쪼르르.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아서스가 주로 즐겨 마시는 주종은 포도주.

특히 육류와 어울리는 레드 와인을 즐기는 편이었다.

아서스는 시종의 도움 없이 스스로 포도주를 잔에 따른 후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잔을 집어 들어 포도주의 향을 음미했다.

“으음.”

좋은 향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좋은 향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드라칸 경.”

“예, 공작님.”

포도주의 향기를 음미하던 아서스가 나지막이 드라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어둠 속에 녹아 있던 역탑주, 드라칸 로티크가 모습을 드러내며 아서스의 부름에 답했다.

“달빛이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꿀꺽.

드라칸은 긴장했다.

아서스 공작이 이유도 없이 자신을 부른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될 만한 일은 단 한 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긴장되었다.

보통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고들 하지만 이유 없이 긴장하는 존재들이 바로 무서운 상관을 둔 부하 직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아서스의 입에서 본론이 언급되었다.

“모드레드가 죽었어요.”

“예, 예? 그 모드레드 경이 말입니까?”

“네에, 그것도 바로 방금 전에 말이죠. 그런데 참 이상해요. 이 제국에서 모드레드를 쓰러뜨리는 건 둘째 치고 내 가문의 사람인 모드레드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수많은 의미가 내포된 물음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고, 드라칸을 용의자로 심중에 둔 추궁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드라칸은 침묵을 유지했다.

아서스의 의도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간 어떠한 결과가 벌어질지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고, 공작님! 커, 커허헉!”

드라칸을 응시하던 아서스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맹수의 그것처럼 변했다.

그것은 밤하늘에 뜬 노란 달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아서스의 달과 눈이 마주친 드라칸은 강렬한 통증과 함께 호흡기가 틀어 막히는, 아찔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천천히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드라칸의 몸.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아서스가 눈짓만으로 그를 공중으로 띄워 올린 것이었다.

“흐음.”

아서스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달인지 맹수인지 모를 눈동자를 띠고서 괴로워하는 드라칸을 한동안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서스의 눈빛이 다시 사람의 것으로 돌아왔다.

쿵!

아서스의 눈동자가 다시 사람의 것으로 되돌아온 순간, 허공에 떠올랐던 드라칸의 몸뚱이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이어서 아서스가 말했다.

“모드레드는 베네딕을 쫓던 도중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드라칸 경. 분명히 모드레드의 육체는 ‘강화된 키메라’로 재구성하지 않았던가요?”

“그렇습니다, 콜록!”

“그것 참 이상하군요. 드라칸 경의 말대로라면 평범한 인간보다 몇 배나 더 고등 생물이 된 모드레드가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리가 없잖아요?”

“그, 그렇습니다!”

모가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칸은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이에 아서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

“사실 예상했습니다. 아직 야누스의 힘을 손에 넣지 못한 키메라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말을 마친 아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연이어 말을 이어 나갔다.

“베네딕에 이어 모드레드까지 이 꼴이 되다니……. 이거, 벌써 꺼낼 패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더는 어쩔 수가 없군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연이어 터졌다.

이에 수상함을 느낀 아서스는 서둘러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책임을 드라칸에게 미루지 않았다.

아니, 미루지 않았다기보다는, 더 이상은 그가 못 미더운 나머지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지이잉!

아서스의 눈동자가 다시금 맹수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란색이 아닌 붉은빛을 잔뜩 띤, 좀 더 섬뜩한 느낌이 가미된 눈동자로 변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샤하트라 왕궁의 침소.

그것도 헤라리온의 곁에서 잠을 자고 있던 셀란 칸의 눈동자 또한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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