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승리, 그리고 (1)
토벌군이 퇴각한 뒤, 헤라리온은 토벌이 이루어지는 내내 결심했던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 칼날은 절대로 감정이 뒤섞이지 않은 철저히 ‘법률’에 의한 심판이었다.
그리고 샤하트라를 떠난 토벌군은 한달음에 황궁으로 달려가 그 공로를 치하받았다.
“역시 자랑스러운 대가문주들이로다. 내 그대들의 용맹함 덕분에 오늘도 두 발 편히 뻗고 잘 수 있겠어.”
“과찬이십니다, 폐하.”
왕은 기분이 좋았다.
생각보다 빨리 토벌이 끝난 것과 더불어 이번 토벌에서 최고의 공적을 세운 이가 다름 아닌 아이젠이라는 사실이 더더욱 기뻤기 때문이다.
“아이젠, 그대는 항상 젊은 두 백작들 못지 않은 혈기왕성함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나를 기쁘게 하는군.”
“폐하, 제가 비록 몸뚱어리는 노쇠하였을지는 모르나 제국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할 뿐이옵니다.”
“크하하하! 암, 그렇고말고! 당연히 그렇겠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대후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샤하트라의 왕도 아이젠 백작을 추천하는 추천서를 보냈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결과는 없지 않은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왕의 옆에 서 있던 아서스 공작과 알프레드 후작은 왕의 주장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특히 아서스는 웃는 듯하면서도 그 미소 안에 짙은 울분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번에는 그 질문이 같이 토벌에 참여한 두 백작에게로 향했다.
이에 두 백작의 표정이 살짝 굳는 듯하였으나 이내 곧 환한 미소를 띠며 물음에 긍정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폐하.”
“아이젠 백작이 마땅히 후작으로 승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역시 선의의 경쟁을 벌인 사이들답군. 좋다! 그럼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친히 그대들을 위한 성대한 연회를 베풀도록 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노고의 치하는 핑계일 뿐이었다.
왕은 그저 이 좋은 날을 핑계 삼아 성대한 잔치를 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에 세 백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 긴 전쟁의 여독을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파티에 대한 기대를 품은 폭군의 기분을 깨뜨릴 순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미 승전보가 담긴 전령을 보낸 직후부터 연회는 예정된 행사였다.
게다가 벌써 초대장을 발부받은 귀족들이 황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에 잠깐의 치장 시간을 획득한 아이젠이 황궁을 벗어나며 말했다.
“헨리.”
“예, 백작님.”
“너는 이번 황궁 파티가 처음이겠군?”
“그렇습니다, 백작님.”
“흐흐, 그렇다면 내 친히 너의 예복을 정해 주도록 하지. 넌 나만 믿으면 된다.”
“……예, 감사합니다. 백작님.”
쓸데없는 호의였다.
백작의 사교계 욕심은 헨리가 죽기 전부터 유명했지만 그보다 더 최악인 점은 아이젠 백작이 그야말로 비싸기만 하고 멋이라곤 없는 전형적인 졸부 스타일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황궁의 사교 파티는 진작 거절했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참석해야 할 일이긴 하지.’
자신이 죽고 권력 구조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특히 개국공신 쪽에 줄을 댔던 지방의 유지들이 대거 몰락하면서 어떠한 인물들이 지방을 장악했는지 미리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토벌 공신인 세 백작들은 황제의 배려로 마탑의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것도 무려 왕복권으로 말이다.
그렇게 쇼난 지방에 도착한 직후, 헨리는 아이젠과 극적인 협의하에 그나마 우습게 보이지 않을 예복을 골라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 * *
파티가 시작되었다.
파티가 시작된 직후, 왕의 성대한 축배사가 끝나자마자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이젠 주위로 몰려들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뒷방 늙은이인 줄로만 알았던 도태된 권력자가 어느 순간 날개 돋은 범처럼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아이젠은 그러한 관심을 즐겼다.
간만에 집중되는 이목에, 과거의 영광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는 그러한 아이젠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반과 함께 황궁의 음식들을 즐겼다.
“기분이 어떠세요?”
“어떻긴, 감회가 새롭지.”
