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아크 메이지 (1)
파레곤이 죽었다.
하루 평균 10회.
의도적으로 육체를 회복시켜 꼬리를 자른 횟수였다.
그렇다 보니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자랑하던 파레곤도 결국엔 과도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과로사’ 하고 말았다.
포션도, 힐도 소용이 없었다.
파레곤이 비록 마물의 일종이라고는 하나 결국 마물 또한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꼬리 자르기 백 번이면 꽤나 오래 버텼어. 나쁘지 않아.’
파레곤이 죽은 날, 헨리는 오베르가 죽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슬퍼했다.
물론 슬픈 감정과는 별개로 죽은 파레곤의 사체를 블랙 티어가 가득 든 항아리에 던져 넣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준비된 블랙 티어 한 항아리는 여러 의미로 굉장한 것이 되어 버렸다.
부글부글.
헨리는 항아리 가득히 부글거리는 블랙 티어를 보며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드디어 오늘인가?’
파레곤을 처음 잡아 온 날, 이미 시제품을 통해 블랙 티어의 효능은 완벽하게 검증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500회분에 달하는 블랙 티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그동안 어떻게 하면 블랙 티어를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머리를 굴린 결과, 헨리는 진액에 가까운 블랙 티어들을 한 번 더 고농축으로 압축시켜 낼 수 있는 연금학파의 비술, ‘압축술’을 사용키로 했다.
“후.”
짧게 한숨을 마친 헨리는 이어서 손가락을 튕겼다.
우웅!
그러자 항아리의 몸뚱이에 미리 새겨 넣었던 무수한 마법진들이 찬란한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슈슈슈슉!
항아리는 거짓말같이 한 손에 잡힐 만큼 조그마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헨리는 찻잔처럼 작아진 항아리를 집어 들었다.
‘그나마 좀 낫네.’
한 항아리나 마셔야 할 분량이 찻잔 한 잔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물론 고농축으로 압축된 만큼 부작용 또한 몇백 배가 되었을 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발 버텨 다오, 몸아.”
듣는 이는 없었지만 헨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이것을 집어삼킬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헨리는 미리 신전에서 구매해 온 통증을 없애 준다는 ‘무통약’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약을 들이켜자 몸이 좀 차가워지는 듯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감각 또한 좀 둔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제는 정말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헨리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진 뒤, 손에 쥔 항아리를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꿀꺽!
음미고 뭐고 뭘 느낄 겨를이 없었다.
헨리는 잔뜩 긴장된 마음을 끌어안고서 압축된 블랙 티어를 입안에 털어 넣자마자 곧바로 두 손을 모아 마법을 시전했다.
“아이언 체인!”
촤지지지직!
바닥에서부터 마법으로 만들어진 쇠사슬들이 뱀처럼 헨리의 전신을 휘감아 땅바닥에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특단의 조치였다.
그리고 쇠사슬들이 헨리의 몸을 감싼 그 순간.
“커허억!”
예고도 없이 오장육부를 강타하는 강렬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끄흐으으윽……!”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입에서는 절박한 신음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온갖 괴로움들이 한데 어우러져 헨리의 몸을 무대 삼아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끄윽, 끄아아아악……!”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목구멍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양 눈의 실핏줄이 터지며 헨리의 안광을 붉게 물들였다.
뜨거웠다.
전신이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것처럼 피부가 화끈거리고 식은땀들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와중에 육체는 오한에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사제, 이 사기꾼 새끼들이……!’
분명히 신전에서 가장 비싼 무통약이었건만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감각이 둔해진 탓에 정신 집중에 방해만 받는 듯했다.
낭패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스러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끄아아아아아악!”
오우거에게 전신을 두들겨 맞는 듯한 고통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쏟아졌다.
이전까지 느꼈던 것들은 고작해야 맛보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절그럭럭럭……!
고통이 가중될수록 헨리의 발버둥 또한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리고 발버둥이 심해질수록 땅바닥 깊이 고정된 쇠사슬들이 사시나무 떨듯이 몸체를 떨었다.
-뀨……?
그때였다.
블랙 티어에 의해 한참이나 고통받고 있을 때, 팔찌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엘라곤이 자신의 둥지에게 심상찮은 일이 생긴 것을 감지하고 제 스스로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바깥으로 기어 나온 엘라곤은 감히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둥지가 바로 헨리였다.
그런데 그런 둥지가 척 보기에도 아파 보이는 쇠사슬에 칭칭 감겨진 채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뀨뀨뀨!
파닥파닥!
허공에서 파닥거리던 엘라곤은 고통스러워하는 헨리를 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런 일은 엘라곤이 부화한 직후 두 번째로 있는 일이었다.
첫 번째는 헨리가 베네딕과 사투를 벌였을 때였다.
하지만 그때의 헨리는 혹시라도 싸움 중에 엘라곤을 잃게 될까 봐 무슨 일이 있어도 엘라곤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신신당부해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헨리가 미리 당부해 둔 것도 없었고 베네딕과 혈투를 벌일 때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뀨우, 뀨우, 뀨!
고통에 몸부림치는 헨리의 머리 위에서 엘라곤은 그저 허공을 빙빙 돌며 발만 동동거렸다.
