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두 번째 단추 (5)
헨리는 들어 올린 손을 거두었다.
그런 다음 걸레 조각처럼 흩어진 잔해 앞으로 다가가 리치 나이트의 흔적을 찾았다.
‘이거면 되겠지.’
수많은 마법들이 있었지만 헨리는 일부러 매드 사이클론을 사용했다.
상대를 찢어 놓는 매드 사이클론이라면 적어도 리치 나이트에 대한 흔적 정도는 남겨 놓을 테니까.
그리고 헨리의 예상대로 바닥에는 데스 나이트와는 구분되는 리치 나이트 특유의 흔적들이 몇 가지 발견되었다.
헨리는 개중에서 반쯤 잘려 나간 리치 나이트의 투구와 자루뿐인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주워 든 그것들을 이셀란에게 갖다 붙인 뒤, 이셀란과 함께 다시 얼렸다.
“프리즌.”
쩌저적!
배려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셀란은 리치 나이트를 잡고 싶어 했고, 헨리는 정체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이셀란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어서 헨리는 얼린 이셀란을 아공간에 수납한 후, 애초에 목표로 했던 도마뱀 마물의 사냥을 시작했다.
이셀란을 요새로 데려다주는 것은 사냥이 끝난 뒤,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었다.
* * *
“헉!”
정신을 차린 이셀란이 짧은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여느 때처럼 헐벗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크윽!”
이셀란은 엄습하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서둘러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자신은 분명히 마물의 숲에서 듀라한을 상대로 리치 나이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듀라한을 협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나……?”
듀라한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갑작스레 닥친 강렬한 힘에 의해 시선을 빼앗겼다는 사실까지만 기억날 뿐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기억상실 따위에 걸려 본 적이 없었기에 이러한 사실이 더더욱 납득되지가 않았다.
달그락.
그때였다.
이셀란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절반 정도 형체가 사라진 낯선 형태의 투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투구뿐만이 아니었다. 칼자루와 갑옷 장식 등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것들이었다.
이에 이셀란은 서둘러 등불을 켜 그것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등불이 밝혀졌을 때, 이셀란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이것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리치 나이트의 잔해들이었다.
그래서 이셀란은 더더욱 놀란 눈초리로 눈동자를 굴렸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리치 나이트의 잔해를 확인한 이셀란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자신의 침대는 혈흔이나 때 한 점 없이 말끔했고, 벽면에는 자신의 검과 갑옷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또한 두통을 제외하고는 육체의 그 어떤 곳에도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했다.
리치 나이트를 상대했던 기억이 나지 않으니 가슴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 됐든, 리치 나이트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이렇게 유해를 남겼다.
“안 돼…….”
털썩.
반쯤 벌려진 입술과 함께 다시금 침대 위에 주저앉는 이셀란.
리치 나이트는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해선 안됐다.
리치 나이트는 ‘그놈’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는 생각에 이셀란의 얼굴에 핏기가 하얗게 가셨다.
* * *
“훨씬 낫네.”
헨리가 흡족한 표정으로 방금 제작한 블랙 티어 1회분을 응시했다.
헨리는 얼마 전 리치 나이트를 제거한 이후 파레곤을 대신할 도마뱀 마물로, ‘사이클론 히드라’를 손에 넣었다.
3급 구역의 포식자인 데스 나이트와 듀라한들을 대거 제거한 덕일까? 경계심 없이 풀숲을 어슬렁거리던 사이클론 히드라를 발견했던 것이다.
운이 좋았다.
헨리가 손에 넣은 사이클론 히드라는 싱싱한 놈이었다.
녀석은 꼬리를 10개나 가지고 있는 데다가 덩치까지 거대하여 꼬리 또한 파레곤의 것보다 훨씬 더 굵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레곤보다 몇 단계나 높은 등급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재생력 또한 파레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헨리는 그런 사이클론 히드라를 연구실 벽면에 단단히 고정시켜 두었다.
녀석은 앞으로 훌륭한 재료 공급원이 될 몸이니까.
‘그럼 이제 정리가 거의 다 된 건가?’
사이클론 히드라를 고정하는 작업을 마친 헨리는 연구실 의자에 앉아 천천히 계획들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아이젠에게 받은 한 달간의 휴가 중 이제 막 보름 정도가 지났다.
그동안 헨리는 각종 교역로를 확장하고 샤하트라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제2의 마탑인 설탑을 건설하고 설탑과 연결되는 텔레포트 게이트들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훨씬 더 보람찼던 일은 역시 아크 메이지로의 각성과 오베르의 죽음, 그리고 핑크 스왐프를 두 백작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헨리는 보름 동안 진행시킨 일들을 천천히 되짚으며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보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일들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헨리에겐 할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예컨대 진화의 알에 대한 활용이라든가 진화 중인 클레버를 각성시키는 것들 말이다.
‘진화의 알로 알프레드를 꾀는 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우선은 클레버부터 해결해야겠지?’
허투루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막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진화기에 접어든 클레버를 부화시키기로 했다.
이에 헨리는 아공간에 수납해 두었던 클레버의 알을 책상 위로 올렸다.
‘확실히 크긴 하네.’
호랑이가 알을 낳는다면 이 정도 크기가 아닐까 싶었다.
헨리는 우선 큼지막한 클레버의 알을 두드려 보았다.
단단했다.
마물의 알이라 그런지 마치 속이 꽉 찬 돌덩이를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그 덕분에 강제로 부화시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좀 덜어지는 듯싶었다.
‘마물의 알은 처음이지만 그래도 내 권속으로 계약되어 있으니 맥락은 같을 테지.’
백금 반지를 통해 마기를 정화하고 권속의 계약까지 끝마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뿌리를 떠나 클레버의 성장은 헨리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는 뜻.
