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두 번째 각성 (5)
시끄러운 아침이었다.
그 발단은 베네딕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비네스와 셀렌이 토벌군 진영 근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은 교대로 근무를 서던 경계병들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당장 어제만 해도 베네딕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그녀들이 상처 하나 없이 막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헤라리온이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쏟아지는 안도감에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런 헤라리온을 보며 세 명의 백작들은 황당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근데…… 그럼 이렇게 되면 베네딕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일한 장애물이었던 포로들이 밤사이에 무사히 귀환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수도에 있는 잔당을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세 사람의 눈빛이 바뀌었다.
포로가 무사히 귀환한 것은 분명히 잘된 일이었으나 지금 당장 그 이유를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베네딕의 목을 베느냐였다.
“모두 출전을 준비하라!”
너 나 할 것 없이 백작들 모두가 서둘러 출정을 준비했다.
그 덕분에 아침 식사가 채 보급되기도 전에 각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때 아닌 역습이 시작되었다.
“전하는 가족분들과 막사에 남아 계십시오. 금방 베네딕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헤라리온에게 호언장담을 해 보이는 아이젠.
이에 헤라리온은 여전히 가족들을 부둥켜안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세 백작군 모두가 수도로 뛰어 들어간 직후였다.
“훌륭하십니다, 전하.”
박수를 치며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
헨리였다.
헨리의 등장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헤라리온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떻게…… 연기는 좀 괜찮았습니까?”
“극단에 데뷔하셔도 될 만큼 아주 출중한 연기력이셨습니다.”
“헨리 공의 덕이 있는데 이 정도라도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봐도 놀라운 힘이야.’
바퀴벌레처럼 질긴 베네딕 덕분에 하마터면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하지만 클레버에 의해 간신히 헤라리온의 막사로 옮겨진 헨리는 헤라리온이 가진 라의 권능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이루어 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다행히 병사들이 깨어나기 전에 헤라리온과 말을 맞출 수가 있었다.
“두 분은 조금만 더 이따가 깨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잠든 두 사람은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깨워 봤자 일일이 입을 맞춰야 했으므로 미리 헤라리온에게 양해를 구해 잠든 두 사람을 전략적으로 사용키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과는 굉장했다.
백작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포로들에게 의아함을 느꼈지만 포로가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곧바로 베네딕 사냥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텅 빈 토벌군 진영.
아이젠은 포로들이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헨리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은 느긋하게 승전보를 기다리는 것뿐이군요.”
“근데…… 정말로 그 베네딕을 쓰러뜨린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그 증거로 가족분들과 왕의 증표까지 버젓이 챙겨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네딕을 홀로 상대하셨으니까요.”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목숨을 걸었기에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역시 헨리 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분이셨군요.”
“과찬이십니다. 가족분들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응당 제가 나섰어야 했을 일입니다. 오히려 저를 믿고 증표를 맡겨 주신 전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히려 헤라리온과 척을 질 뻔하였으니까.
또한 베네딕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수익을 올렸다.
그것은 바로 오러의 깨달음.
헨리는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지.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여 줬으니.’
솔직히 몰랐다, 그 많은 마법 포격들을 맞고도 살아남을 줄 몰랐고 그 상태에서 자신을 한계 치까지 몰아붙일 줄은.
하지만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준 덕분에 헨리는 난생처음으로 이번 생의 최대 한계 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오러를 터득한 것만으로도 나에겐 최고의 수익이다.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금방 단련에 들어가야겠어.’
아직은 오러를 터득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밝힐 상황도 아니었을 뿐더러 누군가에게 밝히기 전에 다시 한 번 그 힘을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기본적인 인사치레를 끝낸 뒤 그제야 본격적인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전하, 곧 있으면 토벌이 끝나게 될 텐데 전에 약속했던 것은 언제쯤 시행해 주실 생각입니까?”
“아,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헨리 공의 부탁은 사적인 것이니 왕권의 안정화와는 별개로 언제든지 이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하셨던 ‘동맹’에 대해서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라면…… 저는 언제든지 의향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헨리 공.”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저희 쇼난가와 정식으로 교류를 맺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교류라면 이미 제국과 충분히 맺고 잊지 않습니까?”
“공물을 보내는 것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어색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헨리가 제안하는 교류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샤하트라의 ‘쇄국정책’을 거두어 달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전통성을 중요시하는 샤하트라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겠지. 샤하트라 특유의 폐쇄적인 성격은 전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었으니까.’
폐쇄적인 성향에는 장단점이 있다. 하지만 흐르지 못하는 물은 언젠간 썩기 마련.
시간이 지날수록 장점보다 단점이 커지는 것이 바로 쇄국정책이었다.