그러나 헨리의 고통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갔다.
급기야 헨리의 두 눈과 귀, 그리고 입으로부터 피인지 무엇인지 모를 시커먼 것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라곤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이 허공을 빙빙 도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헨리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흐흐으으윽……!”
고통으로 인한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눈물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쏟아졌고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든 액체들이 배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엘라곤은 새끼를 품는 어미처럼 침착하게 헨리를 품었다.
그리고 완전히 헨리를 감싸 안았다고 생각했을 때쯤, 엘라곤의 육체로부터 따스하고 진한 청록색 빛의 아우라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 * *
블랙 티어를 섭취한 직후, 헨리는 눈깔이 뒤집힐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런 고통은 난생처음이었다.
치사량에 가까운 미라클 블루나 황제가 준 맹독, 프라시아의 죽음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었기에 탓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제발, 제발 빨리……!’
정신을 잃어선 안 됐다.
정신을 잃어버리는 순간, 미친놈처럼 날뛰는 블랙 티어를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리고 꿋꿋하게 기다렸다.
미라클 블루를 마셨을 때 그랬던 것처럼 늘어난 마력량에 의해 저절로 서클이 늘어나기만을 말이다.
그때가 되면 헨리는 강제로라도 체내에 스며든 블랙 티어 전부를 바깥으로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서클이 만들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몸속에선 엄청난 폭발의 대축제가 일어났는데, 서클은 늘지 않고 고통만 가중되니 헨리로선 그저 미칠 노릇이었다.
‘더, 더 이상은 이제……!’
이제는 정말로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아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버텼다간 육체고 정신이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온몸의 긴장이 점점 더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느슨해질수록 느껴지는 고통은 더더욱 커져만 갔지만 역설적으로 마음은 편안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뀨우!
물속에 잠겨 가는 것처럼 귀가 점점 더 멍해져만 갔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뀨우우!
‘이 목소린……?’
따뜻했다.
목소리를 인지한 순간부터 새하얗게 뒤집혔던 눈앞의 세상에 청록색 이채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불에 감싸인 것처럼 온몸에 포근함이 느껴졌다.
이유는 몰랐다. 다만 전신을 찢어 놓을 것 같던 뜨거운 열기가 아닌 어머니의 배 속 같은 포근함이 전신을 감싸 안자 흩어져 있던 정신들이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헨리는 그제야 감기던 눈꺼풀을 들어 다시금 주변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엘라곤! 네가 날 살렸구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두뇌는 뒤늦게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 판단을 마친 헨리는 그제야 자신의 내부를 헤집어 놓던 끔찍한 놈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지금부턴 내 차례다!’
정신을 집중하자 내부를 휘젓는 시커먼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블랙 티어였다.
놈은 마치 불한당처럼 심장뿐만이 아니라 전신에 걸쳐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헨리는 서둘러 심장의 서클들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전신에 순환되는 마력들을 조종하며 온몸에 퍼져 있는 불한당을 심장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래, 좀 더! 좀 더 격하게!’
독성도 독성이었지만, 마력을 증폭시켜 줄 놈들이 애먼 곳에서 폭주하고 있었으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베놈의 심장으로 독기를 제거하고 엘라곤에 의해 고통이 사라진 지금, 헨리에게 있어 블랙 티어는 훌륭한 영양분일 뿐이었다.
얼마 후 풍랑 같던 내부가 잔잔한 호수처럼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심장으로 놈들을 몰아내 전신의 고통을 덜어 낸 것뿐이었다. 폭주하는 블랙 티어 자체를 진정시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녀석들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눈에 띄게 잦아들어만 갔다.
그리고 헨리는 그제야 피식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확신했다.
이 치열한 혈투 속에서 마지막에 웃는 자는 바로 자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뀨뀨!
그리고 헨리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지자 헨리를 품고 있던 엘라곤 또한 그제야 흐뭇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켜 냈다는 일종의 뿌듯함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파아아앗!
그런데 그때였다.
헨리의 몸에서 갑작스레 새하얀 광채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엘라곤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헨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파아아앗!
빛은 점점 더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석양이 지듯이 천천히 사라져 갔다.
엘라곤은 눈부신 광휘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다시 똑바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야를 되찾은 그 순간, 엘라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철걱.
철그러러럭!
팽팽했던 쇠사슬들이 썩은 동아줄처럼 매가리 없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헨리는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넘쳐 나는 녹색 빛 마력에 의해 수풀처럼 머리카락과 옷깃을 흩날리고 있었다.
타닥.
바닥에 착지하는 헨리.
좀 전까지 고통받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하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헨리는 큼지막한 손을 뻗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라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네 덕분이다, 엘라곤.”
-뀨우!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엘라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라곤 또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에 지내던 둥지가 ‘초가집’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기와집’같은 웅장함이 느껴진다는 것을.
이어서 헨리는 천천히 두 손으로 얼굴과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상쾌했다. 그리고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전신에 끓어넘치는 진한 마력들.
헨리는 더 이상 5서클의 마도사가 아니었다.
‘아크 메이지’.
드디어 6서클의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