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재림 (3)
헥터의 물음에 헤라리온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물론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물론 이러한 반응을 미리 예상해 대비책을 준비해 두긴 했다.
하지만 그 대비책을 펼치기에 앞서 헤라리온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아무리 최상급 힐링 포션을 사용했다고는 하나 한 나라의 왕을 기계처럼 부려 먹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배가 고프니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오, 음식 말인가! 먹을 수는 없어도 눈으로라도 보고 싶네!”
“알겠습니다, 그럼 장소를 이동하도록 하지요.”
곧이어 식사가 나왔다.
헥터는 아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몸임에도 한사코 음식 구경을 하겠다며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오오……! 이 얼마 만에 보는 음식이란 말인가!”
내온 음식들은 헤라리온의 배려로 최대한 제국의 식문화에 맞춰져 만들어진 음식들이었다.
음식을 보며 감탄하는 헥터에게 헨리가 말했다.
“그렇게 좋은가?”
“그럼! 어서 빨리 다른 방법인지 뭔지를 통해 음식 맛을 보고 싶어 죽겠다고!”
“하하, 서둘러 조치를 취하여 음식 맛을 볼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구조였다.
현재의 헥터는 엄밀히 말하자면 영혼만 남은 명계 소속의 망자이긴 하였으나 야누스의 권능으로 ‘명계’에서 ‘이승’으로 소속을 바꾼 상태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헥터는 명계의 인과율에 의해 끌려갈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특별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계속해서 영적인 존재로 이승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불로불사의 존재라고 부르는 게 맞겠군.’
그야말로 리치와도 같은 상태.
하지만 리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리치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라이프 포스 베슬 같은 생명 유지 장치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헥터가 무적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헥터는 영적인 존재였으므로 애초에 특수한 장치가 없는 한 누군가와 물리적인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헤라리온의 손을 거친 특별한 몸체가 없는 한,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만 하며, 이승에는 개입할 수 없는 고독한 방관자로 살아야만 했다.
‘게다가 마법에도 취약하지.’
또한 물리적인 접촉을 할 수 없는 만큼 물리적인 공격에도 영향을 받진 않겠지만 마법이나 오러, 정령술과 같은 특수한 힘이라면 그 사정이 달랐다.
‘여러모로 까다로운 존재야.’
만약 헥터에게 최상급 소드 마스터급의 오러와 뛰어난 검술 실력이 없었더라면, 부활한 헥터의 목숨은 날파리만큼이나 하찮았을지도 몰랐다.
이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이어서 차가 나왔으나 헥터는 이번에도 역시 차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헨리가 물었다.
“전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사온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왕가의 비밀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만, 다름이 아니라 이제 베네딕이 죽었으니 ‘라의 검’ 자리가 공석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라의 검은 곧 사막의 무신을 뜻하는 자리, 차기 사막의 무신은 어떠한 방식으로 뽑으실 예정입니까?”
“전통을 따라야겠지요. 이변이 없다면 예정대로 무투 대회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참가하시겠군요.”
“제가 말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헨리의 물음에 헤라리온은 대번에 손사래를 치며 참가 의사를 부정해 보였다.
이에 헨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선대 칸인 헤라볼라 칸께서는 라의 아들임과 동시에 사막을 지키는 라의 검이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전하께서도 그 의지를 이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는 아버님만큼의 재능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아버님이 사막의 무신이셨으니만큼 전하께서도 능히 그 자질을 타고 나셨습니다. 베네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런 자질을 말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핏줄은 그 힘을 속일 수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헤라리온은 검술에 자질이 없다기보다는 흥미를 느끼지 못해 단련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혹시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 검술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신 것은 아닙니까?”
“좋은 스승……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릇 모든 배움은 좋은 스승을 두었을 때야말로 진정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습니까?”
헨리의 설득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설득이 길어질수록 어느 순간부터 헤라리온은 헨리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충 넘어왔군.’
