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두 번째 각성 (4)
처음이었다, 이번 생에서 헨리의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 치까지 내몰렸던 적은.
헨리는 라이트를 눈앞에 터뜨린 것처럼 새하얗게 번지는 시야 속에 정신을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새하얗게 번졌던 시야는, 이내 곧 주변의 모든 것들을 느리게 만들었다.
‘이 무슨……?’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느려지는 그러한 꿈을.
하지만 지금 헨리가 보고 있는 것은 체스트 속 전체가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려진 공간 속에서 헨리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베네딕의 두 눈을 보았다.
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것은 두려움이나 설렘에 의한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두근.
다시 한 번의 심장의 박동.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 속에서, 아니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일정한 박자로 들려오는 심장의 박동는 헨리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히 가슴팍에서 들려야 할 심장의 박동이 그보다 더 아래쪽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두근.
‘아니다, 심장이 아니다……!’
심장의 박동인 줄로만 알았던 두근거림은 심장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허리와 아랫배 사이에 있는 ‘배 속’에서 나는 것이었다.
헨리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 기현상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기로 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배 속에서 울리는 두근거림이 점점 더 선명하고 잦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따뜻함과 편안한 느낌.
헨리가 처음 심장에 서클을 그렸을 때 느꼈던 그런 종류의 따스함이었다.
배 속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돌멩이 위에 손을 얹는 듯한 상상을 가하는 순간.
번쩍!
새하얗게 빛나던 주위가 에메랄드빛 광명으로 찬란하게 번쩍였다.
‘이건……!’
광명이 번쩍이고 난 뒤, 돌멩이인 줄로만 알았던 배 속의 그것은 어느덧 하나의 보석이 되어 있었다.
청명한 초록의 보석.
그 빛깔은 마치 에메랄드를 연상케 했지만 옥구슬처럼 큼지막한 것이 굳이 따지자면 여의주가 더 어울릴 법했다.
‘설마……!’
그리고 헨리는 그것이 본능적으로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코어.
그것은 ‘코어’였다.
‘나이트 하트’라고도 불리며 심장에 서클을 그려 마력을 운용하는 마법사들과는 달리 검사들은 배 속의 코어로부터 체내의 마력을 오러로 치환시킨다고 했다.
보석처럼 고운 자태를 드러낸 코어는 돌멩이였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한 두근거림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치이이잉!
이제는 완전히 그 기능을 일깨운 코어가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빛 기운이 헨리의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
따뜻했다.
마치 양수에 담긴 것처럼 폭주한 마력으로 인한 뜨거움이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진정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퍼진 코어의 힘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갈라진 검날의 마력을 대신해 검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번쩍!
휘감던 기운이 칼끝에 닿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느리게 흐르던 속도가 제 속도를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체스트 속의 속도가 다시금 원래대로 흘러갔을 때, 헨리는 여전히 기합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신이 또렷했다.
그리고 몸에서 타오르던 연기 또한 종적을 감추었다.
“……!”
검을 맞대고 있던 베네딕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렸다.
눈꺼풀을 한 번 깜빡한 사이에, 헨리가 완전히 딴사람으로 뒤바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커헉!”
목구멍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분명히 조금씩 압도하고 있던 자신의 칼날이, 어느새 바위에 가로막힌 것처럼 묵직한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뒤로 조금씩 밀려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베네딕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맞부딪힌 칼날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
자신의 느낌이 맞았다. 분명히 두 쪽으로 갈라내고 있던 자신의 칼날은, 어느새 갈라진 칼날 사이에 걸려 도리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팔 근육이 흔들렸다.
이제는 아무리 기합을 넣고 힘을 주어도 절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여기까지다.”
조그마한 목소리. 헨리의 나직한 경고에 베네딕의 전의가 순식간에 낭떠러지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그렇게 떨어진 낭떠러지 아래에는 자신의 최후가 파묻힐 죽음의 경계선이 뚜렷하게 보였다.
“안돼……!”
“돼.”
촤아아아악!
대각선으로 갈라지는 녹색 섬광.
뒤로 조금씩 기울어지던 헨리의 가냘픈 칼날은 어느새 거대한 무소의 뿔이 되어 베네딕이라는 태산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커허어억…….”
콰직!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골반까지 거대한 검흔이 생겼다.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일까, 베네딕은 뒤로 쓰러지는 것 대신 바닥에 칼날을 박아 어떻게든 몸뚱어리를 지탱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걱!
투둑, 툭, 툭…….
헨리는 그런 베네딕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렸다.
바닥을 구르는 베네딕의 수급.
절명한 그의 두 눈동자가 저만치쯤 굴러가선 두려운 눈빛으로 헨리를 바라보았다.
스스슷!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헨리의 전신을 휘감고 있던 녹색 빛의 오러 또한 깔끔하게 종적을 감추었다.
탈캉.
집게처럼 갈라진 칼날을 바닥에 내던지는 헨리.
이제는 헨리도 한계였다.
결투가 끝났기에 긴장감 또한 일시에 풀려 버렸기 때문이다.
