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칼리번의 군부 상인 (3)
이후에도 녹색 섬광은 몇 번 더 빛을 발했다.
그럴 때마다 섬광이 지나간 자리엔 목이 잘리거나 상반신이 잘린, 죽음의 흔적들이 헨리의 발자국 위로 가득히 떨어졌다.
‘시원시원하네.’
상성을 위해 일부러 이셀란에게 받았던 성검을 꺼냈다.
그리고 성검 위에 오러를 씌워 내자, 군인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 했던 절삭력이 손바닥 가득히 느껴졌다.
‘이래서 다들 오러, 오러 하는군.’
달밤이 환했다.
달리는 내내 바람이 일었고 마물들이 살고 있는 숲의 흙에는 찐득한 마력들이 가득했다.
‘최고야!’
그렇기에 헨리는 물 만난 고기처럼 마력을 사용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마력을 사용해도 사용한 만큼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지치는 줄도 모르고 금방 5급 구역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드디어……!’
5급 구역.
복무할 적에도 몇 번 드나들어 보지 못했던 곳이다.
5급 구역부터는 정말로 위험하기에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생에서의 5급 구역은 마물의 숲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았다.
그도 그런 것이 전생의 헨리는 1급 구역 너머에 있는 마계의 문에서 무려 ‘마왕’을 상대로 혈전을 벌였으니까.
‘확실히 공기가 무거워.’
공기에 이물감이 잔뜩 낀 것처럼 호흡이 조금 텁텁해짐을 느꼈다.
이에 헨리는 편안한 호흡을 위해 호흡을 돕는 마법, ‘하얀 숨결’을 시전했다.
‘한결 낫군.’
빨리 처리하면 좋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급할 것도 없었다.
성문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데 불과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5급 구역부터는 운만 좋다면 얼마든지 진귀한 재료들을 수급할 수 있었기에 좀 더 여유를 갖는 편이 좋았다.
지이이잉.
그때였다.
헨리의 손목에 차고 있던 청록색 팔찌가 진동하며 울기 시작했다.
엘라곤이었다. 헨리는 얌전하던 녀석이 갑자기 울어 대자 얼른 녀석을 해방시켜 주었다.
-뀨!
청록색 빛깔에 두 개의 뿔을 가졌으며 드래곤을 닮은 녀석.
바깥으로 소환된 엘라곤은 강아지처럼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두둥실 허공으로 날아올라 허공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곳이 마음에 드느냐?”
-뀨!
“그래그래. 여기라면 보는 사람도 없으니 마음껏 뛰어놀아라.”
엘라곤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기분 좋아 보였다. 헨리는 그 이유로 5급 구역 특유의 자연환경을 꼽았다.
마력이 풍부하고, 공기 중에 독소가 가득한 곳.
맹독의 속성을 타고난 엘라곤에겐 더없이 뛰놀기 좋은 환경이었다.
헨리는 허공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듯 날아다니는 엘라곤을 바라보다가 문득 엘라곤의 덩치가 불어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애들은 순식간에 자란다더니 정령도 딱히 예외는 아니군.’
소형견만 했던 엘라곤은 어느새 중형견만큼 자라 있었다.
헨리는 이따금씩 엘라곤을 보며 신기함을 느꼈다.
엘라곤에게 있어 헨리는 정식으로 계약된 주인도, 낳아 준 부모도 아닌, 그저 알을 품고 있던 둥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라곤은 그런 둥지에게 애정을 보이고 명령을 수행하며 마력과도 같은 힘들을 공유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주인이나 부모보다 훨씬 더 끈끈한 관계.
그렇기에 헨리는 엘라곤을 가급적 위험한 일에 투입시키지 않았다.
목숨을 다하면 정령계로 역소환되는 다른 정령들과는 달리, 인간계에서 태어난 엘라곤의 생명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뀨뀨뀨.
그때였다.
허공을 자유롭게 헤엄치던 엘라곤이 유유히 헨리에게로 다가와 헨리의 왼쪽 손목을 핥았다.
“음?”
엘라곤이 핥은 곳, 그곳에는 일전에 오베르의 비밀 창고에서 발견했던 정령의 알을 집어넣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군.’
헨리는 마법으로 살을 갈라내어 손목에 넣어 두었던 그것을 꺼내 들었다.
‘대체 뭘까?’
