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아크 메이지 (2)
아크 메이지.
제국 최고의 마법 교육기관인 마탑 내에서도 그 수가 몇 안 되는 독보적인 존재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가치가 소드 마스터와 비슷하던 마도사 때와는 차원이 다른 대우들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헨리는 제국에서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존재인 아크 메이지로 드디어 각성할 수가 있었다.
‘기특한 놈.’
헨리는 자신의 몸에 붙어 살갗을 부비는 엘라곤에게 흐뭇한 시선을 보냈다.
생각지도 못했다.
엘라곤에게 치유의 힘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 힘이 이 정도로 강력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 팔을 재생시켰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니.’
엘라곤이 부활하면서 헨리는 왼팔이 폭발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그 상처는 부화의 순간에 터져 나온 일시적인 치유력인 줄로만 알았지 그 힘이 순전히 엘라곤의 것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어찌 됐든 아크 메이지로의 각성은 물론이고, 엘라곤의 진가 또한 이번 각성을 통해 깨달았으니, 헨리에겐 그저 호재였다.
상쾌했다. 방 내부의 온도나 습도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마도사였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자연의 미묘한 차이가 헨리의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헨리는 먼저 난장판이 된 실험실부터 청소하기로 했다.
“클린.”
딱!
잠깐 동안 광명이 번쩍였다. 그러자 실험실의 내부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역시.’
3서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위력적인 깨끗함이었다.
헨리는 흡족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오래간만에 ‘그 주문’을 외웠다.
“……존재를 드러내 나에게 편리함을 안겨라.”
치직! 치치지직!
허공에 스파크가 튀며 진한 마력들이 응집되었다.
주문은 틀리지 않았다.
전생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마법들 중 하나였으니까.
스파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허공에서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일며 백색의 공간이 개방되었다.
헨리는 오랜만에 재회한 ‘그것’을 향해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오래간만이구나.”
그것은 바로 아크 메이지만이 누릴 수 있는 권능, ‘아공간’이었다.
쿠오오오!
그 모습은 마치 허공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헨리는 개방된 아공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다음 엄지와 검지를 붙인 다음 천천히 손가락을 벌려 보이며 아공간 입구의 크기를 넓혔다.
확연하게 거대해진 입구.
헨리는 이어서 벌린 검지를 대각선으로 그어 가득 쌓인 핑크 스왐프를 한 번에 집어삼켰다.
딱!
수납을 마친 헨리는 손가락을 튕겨 아공간을 취소시켰다.
그런 다음 넝마가 된 의복과 머리를 정돈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실험실을 벗어났다.
* * *
실험실을 벗어난 헨리는 추방민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저택을 벗어나 살게라의 설산으로 향했다.
바깥에는 여전히 거센 눈보라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눈보라라 할지라도 이까짓 자연재해 따위는 헨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뀨우우우!
팔찌에서 벗어난 엘라곤은 얼음 속성을 가진 정령답게 오히려 이러한 날씨를 즐겼다.
그리고 헨리 또한 그러한 점을 알기에 엘라곤을 풀어 준 것이고.
헨리는 천천히 이동했다.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눈 위를 걸어 마침내 도착한 곳은 살게라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일컬어지는 설산의 꼭대기였다.
혹한의 눈보라가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헨리는 여전히 쏟아지는 눈보라와 그 아래에 덮힌 하얀 세상을 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되겠군.”
-뀨?
고개를 끄덕이는 헨리를 보며 엘라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헨리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라곤을 들어 올려 오른쪽 어깨 위에 얹으며 말했다.
“잘 보거라, 재미있는 걸 보여 줄 테니.”
-뀨!
헨리의 말에 엘라곤이 힘차게 대답했다.
곧 헨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오물거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땅에 위대한 건축가의 축복이 깃들게 하소서. 라이징 그랜드 맨션!”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시전자의 의도대로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최상위급의 생활 마법.