“확실히 많은 변화가 일긴 하였더군요. 지방 유지들이 대부분 교체된 걸 보니 스승님이 돌아가신 이후, 꽤 많은 사람들이 웃고 울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법이지……. 만약 이변이 없다면 이 그림은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변은 직접 일으키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벌써 바뀔 조짐이 슬슬 보이는 것 같은데요?”
“아이젠은 기껏해야 보험밖에 되지 않아. 다들 반짝 스타라고 생각할 게다.”
“그리고 그 반짝 스타를 영원히 빛나는 별로 만드는 게 저희들이 할 일이구요.”
“자신 있느냐?”
“없다면 시작도 안 했을 겁니다.”
“크크크, 아무리 생각해도 대공은 참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 어쩜 이렇게 자신과 똑 닮은 놈을 제자로 두신 건지…….”
반은 마치 죽은 헨리 모리스와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시고 황궁 사교 파티에까지 초대됐는데 이대로 술만 즐기다가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이게 바뀌었잖아요, 이게.”
헨리는 대답과 동시에 손으로 외모를 훑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에 반의 눈동자가 일순간 확장되며 광대가 치솟아 올랐다.
“그렇지! 내가 한동안 바빠서 그걸 잊고 있었구나!”
“저는 개인적인 볼일을 좀 보고 올 테니 형님도 이제 그만 즐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 내가 너무 오랜만에 사교 파티에 와서 잠시 본분을 잊었다. 그럼 이따가 보자.”
핫한 가십거리와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서 술만 즐긴다는 것은 파티에 참석한 여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적어도 반의 철학에는 그랬다.
그에 비해 여색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헨리는 파티장을 돌아다니며 중앙귀족들에게 줄을 댄 신흥 거물 세력들에 대한 확인에 나섰다.
‘하나같이 더러운 놈들뿐이로군.’
개중에는 영지민들의 고혈을 지나치게 쥐어짜 헨리에게 혼쭐이 났던 귀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헨리가 죽고 눈치 볼 사람이 없었으니 다시 고개를 내밀고 활개를 치는 것이었다.
안면들을 모두 확인한 헨리는 이윽고 혀를 차며 회장 바깥으로 나갔다.
어차피 헨리는 아이젠의 가신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었으므로 굳이 회장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만에 황궁에 들어왔는데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무려 제국의 황궁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황궁을 건축할 때 직접 참여했던 수많은 기술자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부디 남아 있어야 할 텐데.’
헨리의 목적은 전생에 처형대에 오르기 전에 황궁 곳곳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보물들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굳이 위험인물들이 많은 황궁에 보물들을 숨겨 둔 까닭은 간단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까.’
유산으로 남기려 했던 보물의 수는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귀한 것들은 감히 일반인들의 손에 닿지 못하는 곳만 골라서 숨겨 두었다. 이를테면 베놈의 심장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물건들이 세상에 풀리면 높은 확률로 심성이 더러운 놈들에게로 흘러갈 테니까.
탁탁.
헨리가 바닥에 두 번 발을 구르자 이윽고 샤하트라에 침투했을 때처럼 몸이 어둠 속으로 동화되었다.
‘쯧, 내가 만든 집에서 숨어 다녀야 한다니.’
웃지 못할 일이었다. 더불어 주어진 시간 또한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원하던 물건을 누가 가져갔을 경우 시간만 낭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은 루미놀의 발찌부터다.’
루미놀의 발찌.
발목에 착용하는 장신구로, 대지에 스며들어 있는 마력들을 착용자의 몸으로 끌어당기게 하는 아주 희귀한 아티팩트였다.
‘베네딕 때문에 축척해 둔 마력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러니 한동안은 마력 수집에만 힘을 쏟아야 해.’
현재 헨리의 잔여 마력량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베네딕을 잡는 데 너무 많은 양의 마력들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명색이 8서클 대마법사였지만 여전히 5서클의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현재 헨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보물들은 다름 아닌 마력 회복을 돕는 것들이었다.
어둠 속으로 동화된 헨리는 무도회장을 벗어나 황궁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아이젠이나 텐의 저택도 무지막지하게 넓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른 부유 저택들에 비해 최소 수십 배는 더 넓은 황궁을, 과거에는 제집 드나들 듯이 거닐긴 했지만 몇 년 만에 방문한 터라 그런지 약간 헷갈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벅저벅.