스칼조차 정체를 모르는 것이었다. 스칼의 말에 의하면 자연계가 아닌 이계의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엘라곤이 친근함을 보이는 것은 좀 아이러니한 사실이기도 했다.
‘결국 알프레드, 그놈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건가?’
대체 왜 이것이 오베르의 비밀 창고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스칼의 조언대로 정령술의 대가인 알프레드에게 이것의 존재를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헨리는 연신 알을 핥아 대는 엘라곤으로부터 다시 알을 빼앗은 다음 다시 그것을 손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발버둥 치는 엘라곤을 옆구리에 끼고서 4급 구역으로 이동했다.
* * *
‘도착했군.’
이제는 땅 색이 완전히 거무죽죽했다.
또한 웬만한 동식물들은 금방 중독되어 죽을 만큼 공기 중의 독소가 짙어지기도 했다.
헨리는 하늘 높이 솟아오른 울창한 마계목들을 바라보았다.
‘울람의 미로.’
헨리는 이것을 ‘울람의 미로’라고 불렀다.
울람은 과거에 헨리가 쓰러뜨렸던 식물형 마물로, 4급 구역을 지배하는 최상위 포식자였다.
당시의 울람은 그 크기가 어찌나 거대한지, 녀석을 쓰러뜨리기 위해 산불에 가까운 화염을 일으키고서야 놈을 겨우 쓰러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놈은 온몸이 전소되면서도 종족 번식의 본능을 잊지 않아 자신의 씨앗을 널리 뿌려 4급 구역 대부분을 미로처럼 울창한 숲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뭐, 그 명맥도 오늘까지겠지만 말이야.’
4급 구역에 전례 없는 거대한 숲이 형성되며 더더욱 생태계가 풍성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지형이 복잡해진 것 또한 사실.
헨리는 유유자적하게 울람의 미로 속을 뒤지며 원하고자 하는 것을 찾을 생각이 없었다.
“플라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헨리.
헨리는 울람의 미로가 손바닥만큼 작아질 때까지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충분히 하늘로 솟았다고 생각될 때쯤, 헨리는 떠오르는 것을 멈추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붙여 원을 만들었다.
한쪽 눈을 찡그리고 원을 통해 울람의 미로를 내려다보는 헨리.
이에 헨리가 말했다.
“어스 월.”
쿠구구구구!
그 순간, 유리잔 속의 물이 비워지듯 헨리의 몸속에서 마나가 쭈욱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울람의 미로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장벽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블랙 티어는 꼭 필요하겠어.’
숲 전체를 감싸는 장벽이다 보니 텔레포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막대한 양의 마력들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갑작스러운 장벽의 등장에 미로 속에 숨어 있던 마물들 또한 놀란 기색으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헨리의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이어 스피어.”
화르륵!
헨리의 주위로 생겨나는 수십 개의 화염 창들.
이윽고 헨리는 손을 높이 들어 올린 다음 장벽을 향해 내리그었다.
화르륵!
석궁처럼 쏘아지는 수십 개의 불화살들!
수십 개의 파이어 스피어들은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어 장벽 속의 미로를 무간지옥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꾸어어어어!
-키에에에에!
무간지옥 속에서 울부짖는 각종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장벽으로 인해 마물들은 탈출은커녕 절망감을 느끼고 다른 출구를 찾아 죽을 때까지 무의미한 방황을 할 뿐이었다.
화르륵!
고약한 산불 냄새가 마물의 숲 전체에 뿌려졌다.
헨리는 혹시라도 장벽을 파괴하려는 녀석이 있으면 그 녀석만 집중적으로 공격해 죽인 뒤 파괴된 장벽을 즉시 복구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울람의 미로는 결국 모두 불타고 말았고, 화염을 견디지 못한 마물들은 끝끝내 생명을 다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헨리는 천천히 장벽 안으로 낙하했다.
장벽 안에는 뼈대만 남은 마목들을 포함해 대지 가득히 뒤덮인 재와 산불로 인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훨씬 낫군.’
호흡은 문제없었다. 헨리에겐 호흡을 돕는 마법, ‘하얀 숨결’이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헨리는 확 트인 시야를 둘러보며 화염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질긴 생존자’들을 확인했다.
‘역시.’
지독한 산불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4급 구역의 마물들이었다.