헨리가 주문을 외운 직후, 체내에서 강줄기처럼 거대한 양의 마력들이 일시에 증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큼 마력들이 사라져도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이미 헨리의 심장 속에는 대운하 같은 거대한 마력들이 넘실거리고 있으니까.
‘…….’
그러나 마법이 발동된 직후, 눈앞의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뀨?
이에 엘라곤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헨리는 그런 엘라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설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진동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기지개 같은 진동이 끝났을 무렵, 헨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괜찮네.”
짧은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살게라의 설산들을 병풍처럼 둘러싼, 거대하고 기다란 하나의 탑이 있었다.
탑.
헨리는 라이징 그랜드 맨션으로 탑을 만들었다.
그것은 보통의 탑이 아니었다.
헨리가 세운 탑은 아크 메이지급 마법사부터 세울 수 있다는 위대한 건축물, ‘마탑’이었다.
물론 헨리의 경우엔 비공식 마법사였으므로 몰래 탑을 세워도 됐다.
하지만 마도사 때 세우는 탑과 아크 메이지일 때 세우는 탑은 그 근간부터가 달랐다.
“플라이.”
헨리는 어깨 위에 엘라곤을 얹고서 천천히 탑의 입구로 날아 움직였다.
그리고 이제 막 탑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탑 내부의 더운 공기가 헨리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흠.”
탑 안으로 발을 디딘 헨리는 가볍게 신음하며 탑 내부를 둘러보았다.
탑을 떠받치는 중심축을 기점으로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들.
그리고 층계마다 나뉘어 있는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방들을 비롯해 허공을 떠다니는 수많은 부유석들.
모든 것이 헨리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훨씬 낫군.”
시전자의 상상대로 건물을 증축해 내는 마법, 라이징 그랜드 맨션.
헨리가 상상한 탑의 기초 모델은 다름 아닌 제국 황실 옆에 세워진 제국 최초의 마탑이었다.
물론 그 최초의 마탑 또한 헨리가 세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헨리는 마법사 최초로 두 개의 마탑을 세운, 더블 타워의 오너가 된 셈이었다.
물론 전생의 헨리가 공식적인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기록 자체는 비공식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헨리는 두 번째로 세운 마탑이니만큼 일부러 원조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리고 더욱더 화려하게 지었다.
헨리는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탑의 1층 중심에 섰다.
꽤나 널찍한 공백.
헨리는 일부러 이곳을 비워 두었다. 탑을 지탱하는 대들보 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을 이곳에 설치하기 위해서 말이다.
-뀨, 뀨, 뀨!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엘라곤은 허공을 떠다니는 부유석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헨리는 그런 엘라곤에게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품속에서 전용 붓 몇 자루를 꺼내 자신의 피를 묻힌 다음 가볍게 마법을 발동시켰다.
“매직 핸드.”
퐁! 퐁! 퐁!
주문을 외우자 흰 장갑을 착용한 듯한 모습의 손 몇 개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는 그것들에게 자신의 피를 묻힌 붓들을 나눠 주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팔짱을 낀 뒤 수어 개의 손들을 조종하며 공백 가득히 마법진들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진 그리기는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헨리의 붓놀림들은 일필휘지로, 단 한 번도 틀리지도 멈추지도 않고 쉴 새 없이 붓을 놀렸다.
그리고 마침내 비워 둔 공백 가득히 무수한 룬어들로 채워졌을 때였다.
“그만.”
명령을 내리자 매직 핸드들이 동작을 멈추고 뒤편에서 대기했다.
이어서 헨리는 가만히 뒷짐을 지고 매직 핸드들이 그린 마법진을 다시 한 번 검토하기 시작했다.
‘괜찮네.’
오차는 없었다. 다른 이가 아닌 헨리가 그린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검토를 거치는 까닭은 헨리가 마법에서 만큼은 꼼꼼하고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토를 마친 헨리는 매직 핸드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런 다음 완성된 마법진 위에 발목에 차고 있던 ‘루미놀의 발찌’를 내려놓았다.
