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두 번째 단추 (3)
“확실하군.”
이셀란은 헨리에게 받은 아공간 주머니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확실하네요.”
두 사람은 익숙한 모양새로 거래를 마친 후, 여느 때처럼 가볍게 티타임을 즐겼다.
이윽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헨리가 먼저 질문했다.
“부사령관님.”
“왜?”
“벌써 세 번째 거래이긴 하지만 왜 이런 물건들이 필요하신 건지 정말로 말씀해 주시지 않으실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궁금해하지도 말고, 어디 가서 나불거리지도 마.”
궁금했다. 이셀란은 밀리언 상단을 자신의 직속 상단으로 만든 이후 매번 똑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헨리에게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성수와 힐링 포션, 해독제, 그리고 은을 섞어 만든 다량의 쇠줄……. 대체 어디에 쓰려고 매번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거지?’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 정도 거래가 진행될 때마다 이셀란이 항상 똑같은 물품들을 요구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헨리의 호기심에 대해 이셀란은 단호함을 보였다.
그는 그럴 때마다 신경 끄라며 헨리에게 핀잔을 주었고 결국 헨리는 오늘도 그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뭐, 상관 없을라나?’
그러나 그것이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만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헨리는 늘 인사치레 삼아 물건의 용도를 물었던 것이고.
이에 헨리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부사령관님, 오늘 밤에 둘이서 술이나 한잔하시겠습니까?”
“오늘? 오늘은 안 돼.”
“예?”
“오늘은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같이 마셔 주고 싶다마는 오늘은 다른 놈이랑 마시도록 해.”
이셀란의 거절에, 헨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떴다.
여태껏 이셀란이 술을 마다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헨리는 이번에 처음으로 이셀란에게 술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그 충격이 더욱더 컸다.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스러웠다.
이셀란과의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헨리가 먼저 그에게 술자리를 권한 까닭은 오늘 밤에 새로운 파레곤을 확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여느 때와 같이 쓸 만한 알리바이의 확보를 위해 이셀란의 관사에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셀란이 술자리를 거절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뭔가 이상한데?’
수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헨리가 처음으로 제안한 술자리인데 이셀란은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더더욱 이셀란의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헨리가 이셀란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 완전히 어긋난 것도 아니었으므로, 헨리는 우선적인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확실히 뭔가가 있긴 해.’
이에 헨리는 아쉬운 대로 오늘 밤은 로난의 관사에서 묵기로 했다.
여전히 이셀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지우지 않은 채 말이다.
* * *
밤이 깊었다.
다행히 로난은 검술 쪽으로는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지만 의외로 음주에는 취약한 편이었다.
헨리는 술에 취해 잠든 로난을 방에 눕힌 뒤, 관사를 빠져나와 마울의 숲으로 이동해 금방 4급 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전에 4급 구역 전체를 불태워 버린 탓일까?
금방 복구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4급 구역은 여전히 쑥대밭인 모습 그대로였다.
헨리는 여전히 수북이 쌓인 잿더미를 발로 뭉개며 한숨을 내쉬었다.
‘쯧, 이러면 곤란한데.’
파레곤은 4급 구역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마물이다.
그런데 헨리가 4급 구역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4급 구역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생명체가 없었다.
하지만 헨리에겐 블랙 티어의 핵심 재료인 파레곤의 꼬리가 필요했다.
헨리는 앞으로도 더 많은 마력들을 흡수하여 서둘러 7서클의 경지에 올라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나?’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확히 말해서 ‘파레곤의 꼬리’라기보다는 ‘도마뱀 마물의 꼬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굳이 파레곤이 아닌 다른 도마뱀 마물의 꼬리라면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파레곤을 제외한 다른 도마뱀 마물들은 모두가 최소 3급 구역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말인즉슨 파레곤의 대체재를 구하기 위해선 한 구역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금방 결론에 다다른 헨리는 이윽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쑥대밭이 된 울람의 미로.