개중에는 화염에 대한 내성을 가진 녀석들도 있을 것이고, 이 정도 산불은 불꽃으로 취급도 안 해 주는 놈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헨리가 찾고자 하는 녀석은 그런 놈들 중의 하나였다.
-키에에에!
화염이 사그라들자, 잿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괴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불로 대다수를 죽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4급 구역이었다.
헨리는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녀석들을 눈대중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다음 뽑아 든 검날의 끝으로 자신의 팔뚝을 갈라냈다.
주르륵.
상처를 따라 흐르는 많은 양의 핏물. 헨리는 자신의 검날에 팔뚝에 흐르는 혈독을 묻혔다.
‘여기라면 마음껏 휘둘러도 되겠지.’
헨리의 혈독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독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인간들을 대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강력한 독은 증거가 많이 남을뿐더러, 그렇게 되면 결국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하지만 장벽 속에 갇힌 이곳에선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파츠즈즈즛!
그리고 헨리는 코어에서 오러를 뽑아냈다.
오러는 산불처럼 거대하게 타올랐지만 번개처럼 우렁찬 기개를 내뿜었다.
-키륵?
새카만 잿더미 위, 그리고 그 안에서 유일하게 꽃피운 녹색 오러.
마물들의 이목이 헨리에게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키르르르르…….
이목이 집중된 마물들의 반응.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호기심이었고 비웃음이었다.
6급 구역이라면 모를까, 4급 구역부터는 어느 정도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놈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놈들을 과거의 클레버가 그랬듯이 ‘진화종’이라고 불렀다.
그랬기에 헨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놈들이 다가올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불나방을 위한 불꽃이 되어 더더욱 오러를 피워 올렸다.
부웅!
거리를 좁혀 오던 녀석들 중 하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큼지막한 바윗덩이 하나를 헨리에게 던졌다.
서걱!
깨끗하게 갈라지는 바위.
바위는 두 동강이 되어 헨리의 양옆으로 흩어져 굴렀다.
쿠구궁!
그리고 헨리는 다시 제자리를 지켰다. 이에 마물들의 눈동자가 더더욱 확장되었다.
“건방진 놈들.”
하찮게 느껴졌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듯한 태도.
그리고 녀석들이 흥미롭다는 듯이 슬슬 거리를 좁혀 왔을 때쯤, 헨리는 놈들 사이에 끼어 있는 ‘그 녀석’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찾았다!’
크고 작은 마물들 사이에 끼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 녀석.
녀석은 불에 대한 강인한 내성을 가지고 있고 하이에나처럼 남의 먹이를 훔쳐 먹는 습성이라든지 재빠른 기동력으로 도망치는 것이 특기였다.
녀석의 이름은 ‘파레곤.’
다섯 개의 꼬리를 가진, 4급 구역에서만 출몰하는 도둑 도마뱀 마물이었다.
이에 헨리는 검을 허리 안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체외에서 일렁이는 오러와 체내에서 흐르는 마력을 한데 모아, 칼끝에 마법을 응축시켰다.
“소닉…….”
-키에에에에!
헨리가 명령어의 절반을 읊는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마물들이 한순간에 헨리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커터.”
붕!
안쪽으로 당겨진 팔은 발도를 휘두르듯이 순식간에 원을 그렸다.
그리고 찾아오는 적막감.
헨리에게로 달려오던 마물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츠즛.
오러를 거두는 헨리.
이윽고 헨리는 칼집의 입구에 칼날을 대고 천천히 칼날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칼자루가 칼집의 끝에 맞물리는 순간.
시이이이이…….
쿠궁! 쿵! 쿠궁! 쿵쿵!
발걸음을 멈춘 마물들의 몸뚱어리가 횡축으로 갈라지며 잿더미 위로 그 육중한 몸체를 고꾸라뜨렸다.
-키, 키에?
당황하는 파레곤.
거구의 마물들 사이에서 강아지보다도 작은 녀석은 키가 몹시 작다는 이유로 헨리의 소닉 커터를 피할 수가 있었다.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레곤은 칼날을 거둔 헨리와 눈이 마주쳤다.
오싹.
본능적인 두려움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본능에 따라 도망치기 위해 두 발이 먼저 반응을 보였지만 헨리의 마력이 그보다 한 수 더 빨랐다.
“싱싱한 놈이군. 취직을 축하한다, 파레곤.”
블랙 티어의 핵심 재료. 헨리는 파레곤의 꼬리를 드디어 손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