특히 헨리와 계약한 권속들은 헨리의 마력에 큰 영향을 받았으니, 헨리가 아크 메이지로 각성한 지금이 진화를 돕기에는 적기였다.
이윽고 헨리는 책상 위에 마력의 응집을 도울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금방 완성되었다.
헨리는 마법진의 정중앙에 클레버의 알을 올려놓은 다음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축복하니 너는 나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라.”
우우웅!
주문이 시작되자 마법진이 헨리의 마력과 공명하며 정중앙에 놓인 클레버의 알을 향해 무수한 룬어들을 결집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가 마지막 명령어를 외친 순간이었다.
“……고속 성장.”
피이잉!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곧 헨리의 전신으로부터 무수한 양의 마력들이 클레버에게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름만큼이나 정직한 마법이었다.
고속 성장의 주문은 말 그대로 헨리의 힘을 억지로 주입해 강제로 성장을 이끌어 내는 주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는 전신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팔짱을 낀 채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힘을 주어 마력이 훨씬 더 잘 빠져나갈 수 있게끔 방출을 도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꽤 많은 양의 마력을 쏟아부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꿈쩍도 않는 클레버를 보며 헨리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어지간히도 처먹는군.’
마력이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이왕에 권속으로 거두었으니 클레버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수족으로 부릴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모되자 조금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알의 가장자리로부터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쩌적!
‘드디어!’
껍질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자 헨리는 들뜬 마음에 퍼붓는 마력의 양을 좀 더 늘렸다. 그리고 마력을 주입하는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했다.
쩌적! 쩌저적!
효과는 굉장했다.
마력을 주입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금이 가는 속도 또한 훨씬 더 빨라졌다.
그렇게 마력을 아낌없이 퍼붓자, 벌어진 금은 마침내 알 표면 전체를 가득히 메꾸었다. 그리고 얼마 뒤.
파삭!
조금은 허무한 소리와 함께 알 표면 전체가 가루가 되어 바닥에 폭삭 주저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알 속에서 진화를 기다리던 클레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클레버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슬라임?’
그것은 마치 슬라임처럼 투명한 점액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도 흔하디흔한 연두 빛으로 빛나는 슬라임 말이다.
이에 헨리가 나직이 클레버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클레버.”
“…….”
아직 적응을 덜 마친 탓이었을까?
헨리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클레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헨리는 문제점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잠깐의 고민 끝에 아공간에서 오이 하나를 꺼내 클레버의 촉촉한 몸뚱이에 박아 넣었다.
푹!
다행히 촉감은 부드러웠다.
게다가 표면 자체가 점액질 덩어리라 그런지 무리 없이 깊숙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부르르, 부르르……!
옅게 진동하기 시작하는 점액질.
심지어 연두 빛을 띠던 점액질은 곧 분홍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분홍빛으로 물든 점액질은 이내 곧 몸체에 박혀 있던 오이를 조금씩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오이 한 개 모두가 점액질 안쪽으로 빨려들어 갔을 때, 헨리는 피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비록 클레버의 겉모습은 바뀌었으나, 녀석이 가진 특유의 취향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는 클레버가 오이를 완전히 소화할 때까지 충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뒤, 박아 넣은 오이로 인해 간신히 정신을 차린 클레버가 몽롱한 목소리와 함께 눈과 입을 드러냈다.
“주인님…….”
“정신이 좀 드느냐?”
“죄송……해요……. 아직 주인님의 마력을…… 전부…… 소화하질 못해서…….”
“알겠다. 충분한 시간을 줄 테니 소화가 끝나면 말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클레버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감사 인사를 남긴 후, 계약을 맺은 반지로 역소환되었다.
“휴…….”
클레버의 각성을 끝마친 헨리는 그제야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클레버는 해결됐고.’
시간이 좀 더 걸릴 예정이긴 하였으나 어찌 됐든 클레버의 진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클레버를 각성시켰다고 해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헨리는 곧바로 콜소드에 내장되어 있는 단검인 ‘콜대거’를 소환해 벽면에 고정된 사이클론 히드라에게로 다가갔다.
* * *
“허억…… 허억…….”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사방에는 살아 있는 살점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몇 번을 쓰러뜨려도 반은 다시 검을 들었다.
“징그러운 새끼…….”
목구멍에 피가 맺혀 말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은 기어코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싸움은 끝났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모드레드는 갑옷 사이로 촉수를 끄집어내더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괴물로 변했다.
그리고 그런 괴물이 되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사흘을 내리 반과 혈투를 벌였다.
끔찍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싸움이었다.
반은 되살아난 모드레드와 싸우는 동안 아홉 번의 관통상을 입고 세 번의 구토를 했으며 여덟 병의 포션을 마셔야만 했다.
그리고 끝끝내 승리했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었을까?
그 강인한 반조차도 다량의 출혈 앞에선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털썩!
시야가 흐려지며 오금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반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러나 손에 쥔 검을 지팡이 삼아 끝끝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후우…….”
수중에 남은 포션은 한 병.
그마저도 최하급 힐링 포션 한 병이 전부였다.
반은 죽을힘을 다해 그것의 마개를 열어 억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꿀꺽!
반은 이미 최하급 힐링 포션 한 병으로는 도저히 치유할 수 없을 만큼의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당장의 빈혈기를 없애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알려야만 한다…….”
죽은 모드레드의 부활.
그리고 되살아난 모드레드의 괴물 같은 모습.
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헨리에게 알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으으으……!”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반.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반은 억지로나마 한 발자국씩, 검을 지팡이 삼아 비발디 타운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나긴 핏자국의 꼬리를 남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