황궁을 수시로 돌아다니고 있는 근위병들을 피해 헨리는 발찌를 숨겨 둔 어떠한 동상을 찾고 있었다.
동상의 이름은 ‘작은 영웅’으로 통일 전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병사들을 기리는 뜻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기념상이었다.
‘이상하군. 분명히 이쯤에 세워 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작은 영웅상은 황궁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정원 한편에 세워 두었던 걸로 기억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원을 살펴보아도 작은 영웅상은커녕 그 많던 기념상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그때였다.
“저, 정말로 여긴 아무도 안 오겠죠?”
“내가 이 근처 경계 담당인데 이 시간대에는 절대로 아무도 안 와. 그러니까 오빠만 믿어.”
은밀한 대화 소리에 헨리는 가만히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근위병 한 명과 궁녀 한 명이 격렬한 입맞춤과 함께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헨리를 볼 수 없었다. 헨리는 현재 마법으로 은신 중인 상태였으니까.
이에 헨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뒤, 은신 마법을 해제하고 헛기침을 해 보였다.
“흠흠.”
“……!”
뜨거웠던 숨소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절그럭거리며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곧 얼굴이 벌게진 근위병이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음? 누가 있는 줄은 몰랐군그래.”
모르는 척 시치미를 잡아떼는 헨리. 이에 근위병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구십니까?”
“나는 아이젠 백작님의 하나뿐인 가신으로 있는 헨리라고 하네.”
“죄, 죄송합니다! 감히 몰라뵈었습니다!”
“아니야, 나도 가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모를 법도 하지. 그런데 말이야, 원래 여기쯤에 분명히 작은 영웅상이 세워져 있지 않았나?”
“그렇긴 했습니다만, 작은 영웅상은 폐하의 지시로 전쟁 추모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럼. 난 술이나 깰 겸해서 산책하고 있는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예, 옙!”
당황스러움에 경례까지 해 보이는 근위병.
작은 영웅상의 위치를 알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서둘러 자리를 비켜 주는 것뿐이었다.
이윽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동화된 헨리.
헨리는 궁중 정원을 벗어나면서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까짓 게 감히 전쟁 기념상을 옮겨?’
정원에는 작은 영웅상뿐만 아니라 전쟁 영웅들을 기리는 각종 추모상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그의 아버지인 골든 잭슨의 것도 있었다.
‘건방진 놈 같으니…….’
화가 났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혈육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된 주제에 영웅들을 기리지는 못할망정 그 흔적들을 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헨리는 다시 한 번 황제 놈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렇게 황궁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전쟁 추모관에 도착한 직후였다.
‘근위병도 없다고?’
황궁의 모든 시설물에는 그것을 지키고 관리하는 근위병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쟁 추모관에는 근위병은커녕 추모관을 관리하는 관리인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관리인이 없기에 잘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통일 전쟁 시절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전쟁 추모관.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자신의 동료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상이나 흉상들이 대거 세워져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개국공신들 전부가 반역죄로 사형당하고 말았다.
그러니 전쟁 추모관은 사실 남겨 둘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헨리는 입안 가득히 퍼지는 쓰라림을 삼키며 작은 영웅상을 찾았다.
‘여기 있었군.’
추모관의 가장 안쪽 구석에 세워진 작은 영웅상.
그 개국공신들도 신경 쓰지 않는 마당에 병사들 따위나 기리는 작은 영웅상은 당연히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찾았다.’
하지만 그렇게 잊힌 덕분이었을까?
헨리는 작은 영웅상의 발목에 채워진, 얼핏 보면 동상의 일부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회색빛 발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딸깍, 후두둑.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발찌를 헨리는 능숙하게 벗겨 냈다.
그러자 표면을 덮고 있던 석면이 떨어지며 발찌 본연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아악!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본모습을 드러낸 루미놀의 발찌는 푸른 광휘를 잠시간 번쩍였다.
발목에 발찌를 채우는 헨리.
그러자 발아래에 흩어져 있던 자연의 마력들이 발찌로부터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한결 낫군.’
헨리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른 보물들도 찾아 나서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