발찌를 내려놓은 헨리는 이어서 손을 내뻗은 뒤, 눈을 감고 손끝에 마력들을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헨리의 전신에 녹색 빛 마력들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심장과 코어가 동시에 활용되다 보니 오러든 마력이든 무슨 힘을 사용하더라도 같은 종류의 힘이 발산되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여전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끝없이 입술을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는 손바닥 전체에 진한 순백색의 광채를 띄워 냈다.
광채가 드리워진 순간, 헨리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마법진의 한쪽 끝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텔레포트 게이트, 오픈!”
번쩍!
광채가 마법진에 닿자마자 핏빛 룬어들이 순식간에 순백색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리고 접촉된 헨리의 마력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공명은 곧 진동을 낳았고, 넓게 펼쳐진 룬어들이 헨리가 손을 댄 곳을 향해 순식간에 뭉쳐졌다.
그리고 마침내, 뭉쳐진 마법진을 중심으로 거대한 크기의 문짝이 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콰드드드득!
바닥에 균열이 일었다가 다시 붙기를 여러 번. 문은 보통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마치 하나의 크고 화려한 거울을 연상케 했다.
…….
울림이 멎었다.
먼지도 광채도 사라졌다.
문짝이 솟구치며 생겨났던 균열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정돈되어 있었다.
헨리는 눈앞에 나타난 큼지막하고 화려한 거울을 가만히 매만지며 입꼬리를 올렸다.
화려한 거울.
얼핏 보면 거울처럼 보이는 그것은 헨리가 말한 그대로인 ‘텔레포트 게이트’였다.
시전자의 마력으로 유지되는 아크 메이지의 찬란한 권능들 중 하나.
마탑에도 이것과 똑같은 것이 있었지만, 마탑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해 이제는 그 사용이 거의 금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르지.’
그러나 이번에 만든 게이트까지 그런 식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고작해야 의미나 부여하자고 이런 엄청난 권능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에 헨리는 가만히 거울 표면에 손을 올렸다.
찰박.
거울 표면이 물결치듯, 잔잔한 출렁임을 만들었다.
아직 어떠한 좌표도 저장되지 않은 순수한 게이트.
헨리는 게이트에 손을 올린 뒤 미리 계산해 둔 좌표들을 차례대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중얼중얼중얼…….
영구적으로 사용할 좌표인 데다가 일반인들에겐 들키지 않게끔 꽤나 은밀한 곳들 위주로 좌표를 계산해 놓았다.
한참 뒤, 좌표의 입력을 끝낸 헨리가 표면에서 손을 뗐다.
찰박.
손을 떼자 다시금 출렁이는 거울 표면.
이윽고 헨리가 게이트 앞에서 목적지를 외쳤다.
“샤하트라.”
부웅!
목적지를 외치자 체내의 마력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평소에 텔레포트를 사용할 때와 비교하자면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적은 양의 마력이었다.
씨익.
소모되는 마력량을 보고 미소 짓는 헨리.
예상대로였다.
‘역시……!’
헨리가 가장 아끼는 보물들 중 하나인 ‘루미놀의 발찌’.
대지에 스며들어 있는 마력을 착용자에게 흡수시켜 주는 마법사들에겐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이번에 만들 텔레포트 게이트를 위해 과감히 그것을 투자했다.
이번에 만들어진 텔레포트 게이트의 ‘심장’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루미놀의 발찌를 동력으로 얻은 텔레포트 게이트는 살게라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언 땅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마력들을 독자적으로 수급하기 시작했다.
흡족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것은 살게라의 마탑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너는 앞으로 ‘화이트 게이트’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그리고 너를 품고 있는 이 탑의 이름을 ‘설탑’이라 명명토록 하겠다.”
눈보라가 쏟아지는 설탑 속의 화이트 게이트.
헨리는 이 두 가지에게 애정을 듬뿍 담아 손수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작명을 마친 헨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화이트 게이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태양의 땅, 샤하트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