뜬금없이 헨리가 헤라리온에게 검술의 단련을 권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대의 헤라볼라 칸이 그랬듯이 헤라리온 또한 라의 아들임과 동시에 라의 검으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괜히 권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다. 그리고 헤라리온의 성장은 곧 나의 전력이 늘어나는 것과도 같은 법.’
더불어 현재의 헤라리온은 지금 가진 라의 권능조차도 아직 온전히 깨우치지 못한 상태였다.
헨리는 그 이유로 헤라리온의 나태함을 꼽았다.
그러니 라의 검을 핑계로 그를 최대한 두들겨 어떻게든 진짜 라의 능력들을 깨닫게끔 할 생각이었다.
이에 헤라리온이 말했다.
“하지만 헨리 공,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반란이 진압된 지금, 저에게 선뜻 검술을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하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어차피 한동안은 헥터의 온전한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머물러야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설마?”
“그렇습니다. 비록 헥터의 검술이 샤하트라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검왕이라고 불렸던 자입니다. 저 또한 헥터에게 가르침을 받은 몸. 그러니 전하 또한 헥터에게 검술을 배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 내가?”
그 순간, 곁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헥터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며 반문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일 텐데 한동안 수고 좀 해 주지 그래?”
“가르치는 거야 어렵지 않다마는……. 좋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 제자 하나 더 기른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인재는 항상 주변에 있는 법이다.
특히 헤라리온이 샤하트라의 검술이 아닌 헥터의 검술을 배운다면 미래에 제국군을 상대할 때 필시 도움이 될 터.
“그럼 이야기가 대충 정리된 것 같군요.”
헥터를 온전히 부활시켰고 헤라리온의 성장을 약속받았다.
교역품으로 취급할 상품들도 대부분 최대한 사들이기로 하였으니 헨리는 이제 그만 슬슬 다음 계획을 실행키로 했다.
“전하, 혹시 전하께서만 허락해 주신다면 헥터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어차피 지금부터 할 일들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이라 굳이 두 분께서 저와 함께 있을 필요는 없거든요.”
“감사합니다, 전하.”
여유를 얻은 헨리는 즉시 헥터와 함께 수도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평범한 방법으로 수도를 빠져나오면 이목이 집중될 것이 뻔했다.
“음? 날 수 있냐고?”
“그래, 지금 네 모습으로 걸어갔다간 수도가 발칵 뒤집힐 것이 뻔하니까.”
“해 본 적은 없지만 한번 시도는 해 보겠다.”
헨리의 권유에 헥터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중 부양을 시도했다.
그리고 실험 끝에 완전히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육체가 없는 순수한 영혼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갑옷은 가서 주도록 하지.”
마력만 풍부했다면 텔레포트를 사용하면 되었지만 현재의 헨리는 마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
그래서 좀 번거롭더라도 플라이 마법으로 이동키로 했다.
이윽고 수도와 어느 정도 멀어졌을 무렵, 지상에 착지한 헥터가 외쳤다.
“와라!”
절그럭절그럭!
철걱! 철걱! 철걱!
마치 합체 로봇을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헥터가 물었다.
“그나저나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지?”
“무슨 일이긴, 당연히 수련 때문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너와 단둘이 여기까지 나올 이유가 없잖아?”
“그렇군. 그럼 그동안의 수련 성과를 한번 확인해 보실까?”
“그전에 잠깐 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보여 줄 것?”
무더운 땡볕 아래, 헥터를 눈앞에 두고 검을 뽑아 드는 헨리.
그리고.
츠즈즈즛.
“……!”
헥터의 붉은 안광이 눈에 띄게 거대해졌다.
“너……!”
“그래. 드디어 나도 터득했지.”
오러를 터득한 이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오러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헨리는 아랫배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녹색 빛의 오러를 천천히 전신에 둘러보였다.
그런 다음 뽑아 든 칼날 위에까지 덧씌워 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오러들.