그 위엔 울창하던 수풀도, 마물도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침 잘됐군.’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마물의 숲 특유의 자정 작용을 통해 마물들의 생태계가 다시금 형성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헨리는 아직 생태계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이곳에 설탑과 연결되는 새로운 게이트를 지어 둘 참이었다.
딱!
쿠구구구구!
헨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지면이 푹 꺼지기 시작하더니, 헨리가 발을 디딘 곳을 중심으로 지하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하 계단은 꽤 깊은 곳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는 당연히 칠흑 같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딱!
헨리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지하를 밝게 비추는 밝은 구체들이 생겨났다.
헨리는 그 빛에 의존하여 전과 같은 방식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헨리는 저번과 같이 마력 회복 장신구를 게이트의 심장으로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마력을 가진 4급 구역의 마물들이 이 게이트를 통해 설탑으로 역소환되어 오는 불상사를 방지해야만 했으니까.
이윽고 텔레포트 게이트는 성공적으로 소환되었다.
헨리는 이 게이트에게 ‘칼리번 게이트’라는 이름을 지어 준 뒤 설탑의 화이트 게이트와 연결시켜 두었다.
그리고 헨리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우드득, 우드득!
그리고 다시금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엔 내려앉은 구멍을 가득히 덮을 정도로 울창한 수풀들이 잔뜩 피어나기 시작했다.
출입구는 필요 없었다.
어차피 칼리번 게이트를 이용할 사람은 헨리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이외에도 헨리는 요새 사람들에게 쉬이 게이트의 존재를 들키지 않도록 몇 가지 마법들을 추가로 시전해 두었다.
‘괜찮네, 이 정도면.’
마지막 마법이 시전된 직후, 헨리는 꽤나 흡족한 표정으로 3급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 * *
‘역시 3급 구역이야. 4급 구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공기가 탁해.’
3급 구역에 발을 들인 헨리는 3급 구역 특유의 퀴퀴한 냄새에 곧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런 것이 4급 구역의 공기가 동식물들을 금방 중독시킬 정도였다면, 3급 구역부터는 공기를 한 모금만 들이켜도 곧바로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헨리는 ‘베놈의 심장’과 ‘하얀 숨결’에 의해 호흡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3급 구역은 꽤나 고요했다.
3급 구역부터는 일반적인 마물들보다는 진화를 마친 진화종들이나 고위종 마물, 최하급 마족 들이 주로 서식했으니까.
‘괜히 소란 피울 필요는 없겠지.’
파레곤의 경우엔 개체도 적고 붙잡기도 힘든 문제도 있었지만 울람의 미로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대를 모두 불태우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3급 구역부터는 도마뱀 마물의 종류가 꽤 많았기 때문에 적당히 보이는 대로 잡아들일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정말로 닥치는 대로 블랙 티어를 만들어 두어야만 했으니까.
이윽고 헨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열 걸음이나 채 걸었을까?
헨리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맹렬한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몸을 반대 방향으로 비틀었다.
파바바박!
헨리가 몸을 비튼 순간, 그 자리에 날카로운 가시 일곱 개가 일직선으로 날아와 바닥에 꽂혔다.
그리고 헨리는 가시가 날아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니들 게헨나’가 마계목 위에 숨어 헨리를 노리고 있었다.
“니들 게헨나라…….”
마물의 숲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가지고 있는 게헨나들.
니들 게헨나는 그런 게헨나들 중에서도 최상위 형태로 진화한 정상급 개체들 중에 하나였다.
“몸 풀기에는 적당하겠지. 착검.”
지이잉!
명령어를 외치자 불카누스로부터 받은 반지가 허공에서 새하얀 빛 무리를 내뿜으며 콜소드를 소환했다.
칼자루가 손에 착 감겼다.
헨리는 소환된 콜소드를 이리저리 휘둘러 본 후,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천천히 전신에 오러를 피워 냈다.
그런데.
“음?”
전신에 오러를 휘감은 뒤 자연스럽게 콜소드에도 오러를 출력시켜 냈다.