헨리는 목이 잘린 베네딕의 시체 옆에 쓰러져 누우며 나지막이 클레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클레버…….”
그리고 헨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 * *
“그게 지금 무슨 말이지요?”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베네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지다니요? 베네딕이 도망이라도 쳤다는 이야긴가요?”
“그게…….”
베네딕이 죽은 직후, 뒤늦게 베네딕을 찾아나선 모드레드는 베네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황당함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왕궁을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드레드는 일이 더 꼬이기 전에 서둘러 자신이 데리고 온 사람들과 함께 샤하트라를 빠져나갔다.
“죄송합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당황한 것은 모드레드뿐만이 아니었다.
아서스는 정말로 야누스의 힘을 원했기 때문에 손수 아이젠의 저택에서 비네스와 셀렌까지 납치해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 같은 황당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맥이 탁 풀렸다.
아서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어 보이며 모드레드에게 말했다.
“베네딕이 정말로 도망쳤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입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베네딕을 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잘 처리했으리라 믿긴 하지만 샤하트라에 흔적을 남기고 온 것은 아니겠지요?”
“확실하게 정리하고 왔습니다.”
“……알겠어요.”
베네딕이 정말로 도망친 것이라면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그를 먼저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모드레드가 집무실을 벗어난 직후, 집무실 한편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안색이 창백한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를 발견한 아서스가 탄식을 내뱉듯이 나지막하게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아, 드라칸 경…….”
남자의 정체는 드라칸 로티크였다.
그는 사전에 아서스와 약속한 대로 제시간에 맞춰 아서스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이에 아서스가 한숨을 내쉬자 드라칸이 아서스의 안부를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방금 전에 모드레드 경에게 듣기론 현재 베네딕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는군요.”
“……베네딕이 말입니까?”
“그렇다네요.”
“그게 지금 무슨…….”
베네딕이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드라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야누스의 죽음을 다루는 힘은 드라칸이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 중이던 ‘키메라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연구 또한 아서스의 지시로 시작된 것이었다.
역탑은 삼대가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 집단이었으니까.
그리고 드라칸은 역탑이라는 비밀 집단의 수장인 역탑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드라칸이 역탑주의 자리를 승낙한 까닭은 간단했다.
제국법으로는 감히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할 연구들을 아서스의 후원하에 가능케 해 주겠노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라칸은 아서스의 후원하에 마음껏 인륜을 거스르는 어둡고 잔인한 연구들을 행해 왔다.
그리고 그런 연구들 중에서도 드라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것이 바로 키메라 연구였다.
“공작님.”
“예?”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화가 났다.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힘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다.
마법사의 지적 호기심은 때때로 이성을 잃어버리게 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으니까.
“흐음.”
아서스는 분노한 드라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이에 드라칸이 점점 더 살기를 담아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처음과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대체 얼마나 더 저를 기다리게 하실 생각인 겁니까?”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무너진 기대가 이성을 잃게 함으로써 아서스가 자신의 상관임을 잊게 만든 것이다.
“많이 흥분하셨군요.”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 이에 아서스가 눈꺼풀을 감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러자.
“……!”
등골이 서늘해졌다.
눈을 감았다가 뜬 아서스의 눈동자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고, 공작님…….”
전신을 엄습하는 날카로운 공포에, 드라칸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곧바로 기세를 수그러트렸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는 아서스.
원래의 눈동자로 되돌아왔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버리는 드라칸.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만큼 아서스가 방금 전에 보여 준 눈동자에는 ‘압도적인 공포’가 있었다.
이에 아서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그래도 다음번엔 조심해 주세요, 드라칸 경.”
“죄, 죄송합니다, 공작님…….”
“후훗,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몰라 약간의 보험을 들어 놓았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드라칸의 귀에는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서스에게 겨우 용서받은 드라칸은 도망치듯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라의 눈동자를 통해 헨리의 진심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기다리는 내내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진심을 확인하는 것과 결과를 장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였으니까.
헤라리온은 밤새도록 막사 안을 맴돌다가 이제는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사막의 어둠이 최고조에 달했다. 태양이 떠오르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었으니.
‘설마…….’
자꾸만 나쁜 상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유능한 헨리라고는 하였지만 상대는 무려 사막 최고의 전사인 베네딕이었다.
그렇게 질 나쁜 상상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미야옹.
“고양이?”
낯선 울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넝마가 된 헨리와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자신의 가족들이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
“이 무슨!”
너무 놀란 나머지 눕혀진 그들에게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그리고 혈육들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헨리의 안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헨리의 가슴팍에 귀를 가져다 댄 헤라리온은 직감적으로 헨리가 죽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험했다.
그리고 이렇게 그를 죽게 만들 수도 없었다.
화아아악!
가족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고마움, 그리고 그것들을 비롯한 갖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헤라리온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았다.
막사 가득히 번지는 라의 빛.
헤라리온의 간절함이 라의 빛이 되어 헨리의 육신을 감싸 안았다.