그리고 헨리가 그리는 그림에는 반드시 외부와 교류하는 열린 성향의 샤하트라가 필요했다.
이에 헨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전하, 지금 제가 드리는 제안이 몹시 껄끄러운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반란 사태를 통해 고립적인 쇄국정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지 않으셨습니까?”
“……딱히 반박하진 않겠습니다.”
“쇄국정책이 전대 때부터 지켜져 온 아버님의 뜻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현재의 제국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고립을 자처하겠다는 건 아서스에게 또다시 빈틈을 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환술의 힘으로 외세의 침입을 막아 왔지만 결국 내부 분열로 인해 그 명맥이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법에 익숙지 않은 술탄의 백성들은 마도사 한 명에게 겁을 집어먹어 성을 함락당했으며 사막 최고의 무력가인 무신은 헨리 한 사람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덕분에 샤하트라의 약점이 너무나도 많이 드러난 상황.
이러한 상황 속에서 끝까지 쇄국정책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아서스에게 여지를 남겨 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겁게 침묵을 삼키는 헤라리온.
마치 성적표를 지적받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헤라리온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만약 쇼난가와 교류를 맺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주어야 하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을 수 있습니까?”
‘됐군.’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헨리.
수십 년간 쇄국정책을 철회한 적이 없던 샤하트라가 처음으로 ‘교류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이미 헤라리온이 호기심을 드러낸 이상, 헨리는 이번 제안 또한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이에 헨리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쇼난가는, 아니 저는 샤하트라의 사람들에게 ‘마법’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
토벌이 진행될수록 병사들은 이상함을 느꼈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왕궁까지 진격해 보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베네딕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백작들은 이상함을 느끼고 뒤늦게 베네딕의 추적에 나섰지만 이미 죽은 베네딕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못 찾을 수밖에.’
예정대로 토벌은 끝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과 함께 아서스의 흔적을 뒤져 보았지만 예상대로 아서스는 아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반란군은 머리가 잘린 짐승처럼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도 베네딕의 행방불명에 대해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들이었다.
반란군 중 일부는 베네딕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생각하여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우스운 오해였다.
물론 그러한 해프닝 속에서도 일부 백작군은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고문하였지만 그 또한 우스운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렇게 허무한 마무리와 함께 샤하트라의 반란은 드디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시지요, 전하.”
“……알겠습니다.”
비람이 헤라리온에게 출발을 안내했다.
반란이 종식되었다.
찬탈당했던 왕권은 베네딕이 죽음으로써 다시 헤라리온에게로 돌아갔다.
태양의 계단 앞에 선 헤라리온.
그의 곁에는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두 명의 왕족과 비람, 그리고 끝까지 신의를 지지 않고 샤하에서 버텨 준 왕궁 제사장들이 함께했다.
헤라리온은 처음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입었던 낡은 수트라를 입고 있었다.
헨리가 그를 배려하여 의복에 클린을 시전해 주었지만 평소에 입던 것과 비교하자면 한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헤라리온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첫 계단에 발을 올리고 힘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수많은 반란군이 곳곳에 포박된 채로 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고 있는 이들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리고 그 수는 계단을 오를수록 더더욱 늘어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태양의 계단에 올라 수도 칸에 발을 들이자 헤라리온은 자신의 두 귀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만세에에!”
“와아아아아아!”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함성과 만세.
그것은 수도가 전복된 와중에도 끝까지 헤라리온을 믿고 기다려 준 백성들의 진심이 담긴 환영 인사였다.
“위대한 라의 아들, 헤라리온 칸 만세에!”
“만세에에에에!”
헤라리온이 왕위를 되찾자 감격에 벅찬 백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두 팔을 벌려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헤라리온만큼이나 강력한 뚝심을 가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쪽 오아시스 민족, ‘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헤라리온은 벅찬 감격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끝끝내 눈물을 흘렸다.
‘유약한 놈 같으니.’
그리고 헨리는 그런 백성들의 인파에 뒤섞여 멀찍이서 헤라리온의 눈물을 지켜보았다.
‘이제 시작인가?’
이미 아이젠의 공적은 다른 두 백작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났으므로 대후작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후작으로의 승작은 곧 본격적인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이기도 했다.
‘앞으로 더더욱 치열해지겠지.’
이제 겨우 한 놈을 쓰러뜨렸을 뿐이다.
특히 이번 일의 배후에 아서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서스에게 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비록 꼬투리를 잡을 만한 근거는 잡지 못하였지만 아서스의 뜻을 확인한 헨리는 이를 부득 갈며 생각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엔 절대로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아서스.’
유구한 함성 속에서, 헨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목표를 굳건히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