그런데 콜소드에 출력된 오러의 양이 평소보다 훨씬 더 두껍고 넓게 출력되고 있었다.
‘설마?’
뜻밖의 발견이었다.
애초에 콜트아이언으로 무구를 만들려던 이유가 오러를 대신해 검에 두르던 마력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헨리의 오러가 마력에 영향을 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헨리의 오러 또한 콜트아이언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었다.
‘어쩌면 불카누스가 희대의 역작을 탄생시킨 걸지도 모르겠군.’
뜻밖의 발견은 언제나 기쁜 법이다.
덕분에 헨리는 예정했던 것보다 좀 더 빨리 시기를 앞당겨 새로운 무구들의 성능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착갑.”
지이잉!
명령어는 콜소드와 동일했다.
헨리는 콜소드에 이어 콜아머까지 소환해, 마물의 숲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순백의 기사로 새롭게 강림하였다.
절걱!
소환된 콜아머는 얼굴 전체를 감싸는 투구를 소환함으로써 마침내 준비를 끝마쳤다.
츠즈즈즛!
전신에 녹색 빛 오러를 풍기는 순백의 기사.
헨리는 전신을 감싼 콜트아이언에 의해 온몸에 힘이 끓어 넘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팡!
발바닥에 오러를 실은 헨리는 폭발하듯이 땅을 박차고 나가 순식간에 마계목 위의 니들 게헨나와 거리를 좁혔다.
흡사 번개를 연상케 할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단숨에 니들 게헨나를 콜소드로 베어 냈다.
서걱!
단면은 깔끔했다.
온몸이 날카롭고 단단한 외골격으로 이루어져 있던 니들 게헨나는, 비명 한 번 질러 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타닥!
니들 게헨나의 목을 베어 낸 헨리는 다시금 지상에 착지했다.
그런 다음 오른손에 쥔 검을 안쪽으로 당긴 후, 출력시킬 수 있는 최대치의 오러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조용히 도마뱀들만 수거해 갈 생각이었지만.’
츠즈즈즈즛!
‘기회가 왔을 때 한번 제대로 시험해 봐야 하는 법이지!’
최대 출력치의 오러.
콜소드에 응축된 오러는 마치 에메랄드빛 태양을 연상케 했다.
츠즛! 츠즛! 츠즈즈즛!
응축된 오러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두근거렸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것은 헨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러를 습득한 이후로, 이토록 강력한 오러를 온몸으로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다!’
부웅!
외침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콜소드에 응축되어 있던 녹색 빛 오러가 거대한 초승달을 그려 내며 부채꼴 모양으로 쏘아졌다.
소드 마스터들은 이렇듯, 오러를 쏘아 내는 행위를 일컬어 ‘참격’ 혹은 ‘검격’이라고 불렀다.
후우우우웅!
마치 거대한 삭풍이 숲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만큼 헨리의 참격은 조용하고 묵직했으며, 조용한 암살자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3급 구역 일대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저 먼발치의 허공 끝에서 헨리의 참격이 사그라들었을 때, 헨리는 무수히 많은 마계목들이 쓰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쿵! 쿠궁! 쿠구구궁!
“키에에엑!”
“뀌에에엑!”
“뀌르르륵!”
삭풍에 휘말린 것은 마계목이나 바위 같은 것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수많은 3급 구역의 존재들이 헨리의 참격에 휘말려 절명하거나 큰 부상을 입는 등 엄청난 피해들을 입었다.
그런데…….
츠즈즈즛!
‘음?’
그때였다.
헨리의 참격이 홍해를 갈라놓듯 모든 것들을 갈라놓았을 때, 그 갈라짐의 끝에는 꽤나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전신에 푸른 오러를 두른 채 가만히 헨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인영만 구분될 뿐, 그 사람의 자세한 얼굴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헨리는 마법을 사용해 시야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확대된 시야의 끝에는 놀란 표정을 하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셀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