익스퍼트 특유의 정제되지 않는, 날 것 그 자체의 모습이었지만 출력되는 양만 놓고 보자면 도저히 익스퍼트 유저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에 헥터는 한동안 헨리의 오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곧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특이하군.”
“어떤 점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에게는 똑똑히 보여. 너의 오러는 배 속의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되 심장을 한 번 거쳐서 출력되고 있다. 마치 두 개의 코어를 다루듯이 말이야. 어때, 내 말이 틀렸나?”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 이에 헨리가 오러를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맞아. 네 말대로 나는 다른 검사들과는 달리 코어뿐만이 아니라 심장과도 그 힘이 연결되어 있어. 그리고 확신할 순 없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나의 오러는 심장에 쌓인 마력의 영향을 받는 것 같아.”
“심장의 마력이라면, 마법사들의 서클을 말하는 것인가?”
“그래.”
“듣도 보도 못한 구조로군. 하긴, 역사상 오러와 마법을 동시에 다룬 검사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이러한 운용 방식이 마검사에겐 지극히 평범한 것인지도 모르겠어.”
말 그대로였다.
오러를 터득했을 당시에는 그 상황이 너무 긴박하여 오러가 어떻게 출력되는지에 대해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토벌이 끝나고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지금. 헨리는 자신의 검술 스승인 헥터에게 오러를 보임으로써 자신의 힘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려고 했다.
이에 헨리는 체스트 속에서 거대한 투 핸디드 소드 하나를 꺼내 헥터에게 던졌다.
푹.
눈앞의 모래사장에 꽂히는 검.
“헥터, 검을 들어라.”
“대련을 신청하는 것인가?”
“아니, 대련이라기보다는 내 힘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적당히 오러를 꺼내서 협조해라.”
“하긴, 지금 네 실력으로는 감히 나와 대련할 처지가 못 되긴 하지.”
가벼운 놀림이었으나 헨리는 일일이 대꾸해 주지 않았다.
이에 흥미를 잃은 헥터가 눈앞에 꽂혀져 있는 투 핸디드 소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작군.”
투 핸디드 소드는 분명히 거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우거만큼이나 거대해진 헥터가 그것을 들어 올리자 투 핸디드 소드는 평범한 롱 소드 정도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검을 뽑아 든 헥터는 이윽고 검날에 자신의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헨리의 것과는 다른 오리지널의 푸른색 오러가 검날에 맺히기 시작했다.
“불편하군. 이런 쇠붙이가 없으면 오러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으니.”
“불만스러우면 다시 명계로 돌려보내 줄 수도 있는데?”
“……농담도 마음대로 못하겠군.”
“후후, 당연히 나도 농담이지. 그럼 선공을 양보받도록 하겠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헨리는 스스로 선공을 택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헨리.
아무리 헥터에게 ‘헥터 검술’을 배웠다고는 하나 헨리의 것은 제국 검술을 뒤섞은, 독자적으로 개량된 형태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헨리와는 달리 헥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까아앙!
헨리의 검이 헥터의 육체에 맞부딪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헥터는 끝끝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흐음.”
대신 음식을 맛보는 미식가처럼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황하는 헨리. 최소한 방어 자세 정도는 취해 줄 줄 알았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헨리는 더더욱 많은 양의 오러를 출력시키며 바람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치징! 챙, 챙, 챙, 챙!
그러나 헥터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치 견고한 성벽처럼, 장대비같이 쏟아지는 헨리의 공격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이윽고 헥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군.”
짤막한 감상과 함께 검을 들어 올리는 헥터.
헥터의 검날에 유리처럼 매끈하고 얇은 오러가 둘렸다.
후웅!
단순한 내려치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시야에서 헥터가 사라지고 말았다.
“여기다.”
“……!”
콰앙!
헥터의 검이 헨리의 몸뚱어리를 반쪽으로 갈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